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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90화 (외전 완결) (90/95)
  • 두 번째 신혼 90화

    세인의 말에 은희의 입가가 실룩였다. 언뜻 당혹스러운 낯빛이 스쳤다.

    혜인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출생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할 리가 없었다.

    “세인아.”

    말하지 말라는 듯 은희 음성이 옅게 떨려왔다.

    그러나 이제 세인에겐 이런 수모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이한과 윤우를 봐서라도 어디서든 기죽지 않을 터였다.

    건강을 되찾은 뒤 가족 간의 화합을 제일로 삼는 서 회장, 제대로 된 모정을 알게 한 미연, 다정다감한 시아버지, 그리고 이한의 누나까지.

    그들은 세인을 향해 아낌없이 퍼부어주었다. 정서적인 풍요와 물질적인 것을 쉬지 않고 채워주었다.

    모두 세인을 사랑해 마지않았다. 세인은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되었다.

    “언니, 그거 알아?”

    “정세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은희가 그녀의 기준으로 체통 없게 소리쳤다.

    “언니 입양아야.”

    “……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혜인의 입매가 찌그러졌다.

    “그러니까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 다리 다친 것도 내 탓이 아니…….”

    “정세인!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니!”

    별안간 들이닥친 은희의 날카로운 음성에 잠자코 있던 진 비서가 나서서 세인을 감쌌다.

    “그만하십시오.”

    “비켜요, 지금 가족끼리 얘기하잖아.”

    은희가 소리치며 혜인을 감싸듯 휠체어 손잡이를 당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혜인의 표정이 세인의 예상과 달리 침착했다.

    아니, 떨고 있다고 해야 하나.

    혜인의 눈두덩이 겁에 질린 것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세인은 현기증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들었어? 내가 방금 언니 입양아라고 말했어.”

    쐐기를 박듯 세인이 재차 말하자, 혜인이 두 손을 덜덜 떨었다.

    “무, 무슨 소리야. 대, 대체 그런 거짓말을 왜…….”

    “언니, 태어나면서부터 아팠어. 내 탓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팠던 거야. 그런 언니를 심 원장님이 입양한 거고. 이해가 돼?”

    세인이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하자 은희가 휘청거렸다. 이마를 짚으며 노골적으로 세인을 쏘아보았다.

    “너, 너……!”

    그러나 세인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녀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그 순간 세인은 혜인이 울듯이 웃는 걸 목격했다.

    뭐지?

    혜인은 무언갈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치 꼭꼭 숨겨두었던 죄를 들킨 사람처럼 겁에 질려 보였다.

    세인은 순간, 혜인이 숨겨둔 본심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다 알고 있었구나.”

    세인의 나지막한 질문에 혜인의 어깨가 경기하듯 바르르 진동했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던 거야. 언제부터 알았어? 설마 처음부터였어?”

    아니,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닐 거다. 세인도 까맣게 몰랐고 혜인도 아는 눈치는 아니었다.

    만약 진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빌려준 돈을 갚듯이, 당연한 것을 받듯이 세인의 인생을 저당 잡진 못했을 거다.

    천하의 악귀가 아닌 이상 그렇게까진 패악을 부리지 못했겠지.

    혜인이 진실을 알아차렸다면 분명 티가 났을 거고 세인이 눈치챘을 터다.

    그러니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된 시기는 불륜 사건이 터진 이후일 거다. 그때부터 혜인과 멀어졌으니까.

    그럼 여태껏 모르는 체했던 걸까.

    아마 은희에게 선뜻 내색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면 정말, 자신이 친딸이 아니게 되니까.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조심스레 품어야 할 테니까.

    여전히 가증스럽고 저열한 사람이었다.

    “알고 있던 걸 비밀로 한 거야?”

    세인이 기막히단 투로 묻자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은희가 고개를 숙여 혜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에요. 아니야. 엄마, 지금 세인이가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나 엄마 딸이잖아. 내가 왜 입양아야, 내가 왜…….”

    “그래, 세인이가 지금 거짓말하는 거니 들을 필요 없어.”

    “아니야, 아니잖아! 내가, 왜! 왜! 내가 왜 입양아야! 네가 입양아였어야지!”

    돌연 혜인이 힘겹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세인에게 닿을 만큼 소리가 작았다.

    목소리에 힘을 잃은 혜인은 전처럼 바락바락 큰소리를 내지르지 못했다.

    “아니야! 아니야! 너였어야 해!”

    재차 부정하던 혜인은 체력을 전부 소진했는지 눈을 뒤집어 까며 축 늘어졌다.

    “혜, 혜인아! 정세인, 이게 무슨 짓이니!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은희가 비명을 지르며 세인을 추궁했다.

