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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0화 (80/95)
  • 두 번째 신혼 80화

    갑작스러운 방문일 텐데도 미연을 향한 은희의 반응은 평이하기만 했다.

    은희는 눈을 조금 키울 뿐, 그다지 놀란 티도 내지 않았다.

    “사부인, 그렇지 않아도 언제 인사드릴까 하던 차였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오랜만에 뵙네요.”

    미연이 단조롭게 대꾸했다.

    두 사람은 종종 모임이나 파티, 사업회에서 마주쳤다.

    그때마다 간단한 눈인사만 나눌 뿐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미연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탓이었다.

    눈치는 있는지, 은희 또한 일부러 인사하러 달려오거나 하진 않았다.

    그 때문에 두 집안이 사돈을 맺었단 걸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앉으세요.”

    은희가 손짓하며 자리를 권했다. 보통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앉는 게 예의였다.

    그러나 은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은희가 무례한 덴 이유가 있을 터다.

    이미 서 회장의 움직임을 파악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예의도 못 차릴 만큼 지쳤을 것이다.

    미연은 빙 돌아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얘긴 들었어요.”

    “무슨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르는 척이 우습네요. 안색이 어두워 보이는 게 역시 그 일 때문 같은데.”

    미연이 팬츠를 입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늘씬하게 뻗은 긴 다리 끝에서 뾰족한 펌프스가 까딱거렸다.

    핏기 없는 얼굴로 모른 체하려 애쓰는 은희는 추하기 그지없다.

    “대체……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사돈처녀 일은 유감입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알겠어요?”

    하찮은 오리발을 더는 봐줄 수 없던 미연이 대놓고 혜인의 얘기를 꺼냈다.

    그러곤 바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일이 세상 밖으로 새어 나오진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심 원장님,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조용하길 바랐나요?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여겼어요?”

    미연이 쓰게 웃었다.

    혜인의 일로 경찰이 출동하는 바람에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많았다.

    혜인의 스캔들은 제문에도 불미스러운 영향을 끼쳤다. 어쨌거나 이쪽과 연결 고리가 있으니 이 일을 조용히 묻는 편이 미연에게 이로웠다.

    그래서 미연은 일찌감치 손을 써 뒀다. 제문의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제 아들과 아들이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하루빨리 떠나세요.”

    “모자가 같은 말을 하네요.”

    은희가 모든 걸 포기한 듯, 한숨을 쉬듯 말했다.

    머리를 짚는 은희의 흰자위가 벌겠다. 마음고생이 꽤 심한 모양이지.

    그래봤자 세인이 받은 상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미연이 물러섬 없이 말했다.

    “내 아들 서 전무가 다녀간 거로 압니다. 그래요, 나도 같은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 전, 이한이 처음으로 미연에게 부탁을 해왔다.

    바로 최고급 요양 시설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는데, 혜인을 위한 자리란 걸 알고 미연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이한의 뜻을 이해했고 미연은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왔다.

    이한은 어릴 때부터 속내가 차가운 녀석이었다.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재한과 다르게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던 녀석.

    이한은 아이 때부터 투정 한번 부리질 않았다. 틈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한의 적당한 선이 실은 배려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연 또한 그런 성격이었으니.

    그런 이한이 가족을 부쩍 멀리하기 시작한 건 재한이 떠난 후부터였다. 아마 그건 이한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일 터였다.

    미연은 요령 나쁜 이한을 나무랄 주제가 못 되었다. 미연도 못 하는 걸 아들에게 강요할 만큼 염치없지 않았다.

    하나 아들이 하는 일은 지지해 줄 수 있었다.

    “떠나세요. 대신, 병원장 자리는 지켜 드리죠.”

    “협박, 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자리를 비우면 병원장은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는 거 아시잖아요.”

    “감히 가치를 바라는 건가요.”

    미연이 서늘하게 비웃었다. 제 가족과의 연을 끊어달라던 세인의 청은 미연이 보기에 너무 착해 빠진 부탁이었다.

    “선택하세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될 건지, 이름만이라도 건질 것인지.”

    “이러시는 이유가 대체 뭐예요. 혜인이 일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이건 집안일이잖아요.”

    “그래서.”

    “사소한 추문으로 병원 일까지 간섭하는 건 월권이에요.”

    은희가 호소하듯 말했다. 그녀의 눈엔 피곤한 것을 처치하지 못해 곤란하단 기색이 가득 어려 있었다.

    미연이 더 해보란 듯 가만히 입을 닫자 은희가 말을 계속했다.

    “사부인, 세인이 제 딸이에요. 누구보다 그 아이가 잘되길 바라고 있어요.”

    “누굴 위해서? 내가 보기엔 사돈처녀, 아니. 정혜인 씨를 위해서 잘되길 바라는 것 같은데.”

