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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5화 (완결) (85/95)
  • 두 번째 신혼 85화

    잠시 심호흡한 세인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회장님,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 얘긴 나중에 따로 하지. 준비해 놔, 서 이사.”

    할 말을 잃은 채준이 벙긋대자 차단하듯 덕수가 손을 휘저었다.

    “이제 유언장 얘기로 넘어가자. 지 변호사, 서류 가져와.”

    세인의 이야기로 다소 혼란스러웠던 장내가 유언장의 내용이 밝혀짐에 따라 차츰 정돈되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한의 몫을 불렀을 땐 모두가 안타까움,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세인의 이름으로 강남의 노른자 땅에 자리한 빌딩 몇 채를 이야기했을 땐 탄식이 흘렀다.

    자리가 파하고 난 뒤.

    이한이 팔을 뻗어 세인을 안아주었다.

    아직 홀을 빠져나가지 않은 이들이 많았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그녀의 등을 도닥였다.

    “정세인 이제 아무도 못 건드리겠어, 서 회장님 관심 독차지해서.”

    “그게 그렇게 돼요?”

    “아, 질투 난다.”

    그게 뭐야. 하다가 세인이 웃었다.

    긴장했던 것과 다르게 무사히 지나가서, 그리고 이제야 이한이 사는 세계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게 실감 나서 기뻤다.

    ***

    정신이 들고 보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희미한 소독약 냄새를 느끼며 혜인이 몸을 움직이려 했다.

    아니, 움직이려 했으나 두 팔이 꼼짝도 하질 않았다. 뻑뻑한 눈을 돌리자 양쪽 팔이 베드에 각각 묶여있는 제 모습이 환상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거기 누구 없어요? 말하려 해도 입에 무언가 물려 있어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읍! 으읍!”

    혜인은 진땀이 나도록 양팔을 흔들고 소리를 내어봤으나, 작은 병실엔 적막만이 가득했다.

    병실. 그래, 이곳은 병실이었다.

    호흡을 거칠게 내뿜으며 혜인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하얗고 작은 직사각형의 방. 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얼굴만 한 작은 창문이 짙은 밤을 품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진땀을 흘리며 혜인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분명 스위스 재활원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 중이었는데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구속된 건 또 뭘까?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순간, 극심한 두통이 뒷골부터 짜르르 번졌다.

    아, 그래. 제일 오빠!

    제일에게 버림받은 일과, 그의 부인에게 냉대당한 일.

    경찰 조사를 받은 일과 홍춘에게 혼이 난 일들, 잇따른 불행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직전에 받았던 수많은 문자와 전화들.

    혜인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그녀의 핸드폰으로 온갖 욕설이 날아들었다.

    대부분 제일과의 불륜에 대한 추궁과 질타였다.

    다들 하는 건데, 왜 나만!

    자신에게만 이렇게 야박한 잣대를 들이대자 억하심정이 생겼다.

    억울한 마음도 잠시, 혜인은 충격적인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 혜인의 작품을 모아두고 화형식을 벌이는 동영상이었다.

    더러운 창작물이라며, 불륜으로 영감을 끌어 올려 만든 작품은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불결하다며, 혜인의 그림을 모조리 태운 것이다.

    작품의 구매자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부유한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그런 식의 폭력성을 내보인다는 게 혜인은 이해되질 않았다.

    불륜이라면 그들도 다 쉬쉬하며 저지르고 있는 거 아니었나?

    첩과 사생아, 접대 등 그건 멀리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하나 누군가 선동하기라도 한 듯이, 아니, 누군가 그림을 전부 긁어모으기라도 한 듯이 최근에 그린 그림이 한데 쌓여 불길에 휩싸였다.

    피 같은 작품이 잿더미가 되는 광경을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직도 부러진 손가락은 아물지 않았고, 언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화가로서 재기할 수 없을지 모른단 소리를 들은 터라 더욱이 충격은 컸다.

    특유의 화풍은 순식간에 바꿀 수 없기에, 이런 식이라면 손가락이 나은 뒤에는 작품의 개성마저 버려야 했다.

    혜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공격적으로 굴었다. 늘 막무가내로 굴어도 누군가는 혜인을 떠받들어 주고, 달래 주었으니까.

    그런데 눈을 뜨자 이런 곳이었다.

    건강이 나빠졌나? 그래서 새 병원으로 옮긴 걸까?

    그런데 왜 상의도 없이? 이 팔은 또 뭐야!

    뚜벅, 뚜벅, 뚜벅.

    그때 바깥에서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생각인 거야! 언제까지 여기 둘 생각인 거야? 보는 눈은 어떻게 속이려고!”

    “그거야, 당신이 해줘야지요.”

    아빠? 엄마? 홍춘과 은희의 목소리에 혜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 여기 있어요! 나 눈 떴다고요! 엄마, 아빠!

    “읍! 으읍!”

    “그렇다고 애를 정신병원에 가둬? 혜인이 저러다가 다리 상태 더 악화되면!”

    “그럼 쟤를 밖에 둬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봐요! 혜인이 쟤가 내 자리까지 흔들잖아요!”

    보기 드물게 은희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흔들다니……?