    잊고 살던 두통이 밀려들었다. 세인은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세인이 가빠진 숨을 고르려 애쓰며 말했다.

    “앞으론 마주쳐도 말 섞지 말아요. 지금처럼 연 끊은 채로 그렇게 살아요.”

    “이렇게 폭탄을 던져놓고 연을 끊자고? 넌 가족이 그렇게 쉽게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건 줄 아니? 이것도 잠깐이야.”

    “위선 떨지 마세요.”

    세인이 침착하게 쏘아붙였다.

    “뭐?”

    “그냥, 내가 가진 게 탐나는 거겠죠. 긴말 안 할게요. 다시는 눈에 띄지 말아요.”

    세인은 이런 말을 해도 마음이 아프지 않단 걸 깨달았다. 그들의 바닥을 끊임없이 확인한 결과였다.

    “아…….”

    세인은 사르르 기분 나쁜 통증이 이는 배를 받치곤 진 비서의 팔을 잡았다.

    진 비서가 얼른 세인의 어깨를 감쌌다.

    “대표님!”

    “가요, 진 비서님.”

    돌아서는 순간 하늘이 핑그르르 돌았다.

    “대, 대표님!”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 강렬하게 배를 관통했다.

    “아, 양수가…….”

    “대표님, 의료진을 호출하겠습니다.”

    입술을 질끈 문 세인은 숨을 골랐다.

    은희가 혼이 나간 낯빛을 하곤 사람을 부르는 모습이 희미하게 멀어져갔다.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이토록 모진 어미라니, 평생 잊고 살아 마땅했다.

    문득 더블나인에서 퇴출당한 제일이 비슷한 업종을 떠돌다가 다른 여자와 또다시 불륜을 저질렀단 얘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결국 많은 위자료를 떠안은 채 이혼했다고 했나.

    무영은 중국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했다.

    범죄 조직에게 원한을 사는 바람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들었다.

    악인들은 그렇게 자멸했다.

    그러니 세인이 더는 그들로 인해 고통받을 일도,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했다. 출산의 징조가 임박한 것 같았다.

    ***

    세인이 눈을 뜨자마자 본 건 간호사의 얼굴이었다.

    세인의 이름을 부르곤 몇 가지 확인을 한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 뒤 병실로 이동했다.

    잠깐 잠들었다가 눈을 뜨자 이번엔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는지 손수건을 거둬 간 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라고 하던데, 윤우가.”

    “……윤우는, 읏.”

    배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세인이 이를 사리물었다.

    첫애를 자연 분만했을 때와는 또 다른 통증이 하반신을 강타했다.

    몇 시간 전, 양수가 먼저 터졌으나 아이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아 두 시간 정도를 진통으로 소비했다.

    진통은 최대 수치를 찍었고 자궁 문이 전부 열렸음에도 열매는 엄마 배 속이 더 좋은지 꼼짝도 하질 않았다.

    간호사 둘이서 멍들 때까지 배를 누르고 강한 내진을 했음에도 출산이 어려워 긴급으로 수술이 결정되었다.

    첫 아이를 자연 분만한 터라 수술을 하는 게 억울한 마음이 들 법도 한데, 너무 아파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 얼른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때 이한이 분만실로 들어왔다. 서울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도착했는지 물을 여유도 없었다.

    이한은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세인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주었다.

    ‘잘 견뎠어.’

    그 말 한마디에 세인을 괴롭히던 공포가 단번에 옅어졌다.

    ‘괜찮아.’

    세인은 이한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마지막으로 수술실로 향했다.

    회복실에서 이한을 보지 못해 내심 불안했는데, 바로 앞에 있는 걸 보자 마음이 놓였다.

    “윤우는 낮잠 자. 꿈속에서 엄마 만나겠다고.”

    이한이 몸을 비켜 바로 옆 보호자 침대에서 잠든 아이를 보여 주었다.

    그 정신에 아이를 데리고 온 게 이한다웠다.

    잠깐씩 다른 사람 손에 맡겨도 이한은 되도록 아이를 직접 데리고 다니는 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한은 아들 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세인이 힘없이 웃자, 이한이 옆으로 와 고개를 숙였다.

    다정한 그의 손길이 엉망이 된 얼굴 곳곳을 애틋하게 쓸어내렸다.

    “열매는……?”

    의사의 권유로 전신마취를 한 터라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열 개 정상, 심박수도 정상, 얼굴은 당신 닮았고.”

    이한은 핸드폰을 열어 속싸개에 돌돌 말린 신생아를 보여 주었다.

    자신을 닮았는진 모르겠지만 고생해서 태어난 아기답지 않게 뽀송뽀송했다.

