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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7화 (87/95)
  • 두 번째 신혼 87화

    한 걸음 다가온 이한이 세인의 손목을 쥐어 옆으로 치웠다.

    “혹시 전에도 맞았나. 그래서 거기서 죽을 둥 살 둥, 우울해하고 있었고?”

    “사, 상관없잖아요.”

    이한이 손을 뻗어 캔을 가져갔다. 세인은 그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음료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빈 깡통이 빠르게 궤적을 그리며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벌써 차를 두 번이나 같이 마신 사이인데, 상관 좀 해도 되지.”

    “억지 부리지 마세요.”

    “들어가. 너 기다리느라 잠 설쳤어.”

    세인의 손목을 잡은 그가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카디건이 세인의 기분처럼 너울거렸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이한의 병실은 혜인이 머무는 공간과 구조가 달랐다.

    조금 더 넓고 쾌적했으며 컴컴했다.

    은은한 수면 등을 켜서 잠든 와중에도 혜인을 살필 수 있는 저쪽의 병실과 달리,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지배적이었다.

    냉방을 최대치로 키워놨는지 들어가자마자 세인의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세인이 팔을 감싸 쥐며 어깨를 웅크렸다.

    어둠을 유유히 헤친 이한이 소파에 앉으며 건너편을 눈짓했다.

    “앉아.”

    비상구 표시등과 에어컨 전원 불, 그리고 병실 입구에 달린 조명에 의지해 세인이 주춤거리며 발을 옮겼다.

    “아. 너무 어두워?”

    “불은 안 켜요?”

    “잘 시간인데 굳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한 이한이 피식 웃었다.

    허물 없는 미소에 긴장으로 경직되었던 세인의 어깨가 조금은 느슨해졌다.

    뭘 일일이 긴장하고 있었을까.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인데.

    이한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자 그가 물었다.

    “그래서, 왜 다쳤는데.”

    “네?”

    “가족인 것 같은데, 신고해 줘?”

    어둠에 익숙해지자 차차 그의 얼굴이 선명해져 갔다.

    조각한 것처럼 이목구비의 음영이 아름다웠다.

    “아니면 조용히 해결해 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세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의중을 헤아리려 애썼다.

    “계속 맞고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나.”

    바보 같긴. 뒤늦게 이한의 말뜻을 알아챈 세인이 무릎에 얹어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아니에요. 누구한테 맞은 거 아니에요. 피곤하면 입술 잘 터져요.”

    “모자라게 굴지 말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진짜 아니라고요.”

    세인이 강경하게 말한 뒤, 이어 물었다.

    “저한테…… 왜 이래요?”

    “뭘.”

    “그렇잖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해결해 주겠다는 둥……. 물론 오해지만요.”

    고작 입술이 조금 터진 것뿐이었다.

    이한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 만큼 가슴 아픈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한에게 들켰다고 생각하자, 스스로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인은 그래서 더 목소리를 높였다.

    “오지랖이 조금 넓으신 것 같아요.”

    “네 사연 들었어. 듣고 나니까 모르는 척이 안 되고.”

    세인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흔들렸다.

    “뭘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전부 들은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요?”

    “너에 대해 조사했거든.”

    뻔뻔하게 대답한 이한은 잘못한 것 하나 없는 사람처럼 헤드에 등을 느긋하게 기대고 있었다.

    입술을 뻐끔대던 세인은 흩어진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갑게 식은 손마디가 욱신거렸다.

    “저에 대해 조사했다는 게…….”

    “정세인이 궁금하더라고. 대체 뭘까 싶어서.”

    두 사람의 눈동자가 얽히듯 마주쳤다.

    세인은 꼼짝없이 덫에 걸린 것처럼 그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동정하는 건가요?”

    “동정?”

    “내가 언니를 그렇게 만들어서…… 동정하냐고요.”

    스스로 내뱉고도 아픈 말이었다. 세인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꾹 참아냈다.

