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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9화 (89/95)
  • 두 번째 신혼 89화

    햇살이 따사로운 주말 오후.

    모래 놀이를 실컷 하다가 파릇파릇한 잔디 위를 뒤뚱뒤뚱 뛰어다니던 아이가 장난감 삽을 내팽개치고 쪼르르 달려왔다.

    복숭앗빛 뺨을 빛낸 아이가 그 뒤를 어슬렁거리던 이한을 불렀다.

    “빠빠.”

    올해 세 살인 이 작은 녀석의 이름은 서윤우.

    한 달 뒤면 오빠가 되는 조그마한 녀석은 당차고 씩씩했다.

    “왜.”

    “음마.”

    한참을 놀다가 이제야 엄마의 부재가 생각났는지 세인을 찾고 있다.

    “없어. 윤우랑 아빠뿐이야.”

    “시져.”

    “그래도 잘 놀고 있어야지. 그래야 엄마가 힘내서 일하지.”

    “안냐.”

    “아빠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 세인이 언제 오지.”

    갑작스레 부산으로 출장을 떠난 세인 덕에 애끓는 건 이한도 마찬가지였다.

    기약 없는 출장이라 더 곤란했다.

    이한이 한숨을 쉰 후 어린 아들을 번쩍 안았다.

    긴 다리를 휙휙 움직여 바닥에서 뒹구는 캠핑 의자를 건너 건너 집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은 정원과 마찬가지로 엉망이었다.

    주말에는 가사 도우미와 아이를 돌봐주는 이모님이 쉬기 때문에, 모든 집안일은 부부의 차지였다.

    오늘처럼 세인이나 이한이 갑작스럽게 출근하면 남은 한 사람이 아이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육아를 하다 보면 집안일은 뒷전인 건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에너지 넘치는 남자아이를 키우려면 부모의 몰골은 물론이오, 집안 꼴도 엉망이 되기 십상이었다.

    “지지야. 지지.”

    윤우가 손을 내보였다. 고사리 같은 오동통한 손을 보이며 눈살을 찌푸리는 게 이한과 빼닮았다.

    “빠빠, 유누 지지야. 지지.”

    “그래, 지지다. 씻어야겠다.”

    이한이 아이를 안은 채 욕실로 향했다.

    잔디를 얼마나 쥐어뜯었는지 고사리손에 든 풀물이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이한은 결국 욕조에 물을 받고 장난감 오리를 너덧 개 띄웠다.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배까지 세팅한 뒤 구석에서 샴푸를 짜내는 말썽꾸러기를 들어 입수시켰다.

    “꺄악!”

    해맑게 웃으며 물을 튀기는 아이를 바라보며 이한이 옅게 웃었다.

    “너 매일 이렇게 엄마 힘들게 하지.”

    평일엔 이한의 퇴근이 늦는 날이 더 많았기에 목욕은 거의 세인의 차지였다.

    “안냐. 음마, 와요?”

    “어. 윤우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면 와.”

    물놀이를 조금 시킨 후엔 토실토실한 몸을 닦아냈다.

    한 손으로 들 만큼 가벼운 녀석인데도 한번 씻기고 입히려면 혼이 빠졌다.

    “어허.”

    “어허.”

    짐짓 엄하게 꾸중하는 이한을 따라 하며 윤우가 까르르 웃었다.

    방심한 사이 쪼르륵 도망가는 윤우를 잡아다가 기저귀를 채우고 내복 상의를 입히는 사이에 아이가 잠들었다.

    “윤우, 자?”

    새근새근. 토실토실 부푼 뺨이 엄마 젖을 찾듯 쪽쪽댔다.

    얼마 전에 안녕을 고한 쪽쪽이가 그리운 듯 입술을 자꾸만 오므리는 모양새가 어여뻤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이한이 작게 웃었다.

    아이 침대에 눕힌 그가 젖은 제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이렇게 한번 잠들면 내리 2시간은 잘 자는 아이다.

    언제든 잘 자 효자란 별명을 얻은 윤우는 신생아 때부터 잠투정 한번 없었다.

    그에 모두가 입 모아 복 받은 엄마 아빠라며 웃었다.

    하나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태어나자마자 세인의 껌딱지가 된 윤우 덕에 이한의 질투가 하늘까지 치솟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세인에게 옹졸한 모습을 내보일 순 없어, 겉으론 자애로운 아버지인 척 구느라 꽤 애썼다.

    물론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한 보물이었다.

    이한은 가볍게 샤워한 뒤 가운 차림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업무 전화를 제치곤 단축번호부터 눌렀다.

    -여보세요?

    “우리 대표님 너무 바쁜 것 같은데.”

    이한이 물으며 냉장고로 향했다.