    태지 없이 말끔한 모습이 벌써 고슴도치 엄마라도 된 듯 예뻐 보였다.

    안심하고 나자 이젠 이한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왔어요?”

    “내려오는 길이었어. 중간에 진 비서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윤우 녀석이 있어서 속도를 많이 못 냈어. 몸은 어때.”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세인이 이한의 손가락을 잡아 만지작거렸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뒤라서 솔직히 멍했다.

    휴식이 먼저겠지만 은희와 혜인을 만난 얘기부터 해야 했다.

    이미 진 비서가 말했을 테니, 이한은 분명 그들에게 화가 난 상태일 터다.

    그러나 세인의 고민을 다 안다는 듯이 이한이 입술을 붙여왔다.

    “지금은 쉬어야지.”

    남편의 입술은 목덜미까지 파고들었다.

    “하지 말아요. 나 더러운데.”

    “내 속처럼 더러울까.”

    “당신 속?”

    세인이 눈을 깜빡이며 말갛게 묻자 이한이 웃음을 흩었다.

    “이런 순간에도 안고 싶어서.”

    “…….”

    이한이 볼우물을 보이며 세인의 머리칼을 다시금 쓸어 넘기며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

    “응?”

    “열매, 아들이야.”

    “뭐?”

    눈물이 쏙 들어가는 소리에 세인이 큰소리를 내다가 밀려드는 통증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야, 거짓말.

    “윤우 형 됐어.”

    “자, 장난하지 말아요.”

    아이의 자세가 애매해 초음파상으로 성별을 관측하기 어렵긴 했다.

    “그게 탯줄이 아니었어.”

    가랑이 사이로 비친 것이 탯줄이 아니라 아들의 상징이었단 소리에, 세인의 입술에서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서운해서 그래?”

    “그런 게 아니라…… 집에 사둔 건 어쩔 거야.”

    딸이란 소리에 이한이 한가득 사재낀 아기용품을 생각하자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앙큼하게 엄마 아빠를 놀라게 한 아이를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라니.

    제 형과 어울려 놀 아이를 생각하자 금세 행복해진다.

    “고생했어. 이제 정말 마지막인 거 명심하고.”

    세인의 고집으로 둘째까지 출산했으나, 이한은 그 이상은 안 된다며 못 박았다.

    “너 아픈 거 더는 못 봐.”

    “……응.”

    진통만 10시간 했던 첫아이 때의 기억까지 더하자, 세인도 세 번은 자신이 없었다.

    이한의 호출을 받은 의료진이 달려왔다. 이한은 괜찮다는 말을 수차례 듣고도 10분 넘게 담당의를 들들 볶아댔다.

    세인이 내뱉은 피곤하단 말에 의료진은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윤우의 이불을 덮어주는 이한을 보며 세인이 입을 열었다.

    “나 안아줘요.”

    “잘못하다 건들까 봐 겁나는데.”

    “그래도.”

    세인 하나 예뻐하기도 힘들어서 아이는 안 낳겠다던 이한은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베개로 탑을 쌓았다.

    그 후에야 구겨진 재킷을 벗고 시계를 풀어 옆에 둔다.

    “이한 씨도 옷 갈아입고 와요.”

    “이따가.”

    침대 옆에 걸터앉으며 이한이 다시금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첩을 뒤져 아까는 보지 못한 열매의 사진을 여러 장 더 보여 주었다.

    남이 보기엔 그 사진이 그 사진 같겠지만 부부에게는 달랐다.

    이건 입술을 동그랗게 했고, 이건 얼굴을 찡그리고 있고, 이건 각도가 다르게 찍혔다.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눈여겨보던 세인의 콧대를 가볍게 매만지며 이한이 말했다.

    “봐. 정세인 닮았지.”

    “모르겠는데 잘……. 그런데 윤우는 알아요?”

    여동생이 생긴다고 알고 있던 윤우의 반응이 조금 걱정되었다.

    멋진 오빠가 될 꿈에 부풀어 있는 아이였다.

    “아직. 그래도 좋아할 거야.”

    “응. 얼른 안아보고 싶다.”

    맞은편 침대에 누워 있는 윤우도, 새 생명도. 그리고 이한도.

    세인은 사랑스러운 세 남자를 마음껏 품에 넣고 싶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잠들었다.

    “잘 자.”

    이한이 자장가를 부르듯 언젠가 세인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속삭였다.

    “좋은 꿈 꾸고, 아프지 마.”

    스물두 살의 세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변함없이 고백했다.

    “사랑해.”

    새근대는 숨소리 위로 이한의 따뜻한 눈빛이 이불처럼 내려앉았다.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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