    “굳이 따지자면 공감이겠지.”

    이한이 툭 내뱉은 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리송한 세인을 향해 그가 말했다.

    “나도 형을 죽였거든.”

    순간 누군가 병실에 적막을 통째로 끼얹은 것 같았다.

    “내가, 죽였어.”

    세인은 살인범의 고백을 들은 유일한 증인이 된 것처럼 바짝 긴장했다.

    “내가 운전대를 잡았는데, 옆 좌석에 탔던 형만 죽었지. 등신같이 살아남아선.”

    이한이 스스로를 조롱하며 미끈하게 웃었다.

    세인은 아니라고, 살아남은 건 잘한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 풀이 붙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이한이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아서.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걸 알아서.

    “분위기 칙칙하네. 저거라도 볼까.”

    세인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받은 남자의 눈을 더는 마주 보기 힘들었던 터다.

    이한이 세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손에 들린 리모콘이 삑삑 몇 번인가 힘없이 눌렸다.

    심야 영화가 의미 없이 재생되었다.

    그러나 맞닿은 팔에 온 신경이 쏠려서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빗발치는 총성이 세인의 심장 소리를 감춰주고 있었다.

    “잠이 안 오는데, 넌.”

    위쪽에서 이한의 목소리에 세인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럭저럭 자요.”

    “나도 재워줄 수 있나.”

    “…….”

    “이상하지. 네가 머리에서 안 떠나.”

    이한이 웃으며 이해되질 않는 소리를 하는 순간 세인은 선명히 깨달았다.

    자신이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될 거란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은데, 안아보면 더 확실할 것 같고.”

    “무슨 소리를…….”

    “그러게, 미친놈이 된 것 같아.”

    이한이 외줄에 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재워줘.”

    분명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으나 피곤함에 젖은 남자의 눈엔 휴식이 절실해 보였다.

    형이 죽었단 건 거짓말이 아닐 터다.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걸 보아 얼마 되지 않은 일이겠지.

    세인은 거울을 비춰 보는 듯해서 그가 안타까웠다. 이한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침대로 가요. 가서 누워요.”

    “벌써 그 단계야, 우리?”

    “……미쳤어요?”

    “그런 표정도 하네.”

    “침대로 가요, 말아요.”

    세인은 애써 센 척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제 손목에 닿은 이한의 손가락을 느끼곤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한도 다리를 펴고 일어나자, 머리 하나만큼 그의 눈높이가 올라갔다.

    “가.”

    이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한에게 끌려 누운 병실 침대는 이상하리만치 좁았다.

    세인은 등 뒤의 벽과 이한의 가슴에 갇혀 박제 당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팔을 괴고 머리를 받친 이한이 그런 세인을 조금 즐겁게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억지로 가둔 줄 알겠어.”

    “그러고 잘 거예요?”

    “잔소리가 심한 편이야?”

    “원래 그렇게 실실대는 편이세요?”

    맞받아친 질문에 이한이 소리 내어 웃더니 결국 팔을 접고 누웠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너 내 이름 알잖아.”

    “그래서요.”

    “이름으로 불러. 그쪽은 무슨.”

    세인이 심호흡했다. 그러곤 팔을 뻗어 그의 다친 팔이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도닥이기 시작했다.

    “눈이나 감아요.”

    이한이 말없이 눈을 감았다.

    토닥토닥. 낯선 체온을 어루만지던 세인은 어느덧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

    세인은 그 뒤로도 종종 이한을 만났다.

    처음엔 긴장했던 관계가 점차 즐겁게 변해갔다.

    낮에는 낮잠 시간을 이용해 자판기 앞에서, 밤에는 옥상에서 이한을 만났다.

    그러다 낮에 혜인과 간병인 이모를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그 순간 크게 동요한 세인과 다르게 이한은 평이하기만 했다.