    -음, 그래도 오늘은 10시면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내일은.”

    -내일 돼봐야 알아. 윤우는?

    “윤우는 낮잠 자고 난 우리 세인이 걱정.”

    세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임신 37주 차의 몸으로 먼 곳까지 출장 간 세인의 걱정에 출산 휴가를 앞당길까 싶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그녀를 애지중지하자니, 세인이 미안함을 느낄 것 같아 자중하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함부로 세인을 저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픈 데 없고 배 뭉친 적도 없어요. 허리는 조금 아픈데 잠깐 누웠다가 일어나면 될 거야.

    경산이니 임신 후기부턴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은 분명 세인도 함께 들었다.

    그러니 세인이 어련히 알아서 몸을 챙길 테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보고 싶어.”

    -응. 나도. 윤우도 보고 싶고요.

    꼭 윤우를 빠뜨리지 않는 점에 이한이 결국 웃음을 흘려 보냈다.

    “윤우가 엄마 찾을 텐데, 그러니까 빨리 와야겠네.”

    -당신이 제일 많이 찾을걸요.

    “알면, 노력해 봐.”

    어차피 둘째 공주님까지 태어나면 찬밥 신세가 되는 건 머지않은 일이었다.

    전화를 끊은 이한이 곤란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 지경인 건, 아직도 열렬하단 증거였다.

    ***

    세인은 어제 새벽, 급히 부산으로 내려와야 했다.

    이미 부산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다가 일주일 전에 서울로 떠났건만, 급한 일이 또 터지고 말았다.

    새로 오픈한 부산 지점은 세인이 쉬이 쉴 수 없게 했다.

    내려와 보니 눈에 차지 않는 것투성이라 예상보다 더 길게 머물러야 할 성싶었다.

    다만 임신한 몸으로 일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젯밤 이한과 통화를 오래 한 탓인지 목마저 깔깔했다.

    “진 비서님.”

    “네. 대표님.”

    세인은 이동하는 차에 올라탄 뒤 운전대를 잡은 수행 비서를 불렀다.

    진 비서는 세인보다 월등한 체력과 특유의 입담이 자랑이었고 업무 능력까지 출중했다.

    이한의 소개로 채용한 인력이라 믿을 만하기도 했다.

    “점심 식사 끝나고 산부인과에 들러야겠어요.”

    “어디 아프세요?”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세인의 몸 상태에 과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진 비서가 조심히 핸들을 감아 갓길에 차를 정차했다.

    그러곤 세인 쪽으로 아예 몸을 틀었다.

    “대표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심상찮으시면 지금이라도 바로 가시죠.”

    “그건 아닌데, 내일이 검진이잖아요. 미리 당겨 갈까 해요.”

    임신의 마지막 달엔 주 단위로 병원을 찾아야 했다.

    서울 병원의 예약일이 내일이었기에 오늘이나 내일이나 상관없겠단 생각이었다.

    부산에도 다니던 병원이 있으니 예약하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네, 그럼 혹시라도 어디 아프시고 그러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럴게요.”

    미심쩍은 시선으로 세인을 한 번 더 살핀 진 비서가 차를 출발시켰다.

    세인은 외부 일정을 마친 뒤 점심을 거른 채 병원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배 뭉침이 잦은 게 출산의 신호가 아닌지 걱정된 터였다.

    어제 아침, 걱정하는 모습으로 저를 배웅하던 이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히 욕심을 부렸나 싶었다. 하지만 이한이 사장 직함을 단 걸 생각하면 안주할 때가 아니었다.

    이한에게 힘이 되어주겠단 포부는 아직 건재했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열망은 원대해져 갔다.

    이한에게 자랑스러운 아내, 도움이 되는 아내가 되는 게 세인의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건강을 해쳐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세인의 안위가 가장 우선인 이한을 생각하면 무리하는 건 오히려 독이었다.

    대형 병원의 로비는 북적였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 예약해 둔 시간에 진료를 보기로 하고 벤치에 앉으려는데 진 비서가 말했다.

    “대표님, 점심 식사도 안 하셨잖아요. 30분에서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브런치 카페라도 가시죠.”

    진 비서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세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옮겼다.

    10분 거리에 있는 카페까지 걸어서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주차장 한쪽에서 어른거렸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휠체어를 탄 여자를 발견하곤 확신했다.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으나,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차에서 내린 여성은 혜인이 틀림없었다.

    지난 6년간 혜인과 은희의 소식을 이한을 통해 간간이 들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돌아온 혜인의 건강이 꽤 호전됐다고 들었다.

    스위스 병원으로 간 줄 알았던 혜인은 일본에서 지냈다고 했다. 그 연유까진 알 수 없었다.