    몸부림치던 혜인은 쿵쾅대는 심장을 느끼며 두 사람의 말에 집중했다.

    “스위스로 보내는 거 아니었어? 얼른 보내 버리면 될 거 아니야!”

    “정신병자 된 딸을 내보내면? 거기서 잘도 지내겠어요. 거기까지 가서 제 성질대로 안 된다고 난동 피우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일단 진정 좀 해. 하…….”

    “여기 병원 원장 잘 아는 사람이야. 당분간 혜인이 여기 있는 거로 해요.”

    “설마 당신 딸 아니라고 이래? 어?”

    “뭐라고요?”

    “내가 이래서 입양하지 말자고 했잖아. 혜인이 입양하는 바람에 세인이가 얼마나 손해를 봤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입양?

    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혜인의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혜인이 챙기다가, 우리 딸 세인이만! 우리만! 닭 쫓던 개가 됐어! 제문이랑도 다 틀어졌어! 이걸 어떻게 해결할 거야, 어? 투자받은 것만 얼마인데!”

    쿵. 번개가 가슴을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혜인은 몸을 달달 떨며 아닐 거라고, 자신이 들은 말을 애써 부정했다.

    “혜인이 내 딸이에요. 입양했다고 해도 내 딸이야. 그러니까 이번만! 내 뜻대로 해요.”

    “하, 그럼 당신 마음대로 해. 대신, 내 도움받을 생각하지 마.”

    아닐 거다. 자신이 입양아란 말은 거짓일 거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감정이 격앙되어 병실에 들르지 않고 그냥 가버린 듯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아버렸단 걸 들키지 않았으니까.

    “으으…….”

    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밤은 깊어갔고,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에 갇혀 혜인은 지독하게 울고 부르짖었다.

    제발, 여기서 꺼내달라 애원했으나 그녀 곁에 남은 건 아무도 없었다.

    ***

    이한은 소파에 길게 누워 달콤한 낮잠을 취하는 중이었다.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과거가 거짓말처럼 수면 시간이 정상 궤도에 올라섰다.

    옅은 꿈속에서 형 재한의 얼굴이 스쳤다.

    이한은 손을 뻗어 형을 잡으려 했으나 웃는 얼굴로 재한이 멀어졌다.

    그러나 전처럼 땀이 흠뻑 젖어 잠에서 깨진 않았다.

    “이한 씨, 이만 일어나요. 병원 가기로 했잖아요.”

    피아노 선율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눈을 뜬 이한은 기분 좋은 햇살을 시야에 담았다.

    “네. 더블에이치 대표, 정세인입니다.”

    세인이 핸드폰을 귀에 붙이며 막 잠에서 깬 이한과 눈을 마주쳤다.

    호텔 경영권을 내어주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던 사람처럼 일에 몰두했다.

    이한보다 더 바쁘게 뛰었고, 열심히 살았다.

    그녀는 깐깐한 심사를 통해 회원을 선별했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선착순 회원 모집이라는 기발한 방식을 추진했다.

    그 결과, 제문 그룹 계열사란 소속을 달고 3호점 오픈을 앞두었다.

    3년 만에 꽤 많은 성장을 일궈낸 세인은, 제문 그룹의 여성 모임에서도 그다지 기죽지 않는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미연의 말에 의하면 세인에게 회원권을 받으려 그녀에게 아첨하는 부류가 많다 들었다.

    “아뇨. 그 건은 실장님께 일임했는데. 전달이 안 됐나요?”

    점점 심각해지는 통화를 듣다못해 이한이 팔을 당겨 세인을 품에 안았다.

    무너지듯 그의 가슴에 기댄 세인이 적당히 통화를 마무리하곤 핸드폰을 옆으로 치웠다.

    “전화할 땐 좀.”

    “전화 받을 때, 바지 버클 연 사람이 누구더라.”

    “병원 가기로 했잖아요. 그만.”

    “병원보단 이게 더 효과 만점이지.”

    두 사람은 올해 아이를 가질 계획이었다. 오늘은 그를 위한 산전 검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예약, 예약했단 말이에요.”

    “세인아, 나 건강해.”

    이한이 웃으며 자세를 뒤바꿨다. 세인을 눕혀두곤 그 위에서 천천히 넥타이를 풀었다.

    그녀를 향해 뛰는 심장은 여전히 미친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뭐 해. 풀어.”

    이한이 아래를 눈짓하자 세인이 머뭇대다가 결국 그에게 맞춰준다.

    그가 허리를 숙여 사랑스러운 뺨과 목에 키스했다.

    거실의 통창을 반쯤 가린 블라인드의 좁은 틈새로 침투한 햇살이 대리석 바닥을 조명했다.

    벽 한쪽에 자리한 창으론 그림 같은 정원 전경이 비쳤다.

    수년 전, 이한은 이방인처럼 거실을 보며 시원한 아침 공기를 그녀와 함께 나눠 마실 순간이 오긴 할까, 고민했었다.

    바르작거리는 세인의 손에 깍지를 깊게 끼며 이한은 다시 염원했다.

    이런 순간이 부디 오래오래, 우리가 눈감는 날까지 계속되길.

    이 사랑이 너에게 행복이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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