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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8화 (88/95)
  • 두 번째 신혼 88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이한과 만난 지 두 달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그동안 달라진 건 이한을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단 것과 입 맞추는 순간이 늘었다는 것.

    웃는 날이 많아지고 그의 침대를 빌려 잠을 자는 날이 잦아진 것 등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눈치 빠른 혜인에게 덜미가 잡혀 버렸다.

    이틀 전, 평소처럼 혜인이 잠들자 병실에서 빠져나간 세인은 옥상을 찾았다.

    평소처럼 이한과 노닥거리다가 그의 병실로 향했다. 이한의 곁에 누워 그가 자길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게 화근이었다.

    일어나자 세인의 핸드폰으로 수십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실수로 무음이 되었는지 전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터였다.

    돌아간 병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혜인이 물건을 집어 던져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어디에 있다가 왔냐며 모진 추궁을 해왔고, 세인은 결국 사실대로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층의 환자를 만났다고, 사실은 그 사람과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부모님께 비밀로 해달란 부탁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혜인이 은희에게 입을 열었고 은희는 노발대발했다.

    네가 연애를 하면 혜인이는 어쩔 거냐며 역적 취급을 했다.

    은희는 기어코 세인의 입에서 서이한이란 이름 세 글자를 얻어낸 후에 돌아갔다.

    그리고 이틀째 소식이 없던 은희는 조금 전 연락을 해왔다.

    잠시 병원 주차장으로 내려오란 말에, 세인은 간병인 이모님께 혜인을 부탁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혜인의 감시가 심해져 벌써 이틀째 이한을 못 만났다. 핸드폰도 혜인이 가지고 있어서 연락할 길이 없었다.

    많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겠지.

    이한이 무언갈 재촉한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머물러 있으면 그가 훌쩍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집안의 사람인지 피부로 실감은 안 나지만, 얼추 그림은 그려졌다.

    이렇게 연애 놀음이나 하고 있을 사람은 아닐 터다.

    머지않아 끝이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후회 없이 사랑하고 싶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은희의 옆모습이 보였다. 발목 위로 올라선 시폰 소재의 바지가 진한 녹색이었다.

    항상 패션에 신경 쓰는 은희는 늘 세인의 차림을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혜인을 돌보려면 티셔츠에 반바지가 활동하기 편했다.

    “엄마.”

    “왜 이렇게 늦니.”

    은희가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기에 세인도 그를 따라 했다.

    “죄송해요.”

    “자, 이거 네 언니 주렴. 영양탕.”

    세인은 손을 뻗어 종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보통 이런 건 사람을 시켜 올려 보내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은희가 직접 찾아왔다.

    “네. 잘 챙길게요. 바쁘실 텐데 가보세요.”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은희는 떠나지 않고 세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 있으세요?”

    “서이한, 말이야.”

    세인이 걱정하고 있던 말이 곧장 은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대로 헤어지라고 하겠지. 그럴 터다.

    “어떤 집안인진 알고 만난 거니? 알고 접근한 거야?”

    “네?”

    “어쨌거나 잘 붙들어 둬.”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그 애랑 잘 만나보렴.”

    여태 남자 친구를 만드는 걸 반대했으면서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은희가 의아했다.

    “나머지는 엄마랑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하시다니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인의 인간관계에 부모가 끼어들어 잘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세인의 입장에선 그랬다.

    “그렇다고 혜인이한테 소홀하면 안 돼. 알지?”

    세인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은희가 할 말을 다 마쳤는지 돌아서 가버렸다.

    멀어지는 뒤꽁무니를 보다가 한숨을 쉬곤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정세인.”

    이한의 목소리가 주차장 저 멀리서 들려왔다. 세인이 몸을 틀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았다.

    슬랙스에 셔츠까지. 올 블랙으로 빼입은 이한은 외출복 차림이었다.

    며칠 전 깁스를 푼 이한의 한쪽 손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이한이 살짝 고개를 틀며 웃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웃어주는 건 그가 유일하단 깨달음에 세인이 흐린 미소를 보였다.

    “잠깐 일이 있어서……. 어디 다녀와요?”

    왜 그 순간 눈물이 흘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인은 갑자기 샘솟는 눈물에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그럴수록 더욱 빠르게 눈물이 고여 들었다.

    결국 가두지 못한 슬픔이 뺨을 타고 흘렀다.

    “아…….”

    세인이 손을 들어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종이 가방이 발치에 떨어져 내용물이 우르르 쏟아지는데도 주워 담을 여력이 없었다.

    우는 얼굴을 가장 보이기 싫은 사람에게 나약한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그에게 흠을 보이면 이별이 더 빠르게 찾아올까 봐…….

    바보처럼.

    “그만. 눈 짓무른다.”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이한이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일단, 타자.”

    이한이 세인의 손목을 잡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두 사람을 발견한 운전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왔다.

    “애인이 울어서. 잠깐 자리 좀 비켜줘요.”

    “네, 도련님.”

