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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3화 (83/95)
  • 두 번째 신혼 83화

    서 회장, 덕수의 건강이 악화되었단 소식은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봬야 하나 싶었는데, 대외적으로 모든 면회를 거절하고 있다고 들었다.

    채준이 느긋하게 걸어 나오며 말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서 전무한테 타격이 없을 것 같아? 아무리 서 전무가 날고 기어도 그 노인네 입김 무시 못 해. 재한이 죽고 후계자로 이한이 점찍으셨을 때 반발이 없었겠냐고.”

    세인은 문을 활짝 열었다. 알았으니 이만 채준에게 나가라고 할 셈이었는데, 열린 문 너머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세인이 환대가 지극하네.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이한이 바로 문밖에 서 있는 터라 세인도, 채준도 당황했다.

    “문까지 열어주고, 그 고운 손 조심히 쓰라니까.”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채준을 직시하는 이한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 뒤에선 민성이 눈썹을 구기고 있었다.

    “회의는 잘 마쳤어요?”

    “자기 생각에 머리에 들어와야지.”

    이한이 안으로 들어섰고 민성이 문을 닫으며 함께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쿵. 무언가의 서막을 알리듯 묵직한 소음이 낮게 깔렸다.

    “서 이사가 여긴 웬일일까.”

    이한이 고개를 약간 틀며 묻자, 채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내가 동생 방에 오는데 일일이 허락을 맡아야 할 군번이야?”

    “그러네. 예의를 개나 준 짐승 새끼에게 사람 말이 통할 리는 없을 텐데, 윤 비서, 내가 이 대화를 이어가야 하나?”

    “아닙니다. 전무님, 정리하겠습니다.”

    민성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채준을 오염물 덩어리로 취급하자, 채준의 낯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진짜…….”

    “서 회장님이 호출을 하셨어.”

    “뭐? 뭐? 난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우리 세인이만 부르신 거니 당연히 이사님께 기별이 갔을 리는 없지.”

    “어째서? 저 여자가 뭔데?”

    “다시는 우리 세인이 앞에 나타나지 마. 잘리고 싶은 거 아니면 손목 간수 잘하고.”

    이한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러나 채준을 향한 서릿발 낀 기운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장난이 아니란 걸 알았는지 채준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도 이한과 정면 승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민성이 채준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막연하게 깔려 있던 긴장감이 차츰 옅어졌다.

    세인은 한쪽에서 홀로 한숨을 내리쉬었다.

    “앞으론 둘만 있을 일 없게 하지. 놀랐나.”

    이한이 넥타이를 조금 끌어 내리더니 세인에게로 다가와 단숨에 허리를 당겼다.

    그러더니 세인을 꽉 끌어안았다.

    “저 새끼가 무슨 짓 했는지 전부 말해.”

    “그냥 헛소리했죠, 뭐.”

    “바로 앞에 두고 예뻐하려고 데려왔더니 별 거지 같은 새끼가 기웃거리고. 지문 인식이라도 달아야 하나.”

    이한이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았다. 집무실을 커다란 금고처럼 만들어 세인을 넣어두곤 혼자만 볼 속셈일지 몰랐다.

    그런데도 세인은 웃었다.

    “회의 오래 걸렸어요. 30분 안에 온다고 해놓곤…….”

    그리고 투정을 부렸다. 이한의 가슴에 달라붙어, 일을 중시하는 본연의 성향까지 집어치운 채 아이처럼 굴었다.

    이한이 바쁜 거야, 말해 입 아픈 일이었다.

    세인은 꿍얼거리며 그럴 때마다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이한을 가만히 감상했다.

    역시 그는 환하게 웃을 때가 가장 예뻤다.

    “그러지 말고 다음부턴 회의도 같이 갈까. 이렇게 된 거, 직함 하나 달든가.”

    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직함이요?”

    “음, 뭘 하고 싶은데.”

    채준을 떠올리곤 세인이 가볍게 던져보았다.

    “이사?”

    “그거로 되겠어. 포부는 큰 게 좋지. 회장은 어때.”

    이한이 정말 달이라도 따줄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니, 안 되겠어. 다들 너만 볼 거 아니야.”

    “그게 뭐예요.”

    “어디 숨겨두고 혼자 아껴먹고 싶어.”

    말을 마친 이한이 턱을 틀어 입술을 겹쳐왔다.

    익숙한 향과 체온, 음성. 그 모든 것이 세인을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게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기 회사…….”

    “우리 세인이가 언제부터 그런 걸 가렸지?”

    처음부터 분명 세인은 여긴 좀 그렇다고 말했다.

    물론 미적지근한 반항이긴 했다.

    이한이 몇 번 입술을 문지르자 쉽사리 함락되어 그의 뜻에 굴복하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간 적은 없었는데…….

    오늘 이한은 뭔가 달랐다. 파고드는 속도가 평소와 다르게 빠르고 격렬했다.

