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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1화 (81/95)
  • 두 번째 신혼 81화

    대리석 계단을 서둘러 내려오는 이한의 앞머리가 제멋대로 흐트러져 흔들렸다.

    긴 트레이닝팬츠만 걸친 이한의 몸은 어딘가 화나 보이기도 했다.

    이한이 다급하게 내려오자 관리인이 달려왔다.

    “뭐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세인과 이한이 있는 2층 출입을 금지당한 관리인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손님이 반가워 평소보다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말씀하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내 아내를 못 봤습니까?”

    이한의 질문에 관리인이 미소 지으며 바깥을 손짓했다.

    수영장이 있는 방향인 걸 확인한 이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런 사고 후엔 으레 정신적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또 저곳으로 갔을까.

    고개를 까딱해 감사 인사를 대신한 이한은 빠른 걸음으로 세인의 기척을 찾았다.

    며칠 전, 수영장에 빠진 세인을 보는 순간, 이한은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6년 전 그녀를 떠나야 했던 때처럼 무력감을 마주했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가슴만 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계산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그녀를 구해냈고, 세인이 가까스로 숨을 내쉬는 걸 확인했다.

    콧대가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인이 죽는다면, 자신도 따라가겠단 다짐을 그 짧은 순간에 수십 번도 더 했다.

    세인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고 경위가 어떻게 됐든 세인이 잘못했을 리 없었다.

    모든 것은 그녀를 조금 더 살뜰하게 보살피지 못한 이한의 탓이었다.

    혼자 두지 않았더라면. 세인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세인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세인에게 불필요한 트라우마를 심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이한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수영장을 없애라 명했다.

    관리인들이 모두 합심해 수영장을 메우는 동안, 이한은 세인을 꼭 붙들고 객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 알게 된 향락은 이한을 더욱 미치게 했고 사춘기 소년이 되게 했으며, 원숙한 남자가 되어 세인을 갈망케 했다.

    그녀를 더욱더 원하게 돼버렸다.

    세인의 뒷모습을 발견한 이한은 아예 뛰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하늘이 밤의 초입을 드러냈고, 어둠에 묻혀 그녀를 잃을까 이한은 조바심이 일었다.

    “정세인.”

    천천히 돌아보는 세인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 있다. 처음엔 가식적인 미소만 보여 주더니. 이젠 진심으로 웃어 사람을 돌게 했다.

    그래, 세인이 행복하다면 좋았다. 그것만으로 지난 6년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혼자 뭐 할까.”

    “잘 자는 것 같아서 조용히 나왔어요.”

    “말을 하고 나가야지, 그래도.”

    이한이 안도하며 그녀의 머릿결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불면증은 세인을 만난 뒤 놀랍도록 좋아지고 있었다. 그동안은 세인을 그리느라 잠들지 못한 게 분명했다.

    급히 덮느라 심미적인 부분까지 고려하지 못한 수영장 터의 동산을 세인이 손짓했다.

    “이건 뭐예요? 흉해.”

    “수영이 영 재미없어서 없앴지.”

    수영장을 보는 순간, 네가 물속에 잠긴 순간을 떠올릴까 봐.

    고통의 순간을 조금이나마 되짚을까 봐.

    그래서 없애 버렸다. 그런다고 세인이 겪은 일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흔적을 지워 버리는 것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꼭 무덤 같잖아요.”

    “유서 깊은 왕실 묘 같지 않나.”

    “억지 부리지 말아요.”

    이한은 미소 짓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단단히 쌓아 올린 흙더미 위로 올라갔다.

    “여기에 수영장 말고 테니스장을 만들까.”

    “어……! 막 올라가도 돼요? 무너질 것 같지 않아요?”

    “같이 추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한이 웃으며 대꾸하자 세인이 내심 올라가고 싶었던 것처럼 냉큼 걸음을 옮겼다.

    손을 잡고 이끌어주자 겁 없이 발을 턱턱 내딛는 걸 보아 이한을 온전히 믿는 게 분명했다.

    “씩씩하네, 우리 세인이.”

    높은 곳에 서자 해안가의 저 멀리까지 내다보였다. 그에 감탄하며 마지막 발을 내딛던 세인이 슬리퍼가 벗겨졌다.

    이한이 깡충거리며 슬리퍼를 찾아 신으려는 세인의 팔을 당기며 제지했다.

    “두고 이리 와.”

    이한이 허리를 감아 당기자 그녀가 종잇장처럼 딸려와 이한의 발 위로 올라왔다.

    급히 뛰어나온 터라 이한은 맨발이었다.

    “뭐야, 맨발로 나왔어요?”