    혜인과 인사를 시켜줘야 하나 고민한 게 무색하게 이한은 곧장 뒤돌아서 제 병실로 가버렸다.

    하루는 혜인이 잠이 늦게 든 날이었다. 세인은 옥상으로 향하며 이한을 만나진 못할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층계 밟았다.

    통통. 옥상의 철 계단을 지나쳐 처마를 돌았을 때였다.

    이한이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끈적한 여름 바람이 부드러운 이한의 머릿결을 타고 흔들렸다.

    그는 늦었다는 말도, 어젠 왜 못 왔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세인을 바라보며 갈증을 채우려 들었다.

    노골적인 이한의 열망은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세인의 마음을 채찍질했다.

    만날 때마다 한 뼘씩 불어나 있는 이한의 열기에 휩쓸려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양아치 같아요.”

    솔직히 그는 날티가 났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무거워서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였다.

    공연한 트집에 이한이 가볍게 웃으며 담배 연기를 흩뜨렸다.

    “그러다가 뒤로 떨어지겠어요. 이쪽으로 와요.”

    솔직히 난간 뒤로 고개를 젖힌 그가 위태로워 보였다.

    이한이 반도 넘게 남은 담배를 대충 지져 끄곤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이한의 날렵한 눈매와 오뚝한 코가 가까워질수록 세인의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이한이 곁에 섰을 때 세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았다.

    그냥, 그런 순간이라고 여겨졌다.

    옅은 담배 향과 이한의 향수 냄새, 여름의 끈적한 공기가 첫사랑의 설렘과 함께 뒤죽박죽 섞여들었다.

    분명 키스할 거로 생각했는데, 놀림을 당한 걸까. 혼자 앞서간 걸까.

    좀처럼 이한의 입술이 닿질 않아 세인이 민망해하며 눈을 떴을 때였다.

    이한이 그녀의 뺨 한쪽을 감쌌다.

    “키스, 처음이야?”

    유치원 시절, 짝꿍이 충동적으로 입술을 훔쳐 간 일을 키스라고 봐야 할까.

    세인이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자, 이한의 눈썹이 좁아졌다.

    “그전에 한 건 연습이라고 생각해.”

    세인이 대꾸하기 전에, 이한이 턱을 틀고서 깊숙이 내려앉았다.

    촉촉하고 말랑한 감촉은 이내 반경을 넓혀갔다.

    조금씩, 조금씩. 세인의 입술을 여러 각도에서 맛보던 그가 어느 순간 녹진하게 달라붙었다.

    그러자 세인은 기다렸던 것처럼 이한의 목에 팔을 감았다.

    물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잠시 뒤 세인이 앓는 숨을 내쉬며 뒤꿈치를 내려놓자 이한이 촉, 가볍게 입술을 맞추곤 멀어졌다.

    그러다 두 팔로 세인을 끌어당겨 바짝 몸을 밀착했다.

    아직 첫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세인은 그의 온기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쿵쿵 뛰는 심장 때문에 쉽사리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거, 너 때문인데.”

    이거?

    무슨 말인지 해석하지 못하고 세인이 그를 올려다보자, 이한이 그건 됐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정세인 키우려면 한참이네.”

    “키스 못 해서 그래요? 누구나 처음은…….”

    “사귈까.”

    사귀어?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 없는 세인의 머리에 오류가 났다.

    “함께 차 마셨고, 잠도 잤고. 키스도 했는데 안 사귀는 것도 이상하잖아.”

    “어…….”

    “아니면 내 몸만 필요해?”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의 가슴에 파묻혀 있던 세인이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좋아요.

    부드럽고 애틋한 입맞춤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세인이 이한의 어깨를 밀어낼 때까지, 호흡이 모자라서 눈물을 글썽일 때까지 그가 입술을 물고 빨았다.

    “네가 귀엽고 예뻐.”

    이한의 달콤한 언어가 꿀처럼 흘러들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것 같던 세인의 일상에서 처음으로 꽃이 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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