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86화
외전
스물두 살의 초여름.
그날은 혜인이 밥을 반이나 남긴 날이었다. 연일 파리해져 가는 혜인은 가족들의 걱정을 샀다.
세인이 부단히 달래보았으나 혜인은 식사를 거부했고 퇴원을 앞당겨 달란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의사의 권유에 따라 장기 입원을 한 실정이라 그녀의 청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혜인 때문에 세인은 창문을 열어 더위를 식혔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를 선풍기 몇 대에 의지해 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혜인을 보살피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세인에게 유난히 올해 여름은 가혹했다.
혜인이 늦은 낮잠에 들었다. 세인에겐 잠시간의 휴식이었다.
세인은 시원한 자판기 음료 생각에 병실 밖으로 나섰다.
VIP 병동답게 환자보단 의료진이 더 많이 드나드는 복도를 지나 창가에 놓인 자판기 앞에 섰다.
저쪽 90도 꺾인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그일 것이다.
서이한, 제문 그룹의 재벌 3세.
그를 두고 간호사들이 수군거리는 걸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본래는 최상층의 가장 좋은 병실을 사용했는데 며칠 전에 이리로 내려왔다고.
잘생기고 젊은 남자의 이야기가 지루한 일상에 활력소인 듯했으나, 세인에겐 별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세인은 자판기에서 시원한 이온 음료를 뽑아서 조금씩 나누어 마셨다.
배가 불렀으나 남기지 않고 전부 비워냈다.
이걸 다 마시고 나면 또다시 녹록지 않은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혜인의 손과 발이 되어서 온종일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삶.
그게 너무 당연해서 힘들다고 투정 부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음료수 한 캔이 보상인 소박한 휴식이 끝나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장난감만 한 차들을 구경한 세인이 빈 캔을 휴지통에 넣기 위해 뒤돌아섰을 때였다.
장신의 남자, 이한이 링거대와 함께 서 있었다. 바지만 환자복에 상의는 하얀 티셔츠.
그리고 대충 걸친 그레이 카디건.
더위에 못 이겨 짧은 반소매와 반바지 차림인 세인에 비하면 그는 냉방병 예방이라도 하는 듯 든든한 차림이었다.
아.
그제야 세인은 남자의 한쪽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내려온 붕대와 반대편 팔의 깁스를 발견했다.
그래서 옷을 걸치듯 입었구나.
“너.”
“네? 저요?”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는 그의 생김새만큼이나 근사했다.
“어. 이것 좀 뽑아줘.”
대뜸 반말하며 남자가 자판기 속 음료를 눈짓했다.
“콜라요?”
“아니 그 옆에.”
“아, 초코.”
세인은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지폐를 받아들고 초콜릿이 섞인 캔 음료를 뽑았다.
허리를 숙여 자판기 커버를 올리고 캔을 꺼낸 세인이 고민하다 물었다.
“따 드릴까요?”
아무래도 이한이 양팔을 자유롭게 움직이긴 어려워 보였다.
손가락이나 간신히 움직일 수 있으려나.
세인은 괜한 오지랖을 부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먹여 줘.”
“네?”
“입술에 대고 먹여 달라고.”
왜 못 알아듣냐는 투로 대꾸한 이한이 피식 웃었다. 언뜻 비친 볼우물에 심장이 이상하게 동요했다.
꿀렁거리는 나룻배에 올라탄 것처럼 멀미가 이는 기분이었다.
잠시 멍해졌던 세인은 정신을 차렸다. 캔을 따서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자요.”
세인은 조금 무례한 남자를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캔을 조금씩 기울여 그의 입술에 대주었다.
흘리지 않게 조금씩.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남자의 입술에 음료를 알맞게 흘려 넣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
결국 손가락이 삐끗했다. 말끔한 그의 턱을 따라 초콜릿색 음료가 뚝뚝 떨어졌고, 당황한 세인은 저도 모르게 그곳을 손으로 훔쳤다.
혜인을 돌보며 생긴 버릇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낯선 남자의 입술 주변을 손으로 몇 번이나 더 문질렀다.
그러다 뒤늦게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을 발견했다.
“친절이 과하네.”
“아, 죄송…… 죄송해요. 너무 많이 흘려서.”
세인이 끈적한 손을 말아 쥐며 한 걸음 물러났다.
물기 젖은 입술과 사나운 눈매, 살짝 웃는 것 같은 표정.
너무나 이상했다.
쿵쿵.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세인은 그 길로 뒷걸음쳐 혜인의 병실로 돌아갔다.
욕실로 뛰쳐 들어간 뒤에야 초콜릿 음료를 가지고 와 버렸단 걸 깨달았다.
***
장맛비가 경고음처럼 병실 창을 두드려댔다.
비가 오는 날이면 혜인은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세인은 녹초가 될 때까지 혜인의 신경질을 받아주며 하루를 견뎠다.
사위가 깜깜해진 밤.
후텁지근하고 습도 높은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세인은 옥상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들르게 된 병원 옥상은 세인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을 땐 자판기를, 오늘처럼 늦은 밤에는 옥상을 찾아 지친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제처럼 옥상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자리 잡은 세인은 난간 쪽에서 사람의 움직임을 발견하곤 굳어버렸다.
정확하게는 담배 연기를 먼저 보았다.
