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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4화 (84/95)
  • 두 번째 신혼 84화

    이곳으로 집중된 이목을 두고 이한이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봐야 좋지 못한 말만 듣게 될 터다.

    채준처럼 눈초리가 곱진 않은 작자들이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곳이다.

    “놔, 놔줘. 나도 사회적 체면이 있는데…….”

    이한이 느른하게 한숨 쉰 뒤, 손을 떼어냈다.

    세인의 턱에서 못 보던 손자국을 발견했을 때, 채준의 목을 조르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채준이 꽁무니를 뺀 사이, 세인이 차에서 내렸다.

    평소라면 먼저 문을 열어줄 그가 잠잠하자 직접 밖으로 나온 것이다.

    “무슨 일 있어요?”

    세인의 말간 뺨을 보자 이한의 수심이 땅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차가 많네요.”

    “서 회장이 오늘 유언장을 발표하겠대. 갑자기 일정을 당긴 걸 봐선,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이한 씨에게 남기실 말이 많으신 게 아닐까요?”

    세인이 눈치와 따뜻함을 겸비해 물었다. 이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게 그녀로서도 약간 걱정이었다.

    “혹시 나 때문에 들어가기 싫은 거예요?”

    세인이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러곤 이한을 바로 올려다보았다.

    “가지 않아도 되는 자리야.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상관없고.”

    “왜 내가 다칠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기분은 상하겠지.”

    “누가 나한테 악의를 가지고 접근하는지, 호감을 보이는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그런 것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어요.”

    “알면, 안 아파?”

    “솔직히 이런 기 싸움, 세력 싸움, 난 잘 몰라요. 하지만 숨어 지내는 건 싫어.”

    세인은 그동안 충명원에 발조차 들이질 못했다.

    미연의 배려로 제문에서 배제당하지 않는 정도로 지내왔으나, 이젠 이한의 울타리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싶었다.

    그가 사는 세상을 창밖에서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내디디고 싶었다.

    설령 나쁜 것만 가득하다 할지라도 이한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어느 순간이든 당당히 이한의 아내라 소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으면 했다.

    친정이 없는 아내. 그에게 빌붙은 존재. 이런 기울어진 관계를 메우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세인은 이한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싶지 않았다.

    “정세인 뜻은 가상한데, 오늘은 돌아가.”

    “전에 나 준다고 한 그거, 지금 줄 수 있어요?”

    “어떤 거. 순 빚쟁이네.”

    이한이 옅게 웃자 그의 뒤로 자욱한 노을이 핏빛처럼 돋보였다.

    그동안 세인이 사무실에서 그동안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대한 이야기를 주워들었고, 회사 사정이나 이한이 즐겨보는 기사, 서적을 익혔다.

    무엇보다 이한이 지금 제문에서 어느 위치인지, 그를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그의 편이고 적인지 분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한에게 밀착해 일과를 함께한 결과였다. 물론 민성의 도움도 약간 있었다.

    그의 약점이 아닌, 이한을 지지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되고 싶었고 함께 걸어날 수 있는 동등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안주보단 발전이, 위축보단 개척이 필요했다.

    “더블나인. 나 준다고 했잖아요.”

    “윤 비서, 들었지. 서류 지금 있나.”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곤 정말 가지러 갈 셈인지 차로 향했다. 세인은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이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뭐든 턱턱 내어줄 수 있는 이한 씨가 여기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 설마 나 못 지켜줘요?”

    본채를 눈짓하며 세인이 묻자, 이한이 헛숨을 내쉬었다.

    “지켜, 무슨 수를 써서든.”

    “그럼 가요. 나도 무슨 수를 써서든 당하고만 있지 않을게요.”

    세인이 담담하게, 그리고 확신에 찬 얼굴로 웃었다.

    ***

    서 회장이 오늘 유언장을 발표한단 소리에 얼굴이 시뻘게져 달려온 인사가 여럿이었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각자 무리를 지어 웅성거리거나 목소리를 높이며 오늘 사태에 대해 열띠게 의견을 내세웠다.

    오늘 서 회장의 유언장 발표가 그 자식과 손주들의 입지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거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세인이 이한의 손을 잡고 너른 홀로 들어서자, 사위에서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다.

    결혼식 때도 비슷한 시선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세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이한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귓불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왔다.

    “이래서 데려오기 싫었어. 봐, 다 너만 보잖아.”

    속삭이는 말에 세인이 가슴이 부풀 만큼 숨을 크게 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그를 마주했다.

    “이한 씨가 이렇게 내 옆에 있어주잖아요. 그거면 경고가 될 거예요.”

    제문의 후계자, 서이한.