    인사를 마친 운전기사가 서둘러 차에서 멀어졌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세인의 등이 떠밀렸다. 세인이 엉거주춤 들어서자 이한이 밀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왜 울어.”

    순간 흘러나온 이한의 한숨이 지겨움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 가지 않아서 그가 질린다고 하지 않을까.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이에요. 흐윽…….”

    다시금 한숨을 쉰 그가 긴 손가락으로 세인의 젖은 뺨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거듭되는 다정한 손길에 세인은 마음 한 토막을 어렵사리 내뱉었다.

    “내가 잘못해서…… 그래서 힘든 거예요.”

    “네가 뭘 얼마나 잘못했겠어.”

    이한이 시큰하게 웃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상하게도 그는 화난 것 같았다.

    “정세인.”

    “흐윽…….”

    “정혜인이 다친 게 왜 네 탓이야? X같이 사고 낸 가해자 잘못이지.”

    눈물을 훔치던 세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언제까지 정혜인 뒤만 따라다니려고.”

    “…….”

    “간병은 전문가한테 맡기고 너는 네 인생 살아야지.”

    알고 있던 문제점을 콕 지적당한 세인의 눈가로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일이야?”

    내가 원하는 일? 그런 게 있던가.

    내가 뭘 원해도 되는 걸까?

    갈 곳을 잃은 세인의 눈에 이한이 조수석에 급히 던져 넣은 케이크 상자가 들어왔다.

    그제야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란 걸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거 제대로 새겨들어.”

    “…….”

    “절대 네 잘못 아니야. 멍청한 생각 하지 마.”

    가족도 신경 쓰지 않는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는 남자.

    세인의 곤경에 제 일보다 더 열을 내주는 남자.

    이한은 세인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행운이었다.

    평생 다시는 없을 행복한 순간이 지금이란 걸 세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순간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겠지.

    “……오빠도.”

    울먹이며 말을 하다 말고 세인이 몸을 일으켜 이한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한의 단단한 어깨가 조금은 굳어버렸다.

    “잘못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실은 이한을 위로하고 싶었다.

    감히 그래도 된다면 이한을 위로하고 싶었다.

    “오늘 가지 마.”

    조금 쉰 그의 목소리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 너무나 욕심이 났다.

    그런 자신이 미웠으나 그래도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그날 오후 세인은, 이한과 함께 외출했다.

    그의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백화점을 찾았고, 그곳에서 이한이 원피스와 구두를 사주었다.

    세인이 제게도 돈이 있다고 한사코 마다했으나 그런 건 연상이 사주는 거라며 이한이 편협한 연애관을 고집했다.

    결국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 후엔 이한과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에서 주인공처럼 식사하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날 밤, 세인은 이한의 병실 스툴 위로 끌려가 앉았다.

    아른대는 케이크 촛불이 실감 나질 않아 세인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만을 위한 케이크가, 어쩌면 처음이었다.

    딸기를 얹은 케이크 뒤로 이한의 색조 옅은 눈동자가 예쁘게 빛났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그가 동화 속 왕자님처럼 근사한 건, 그의 껍데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이한은 세인이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이였다.

    “세인아, 앞으론 생일 같이 지내자.”

    세인의 눈가로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이게 다 뭐예요. 오늘…….”

    그녀가 감격에 겨워 우는 줄도 모르고 흐느끼고 있자 이한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쳐주었다.

    “울보였네, 몰랐는데.”

    “오빠가 가,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러지.”

    이한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 웃는 듯 화난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딴 게 뭐라고 울어.”

    “……난 생일을 축하받을 자격이 없어요.”

    “혹시 생일 때마다 이따위로 우울해했어?”

    “나에 대해 조사했다면서요…… 그럼 알 거 아니에요.”

    “네가 태어난 날은 나한테도 귀중해.”

    “…….”

    “그러니까 정세인, 앞으론 꼬박꼬박 축하받아.”

    이한이 대신 초를 불어 꺼뜨렸다. 케이크를 옆에 둔 이한이 조금 더 다가와 세인의 손을 잡았다.

    여윈 손목에 입술을 붙인 그가 눈동자를 위로 들어 세인을 바라보았다.

    “대답.”

    “……몰라요.”

    결국 세인은 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그동안의 눈물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세인은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이한이 스툴을 짚고 일어서 세인을 달랬다.

    이한은 한숨을 쉬다가도 옅게 웃으며 세인의 뺨을 닦아주었고 연신 입을 맞춰주었다.

    제 품에 세인을 꼭 끌어안고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아픔을 편히 토해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미친놈 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너 때문에 피 말라 죽겠다.”

    “흐윽…….”

    잦아들던 세인의 울음이 다시 시작된 건 이 말 때문이었다.

    “사랑해.”

    세인의 어깨가 서럽게 들썩였다.

    “죽는 날까지 좋아할게.”

    세인은 그에게 와락 안겼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하지 못한 말이 목 안쪽에서 아프게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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