    “어. 네가 없어서.”

    “내가 어딜 간다고 이렇게 급하게 나왔어요. 미안하게…….”

    “앞으론 어디로 갈 건지 전부 말해 줘.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너 찾을 것 같으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인의 허리를 받쳐 안고 이한이 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말랑한 흙바닥이 두 사람의 무게를 안고 조금씩 짓눌렸다.

    “너, 넘어지면…….”

    “안 넘어져.”

    확신한 이한이 세인을 안은 채로 흙더미 위를 거닐었다.

    이제 세인이 쓰러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이한이 단단히 받치고 있을 테니까. 어디에 있든 손을 내밀어줄 테니까.

    “꼭 춤추는 것 같아요.”

    “그럼 처음으로 같이 춤추는 거네.”

    “그런데요, 우리 저 방에서 며칠이나 안 나왔는지 알아요?”

    세인의 질문에 이한의 웃음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밤이 빠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꼭 왈츠처럼 흘러와 발걸음과 박자가 맞아떨어졌다.

    밤하늘의 여운이 여행의 마지막 밤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이윽고 한 곳에서 멈춰 선 이한이 말했다.

    “돌아가면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때.”

    “상담?”

    “마음을 털어놓을 데가 필요할 거야. 나한텐 하지 못할 말도 있을 테고. 부담 갖지 말고 해볼까.”

    이한이 조심스레 권하자 그의 등을 조금씩 주물거리던 세인이 입을 열었다.

    “수영장에 빠졌을 때, 갑자기 예전 일이 생각났어요.”

    “예전 일?”

    “초등학생 때였는데, 언니 휠체어가 별장 수영장에 빠졌어요. 전에 그 별장이었는데…….”

    이한이 더 얘기하라는 듯 조용히 경청했다.

    “그때 나도 그 근처에 있었어요. 경사가 심해서 휠체어가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데 뭘 어떻게 할 수가 있나. 그냥 보고 있었죠.”

    “그래서.”

    “주변에 있던 삼촌이 언닐 구했는데, 그 일로 수영을 배우게 됐어요.”

    “애한테 비열했네.”

    그건 마치 세인의 탓으로 돌린 것과도 같지 않나.

    세인에게 수영을 배우게 한 건, 앞으론 그런 사고를 막아달란 압박이었다.

    이한의 생각보다도 더 세인은 고된 삶을 살았던 게 분명했다.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외롭고 고단하게.

    “수영 선생님이 남자분이셨는데 방식이 되게 혹독했어요.”

    “어떻게.”

    이한의 한층 낮아진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서 세인이 하던 말을 이어갔다.

    “겨우 발 차는 것만 배웠는데 물속에 날 두고 그냥 가버렸어요. 바닥에 발이 안 닿는데…… 얼마나 무서웠다고.”

    “그 새끼 지금 살아 있나?”

    “음…… 그때 30대였으니까…… 아마도?”

    “그래.”

    이한이 서늘하게 대꾸하자, 세인이 할퀸 자국이 가득한 이한의 등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죽지 않으려고 수영을 배웠어요. 그래서 수영 실력은 꽤 자부했는데 사고가 났어요.”

    세인이 가슴팍에 기댔던 얼굴을 떼어내고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동안 내가 신뢰하던 게 전부 허상일지도 몰라요.”

    이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세인이 무슨 생각인지 가늠하기 위해 그녀의 말에 최대한 집중했다.

    “내가 알던 정의, 내가 지키려던 의리, 지금의 나를 만든 모든 것. 그런 걸 버리고 싶어요. 그런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넌 너야.”

    세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호수 같은 동그란 마음에 이한은 기꺼이 투신하고 싶었다.

    “네가 어떻게 자랐든, 어떤 생각을 가졌든 넌 정세인이야. 굳이 뭔가를 버릴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지금 난 너무 초라해.”

    “그것까지 사랑스러워.”

    세인의 눈동자가 별보다 밝게 빛났다.

    그녀의 결핍은 그것대로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그녀가 지난 인생을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그건 너무 잔인했다.

    이한이 세인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예측할 수 없던 불행, 피할 수 없는 사고. 그런 게 네 잘못이겠어.”

    아주 예전 세인이 이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게 세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빈곤한 너도, 고집스러운 너도, 불행한 너도. 아픈 너도.”

    “…….”

    “전부 사랑하는 내가 있는데, 그거론 부족한가.”

    세인이 눈물을 가득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앞으론 무리하지 마. 투정 부리고 게으름도 피우고 그래 봐.”

    어느덧 별이 떴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 밤은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함께 거닐 여정은 곧 찾아올 새벽처럼 밝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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