    과연 그가 제문의 수장이 될 것인지 두고 보잔 시선이 더러 있었지만, 이한이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을 거란 의견엔 모두 동의했다.

    많은 사람이 자리한 홀이 붐볐다. 각자 비서들과 변호사까지 대동하느라 혼란이 가중된 터다.

    서 회장은 가장 상석에 있었다.

    그의 2세들이 차례로 자리하고, 손주들과 친척 순으로 자리를 채워 나갔다.

    아직 도착 전인지, 이한의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 나이순으로 앉는 것 같은데, 이한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에 세인이 손을 뒤로 빼며 속삭였다.

    “이한 씨, 우리도 이쯤 앉아요.”

    그때였다. 나이를 잊게 하는 커다란 목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다.

    “서 전무는 이쪽으로 앉거라.”

    “회장님이 앞으로 오라고 하시는데, 거절할까?”

    이한이 눈을 휘며 웃었다.

    “세인이, 뭐 하는 게냐. 어서 오래도. 자리 비었다.”

    덕수가 쭈글쭈글한 손을 휘휘 저으며 머뭇대는 세인까지 불렀다.

    그 빈자리에 엉거주춤 앉으려던 삼남 성운이 헛기침하며 한 칸 뒤의 자리에 앉았다.

    어른들 기다리실까 싶어 세인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이한의 손을 잡고 덕수의 가까이에 앉게 되었다.

    이한은 뭐가 우스운지 웃음을 지었고, 세인은 이쪽으로 몰린 시선이 따가워 마른침을 삼키기 급급했다.

    “그 유언장 발표하기 전에, 채준아.”

    “네, 할아버지.”

    미리 착석해 있던 채준이 호명되자 반색하며 일어났다. 덕수가 근엄하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 인수한 LD 호텔 건 말이다.”

    “네, 제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채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이 맡은 사업 이야기가 거론되는 건 서 회장의 눈에 들 기회였다.

    얼마 전 제문 건설은 매출이 급락한 경기도 도심의 호텔을 6,000억 원이 넘는 가격으로 매입했다.

    제문 건설과 다른 법인이 지분을 나눠 가졌고, 앞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새로운 호텔로 거듭날 예정이었다.

    이제 첫발을 내딛는 사업이라 쟁쟁한 기업들이 수주를 따내려 입찰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업의 선봉에 선 이가 채준이었다.

    “부지 개발과 호텔 재건을 더블나인과 협약하는 게 어떠냐.”

    “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건 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회장과 채준, 그리고 이한을 번갈아 보았다.

    “6년이면 오래됐다. 제문가 사람이면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 세인이가 언제까지 누구 밑에서 허송세월 보낼 것이냐.”

    폭탄 같은 발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제문의 사람이 된 지 6년이면 적지 않은 세월이긴 하나, 서 회장이 누군갈 무턱대고 밀어주는 일은 전무후무했기 때문이다.

    이한조차도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후계자로서 자질을 인정받은 게 그 증거였다.

    “호텔 부지 신개발에 더블나인식의 아이덴티티를 녹여내면 좋겠더구나. 전에 가보니 좋았다. 젊은 사람들 묘하게 마음 잡는 구석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

    채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내 집에 들어왔으면 여자든 남자든, 자격 있는 사람은 사업 권한 갖는 거다.”

    “그래도 전문가의 손에 맡기셔야죠. 사업이 애들 장난입니까?”

    “여기 호텔에 관해 세인이만큼 전문가 있느냐? 아가, 네가 말해 보아라. 그동안 아이템 하나 생각해 놓은 거 없어?”

    세인은 제게로 날아온 화살에 미처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였다.

    그때 이한이 나서서 유연하게 주변의 이목을 가져갔다.

    “회장님, 마음은 감사하나 우리 세인이 처음 시작하는 건데 마음 좀 더 써주세요.”

    덕수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 눈짓했다.

    “이미 폐업 수순 밟아 우리가 인수한 호텔입니다. 새 단장을 할 계획이라면, 아예 더블나인 이름 입혀서 내보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더블나인, 분점 낼 때도 됐죠. 안 그래, 정 대표?”

    이한이 능청스레 세인을 향해 물어왔다. 정 대표라니…….

    더블나인을 달라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한은 그녀를 대표직에 앉혀두곤 흡족해하는 보호자처럼 굴고 있었다.

    역시 이한의 속도는 그녀가 쫓기에 빨랐다.

    하지만 주저할 이유가 있을까.

    더블나인에 사직서를 낸 건 일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세인은 제 일에 자부심이 있었고 자신감도 있었다.

    과분한 기회일지 몰라도 망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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