빗속에서 흩어지는 메케한 연기가 남자의 우산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다른 사람도 이곳에서 휴식을 누릴 수 있단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세인은 혼자만의 세상을 뺏긴 것처럼 조금 서글퍼졌다. 그래서 비가 튀지 않는 자리를 찾아 조용히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쪽에서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세인의 존재를 알아채진 못할 터였다.
그렇게 담배를 다 태운 남자가 돌아가길 기다리며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실은 너무 힘든 날이었다.
은희에게 뺨을 두 대나 맞았다.
자꾸만 걸려오는 학과 선배의 전화를 받은 게 실수였다.
혜인 앞에선 학교 이야기는 일절 금물이었다.
혜인은 밟지 못한 대학 캠퍼스를 세인만 누리고 있단 건 크나큰 죄악이었으니까.
방학인 데다 세인은 자발적 외톨이인 터라, 학교 사람들의 전화가 올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꽤 끈질겼다.
동아리 가입을 권유하던 선배는 급기야 스터디를 함께하자며 세인을 물고 늘어졌다.
몇 번의 거절론 성이 차지 않는지 집요했다.
제대로 거절하기 위해 잠든 혜인을 등진 채 전화를 받았고, 반강제적으로 학교 소식과 동기들의 사정을 경청했다.
어쨌든 선배인지라, 세인이 거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세인이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있을 무렵, 잠에서 깬 혜인이 소리 없이 울기 시작해 통화는 급하게 종료되었다.
통화 내용은 전부 들은 걸까. 혜인은 목 놓아 울었다.
보는 사람이 걱정할 만큼 서럽게도 울었다.
오랜만에 병원에 들른 은희가 그 광경을 보았고,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 가차 없이 세인에게 손찌검했다.
죄 많은 인생.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인생.
이런 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눈치 없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우울한 생각은 끝도 없이 세인을 나락으로 끌고 내려갔다.
슬슬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려던 차였다.
우산을 든 남자가 세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한이었다. 담배의 주인이 이한이란 걸 안 세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토독토독. 빗방울이 검정 우산에 튕겨 흩어졌다.
이한의 가라앉은 시선이 절뚝거리며 일어나는 세인의 오뚝한 코와 입술을 타고 내려갔다.
“서이한, 내 이름.”
“아…… 저는 정세인이에요.”
“스물넷, 넌.”
“스물두 살이요. 우산 안 씌워주셔도 되는데…….”
“그러게. 왜 신경 쓰일까.”
이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다가 제대로 다리를 펴지 못하고 있는 세인의 손을 잡았다.
아픈 손을 이렇게 막 사용해도 되나 싶은 세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떼어냈다.
너무 세게 내친 것 같아서 미안하게 그를 바라보았으나 이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기서 웬 궁상이야. 비 오는 날 미친 여자처럼 보이고 싶어?”
“그냥 비 오는 거 보려고…….”
“고개 처박고 우는 줄 알았지.”
“아니거든요.”
웬 시비야. 세인이 눈을 뾰족하게 치뜨며 이한의 까칠한 언사에 반항했다.
그 순간 이한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전처럼 또 심장이 멀미하듯 울렁대기 시작했다.
이거 뭐지, 이건 뭐야.
해답을 모르는 건 이한도 마찬가지인 듯 그가 깁스한 팔로 제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이거, 뭐지.”
그러곤 세인과 같은 고민을 내놓았다.
혹시 너도 같은 거냐고, 이한이 아리송한, 그리고 짙은 시선으로 물어왔다.
“혹시 너도 그래?”
“……뭐가요?”
“여기가 기분 나쁘게 뛰냐고.”
***
빗물처럼 스며든 이한은 자나 깨나 세인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멍하니 병실 창밖을 바라보며 세인은 그날 이한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궁상떨 시간 있으면 놀러 와.’
‘어디를요?’
‘내 병실.’
불편한 초대장을 남긴 이한은 그날 뒤로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정말 가도 되는지, 아니면 그냥 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비가 개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하얀색 뭉치가 오늘은 사슴 모양이었다.
그러나 혜인에게 보여 줄 여력은 없었다.
이한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으므로.
오후에 잡힌 재활 치료 도중, 혜인이 고통을 호소하며 소란이 일었다.
엉엉 울며 병실로 돌아온 혜인은 주변 물건을 던져댔고, 세인의 입술로 물컵이 날아들었다.
세인은 입술이 터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혜인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혜인을 어르는 동안 간병인 이모님이 주변을 정리했고, 소식을 들은 은희가 뒤늦게 찾아와 긴 잔소리를 쏟아냈다.
전쟁통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새벽 1시.
고요한 병원의 밤은 세인을 더욱 외롭게 했다.
왜 놀러 오라던 이한의 목소리가 생각나는지.
그도 보호자와 함께 자고 있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세인의 발걸음은 자판기로 향했다.
덜컹.
고민하다 뽑은 초콜릿이 든 음료. 입을 대자마자 흘러드는 달짝지근한 맛에 세인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전에 내 음료수 훔쳐서 도망가더니.”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 이한이 서 있었다.
벽에 어깨를 비스듬히 기대고 선 이한은 웃는 얼굴이었다가 다시금 무표정이 되었다.
“입술은 왜 그래.”
“아…….”
세인이 통증이 이는 입가를 서둘러 가렸다. 바보. 이 꼴이 된 줄도 몰랐다.
“누가 때려?”
날카로운 질문에 세인이 경직된 채 캔을 꽉 쥐었다.
“진짠가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