    자세한 상황을 굳이 알 필욘 없어 더 파고들지 않았다.

    은희는 부산에서 개인 병원을 차리고 그냥저냥 지내고 있다고 했다.

    홍춘의 사업 구심점도 부산으로 옮겼다고 했으니 부부 사이도 여전한 거겠지.

    그들 사이에서 이방인 같았던 세인만 빠진 셈이었다.

    점점 멀어진 홍춘도,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는 은희의 행동도 모두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이런 만남은 상상치 못한 것이었다.

    혜인이 야윈 채 휠체어에 기댄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후련하고 찝찝한 심정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세인이 멈춰 있자, 두 사람도 이쪽을 알아보았다.

    잠시 당황한 기세로 굳었던 은희가 휠체어를 밀며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이해한 진 비서가 세인을 감싸듯 앞으로 섰다.

    “대표님.”

    “괜찮아요.”

    “하지만, 대표님.”

    “잠깐이면 돼요.”

    “너 임신했니?”

    우아한 음성으로 내뱉은 은희의 첫마디는 임신에 관한 것이었다.

    세인은 웃음이 나려는 걸 참고 태연하게 말했다.

    “첫 아이도 있어요.”

    “그건 들었다, 이번에도 아들이야?”

    세인에게 묻는 은희의 표정은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그간 잘 지냈냐는 흔한 안부조차 건네지 않는 모친에게선 일말의 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이면 어쩌게.

    “그건 왜요?”

    “회사 물려줄 손주가 둘이나 태어나면, 서 회장님 든든하지 않겠니.”

    “제가 임신하면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세인이 웃으며 되받아쳤다. 임신하곤 호르몬에 지배당하는 일이 많아 좀처럼 둥글게 넘어가지 못했다.

    이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고.

    “뭐?”

    “언니는 못 하는 걸 제가 했으니 화내실 줄 알았어요.”

    “나, 너 때문에 병원장도 내려놓았어.”

    은희가 옅은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못나게 뒤틀었다.

    서 회장의 압박이었든, 이한의 협박이었든.

    은희는 병원장 자리를 지켜주겠단 미연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어쨌건 은희는 제게 주어진 것 중 가장 큰 이득을 택했을 터다.

    “그게 저 때문이란 건가요?”

    “내가 한국에 없는 게 너한텐 복이라더구나.”

    “그럼 돌아오지 마셨어야죠.”

    세인이 말했다.

    두 사람이 귀국하지 않았다면 이런 불편한 만남은 없었을 터다.

    세인이 기세 좋게 몰아붙였음에도 언제나처럼 은희는 충격 없어 보이는 얼굴로 맞받아쳤다.

    “혜인이가 계속 한국 들어오고 싶어 했어. 외국물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야. 그리고 이만하면 된 거 아니니?”

    “뭐가 됐단 말이에요?”

    “나도 할 만큼 했단 소리야. 첫 아이는 언제 보여 줄 거니.”

    은희가 뻔뻔하게도 물어왔다.

    “제 아이를 왜 궁금해하는 거예요?”

    “손주 얼굴 궁금한 것도 죄야?”

    은희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제 피가 섞인 아이가 서 회장의 후계를 이으면 되면 뭐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겠지.

    “사진이라도 보여 줄 수 없겠니?”

    그를 애정인 척 애써 포장하는 게 역겨웠다.

    “몇 주야? 막달 같네?”

    은희가 손을 뻗어 배를 만지려는 걸 세인이 저도 모르게 거칠게 내쳤다.

    찰나 은희의 동공이 흔들렸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엄마, 그만 가요.”

    아래쪽에서 자그맣게 들려온 힘없는 목소리는 혜인의 것이었다.

    혜인의 구불구불한 긴 머리칼은 비쩍 마른 등을 감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혜인의 동공이 텅 빈 것처럼 흐렸다. 그녀는 이빨 빠진 사자처럼 쇠약해 보였다.

    “정세인, 너 그러는 거 아니야.”

    혜인이 부쩍 작고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너 때문에 숨어 살았어.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혜인이 목소리를 높이다가 잘 되지 않는지 헛기침을 했다. 듣기 싫은 쇳소리 같았다.

    “어떻게 우릴 한 번을 안 찾아와? 네가 그러고도 가족이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혜인과 시선이 맞물렸다.

    세인은 피하지 않고 그녀의 가난한 발악을 마주해 주었다.

    “가족?”

    “네 잘난 시댁 때문에 여태 죄인처럼 살았어. 우리더러 언제까지 숨어 살란 거야!”

    소리친 혜인이 힘에 부쳐 쌕쌕거렸다. 혜인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아, 아직도 혜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구나.

    세인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은희에게 물었다.

    “아직 말 안 하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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