    세인은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이한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한데 엉켜 뒤뚱거리다가 사무실 소파에 함께 널브러졌다.

    세인이 블라우스를 가르는 손을 부여잡으며 일단은 이한을 제지해 보았다.

    “바, 밖에 윤 비서님이…….”

    “이런 때 다른 남자 이름 부르지 마.”

    “무, 문을 안 잠갔…….”

    “잠갔어.”

    언제? 민성이 문까지 잠그고 나갔단 걸까.

    하나 세인은 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아득한 쾌감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묵직한 소파가 살짝 흔들리는 소리, 가습기의 소음, 바깥을 향해 반쯤 열린 블라인드.

    멀찍이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배덕감을 재촉했다.

    “평소보다 빠르네, 이런 거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세인은 못된 말을 하는 이한의 등을 꼭 끌어안고 이한도 당해 보라고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짧게 욕하며 흥분된 모습을 보이는 이한이 사랑스러운 한편, 사무실에서 이러는 게 여전히 불안해서 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거세게 들이닥치는 그가, 어제보다 더 좋았다.

    “괜찮아. 아무도 못 들어와. 이런 모습, 다른 사람 보게 안 해.”

    쪽. 이한이 입을 맞추곤 바짝 겹쳤던 몸을 떼어냈다.

    느린 듯 유연하게 율동하는 이한의 모습에 넋이 나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손등을 깨물어야 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이한은 손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와 정성스레 세인의 몸을 닦아주었다.

    “팔.”

    세인은 아이처럼 팔을 뻗어 그가 입혀주는 대로 블라우스를 입었다. 벗길 땐 성급했으면서 이한의 손가락은 입힐 땐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그가 세인의 턱을 손끝으로 툭 두드리더니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왜요?”

    “아니.”

    아니라는 데 더 캐물을 순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회장님 댁에 갈 거죠?”

    “솔직히 말해서 내키진 않아.”

    이한이 공처럼 말린 스타킹을 가져와 펼쳤다가 다시 쓸 수 없어 보였는지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많이 안 좋으신 것 같던데. 한 번은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감정의 골을 메우지 못한 채 덕수가 세상을 뜬다면 이한은 품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떠안게 될 터다.

    이한이 그러길 원치 않았다.

    “나도 얼굴 뵙고, 이번 일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인사 정도는 하고 싶어요.”

    “네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지. 그 노인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래도 사과해 주셨잖아요.”

    세인에게 잘못한 사람은 많았다. 덕수는 사과했고 보상하기 위해 노력해 주었다.

    무르다고 하겠지만 세인은 그거면 됐다.

    물론 이한을 아프게 한 건 영원히 용서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바꿔 말해 이한을 위해서라면 용서할 수 있었다.

    “장사꾼한테 허리 숙이는 거, 별거 아니야.”

    “누구든 잘못을 할 수 있어요.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느냐, 아니면 영원히 죄를 모르느냐.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용서하지 마.”

    그녀의 옆으로 앉은 이한이 팔을 뻗어 세인을 끌어 앉았다.

    여린 목덜미에 조각 같은 콧대를 파묻으며 이한이 재차 말했다. 덕수를 용서하지 말라고, 세인에게 좀 더 세상을 모질게 살아보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

    충명원의 공터가 가득 찰 만큼 주차된 차가 가득했다.

    차에서 내린 이한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찌푸려졌다. 줄줄이 이어진 차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눈치챈 것이다.

    다른 차로 이동한 민성이 다가와 이한에게 귓속말로 급히 말을 전달했다.

    “오늘 유언장을 발표하신답니다.”

    “콩고물이라도 받아먹겠다고, 입 벌리러 온 거야.”

    “너무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영감이 머리를 썼어.”

    이러려고 세인을 불러들인 거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번이나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덕수를 만나보자는 세인의 간곡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다.

    빤히 세인과 이한이 방문하는 걸 알고도 유언장 발표를 오늘로 정한 건, 이한을 붙들어두기 위한 속셈일 터였다.

    이한에게 상당한 유산을 증여하겠단 의미기도 했다.

    하지만 저 안에 하이에나처럼 득시글대는 일가친척들 틈바구니로 세인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하, 씨. 뭐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연락받았는지 채준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서 전무,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으면 아까 말 좀 해주지!”

    “알고 있던 얼굴로 보여?”

    이한이 짜증스레 고개를 까딱이자, 그제야 채준도 상황을 파악한 듯싶었다.

    꽉 닫힌 조수석을 흘긋 바라본 그가 급한 건 저 안에 있다는 듯 먼저 공터를 떠나려 했다.

    “형.”

    이사님이 아닌, 친근한 호칭에 채준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어?”

    쾅. 이한이 채준의 턱을 잡아 근처의 차에 내리찍은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시는, 손대지 마.”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채준이 굳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전무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보라고 하는 거야. 우리 세인이 건들 새끼들이 좀 많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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