    “……아시다시피 혜인이가 많이 아파요.”

    “아, 사부인 바람을 위해서구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은희의 얼굴이 더욱 파리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제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그 권리를 어린 나이에 강탈당한 세인이 이만큼이나 바르게 자란 건 본디 세인의 심성이 곱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인 강요를 꿰뚫어 본 미연 앞에서 더는 할 말을 잃은 듯 은희가 침묵했다.

    “떠나세요. 병원장의 지위, 세이지오 금융자산, 새로 투자한 엔터테인먼트 사업, 재단 일까지. 모두 지켜 드리죠.”

    “제가 떠나는 게 사돈께 무슨 이득이 되는 건가요?”

    “한국 땅에 두 사람이 없다는 거. 그게 우리 세인이에게 복입니다.”

    “세인이는……! 엄마랑 언니 내쫓고 편히 지낼 그런 애가 아니에요.”

    답답한 소리에 미연이 한숨을 흘려 보냈다.

    “떠나지 않으신다면, 회장님 뜻 받아 그쪽 집안과 모든 연을 끊을 겁니다. 그리고 그땐 이 바닥에서 퇴출당할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난 미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을 나섰다.

    문득 신혼여행을 간다던 두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제법 티격태격할 것 같던데.

    그러나 이한과 티격태격할 수 있는 존재는, 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곁을 내어준 세인뿐이었다.

    ***

    하얀 시트 밖으로 빠져나온 뽀얀 팔이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모았다.

    더운 날씨 탓에 에어컨을 펑펑 틀어대고 있었으나, 세인은 감기 환자처럼 꼼꼼하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녀는 발목과 발을 제외하곤 솜뭉치처럼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윽…….”

    고얀 통증이 허리와 허벅지를 강타했다. 팔다리도 저리고 살갗은 쓰렸다.

    엉금엉금 걸어간 세인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잡기 위해 주저앉으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굼벵이처럼 굴 때가 아니었다. 이한이 없는 지금이 적기였다.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정력 넘치는 남편은 사기 결혼을 당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내내 집요하고 뜨거웠다.

    물론 싫기만 한 건 아니라서, 이한이 몸을 겹쳐올 때마다 마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긴 했다.

    “챙겨 먹는 식품이 있을 거야. 분명해…….”

    세인이 구시렁거리며 남편의 괴물 같은 체력에 혀를 찼다.

    오늘만 해도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 며칠째 식사도 방 안에서 해결했다.

    이 방에서 나간 게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세인은 그게 무척이나 민망해서 이제는 좀 나가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벌써 내일이면 출국 날짜였다. 신혼여행의 추억을 곱씹을 때마다 침대만 떠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불 밖으로 손을 뺀 세인은 속옷을 끌어모았다. 어차피 벗을 건데 뭐 하러 입냐며 이한이 던져놓은 속옷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인의 등이 움칠 튀어 올랐다.

    버, 벌써 온 거야?

    프라이버시를 위해 입구를 막아둔 가벽을 지나 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그는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어제보다 잘난 듯한 얼굴로 이한이 웃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가까이 오지 마.”

    “말이 짧아졌네.”

    “오지 말라고 했어요!”

    세인이 후다닥 속옷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중심을 잃은 그녀가 뒤뚱거린 것도 잠시였다.

    어느새 이한이 다가와 그녀를 제 어깨에 둘러매 버렸다.

    “읏! 놔! 밖에, 밖에 나갈 거예요!”

    “그래, 오늘은 나가자.”

    말은 그러면서 이한이 향하는 곳은 다시 침대였다. 세인은 거꾸로 매달린 채 멀어져가는 입구를 아득히 바라보았다.

    “나간다며!”

    “뭘 숨겼을까.”

    세인을 침대에 눕힌 이한이 시선을 툭 떨궈 세인의 가슴팍을 눈짓했다.

    “옷…….”

    “옷?”

    “못 입게 하니까…….”

    “누가.”

    볼우물이 짙게 팬 미소에 세인의 경계가 반쯤 허물어졌다. 그가 상기된 뺨에 입을 맞춘 뒤 헝클어진 머리칼을 옆으로 넘겼다.

    세인이 다시 이불을 다잡아보았으나 이한의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앉는 순간, 힘이 죽 빠져 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이한이 노련하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알았, 알았어요. 일단 씻을래요.”

    “어제 씻었어, 너.”

    “어제 언제?”

    “잘 때 씻겼지. 땀을 그렇게 흘렸는데 그대로 자면 감기 들어.”

    이한이 웃으며 부쩍 민감해진 살갗을 크게 빨아들였다.

    아. 세인이 허리를 휘었다. 크림처럼 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침입해 강렬하게 유영하는 감각은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세인이 그를 끌어안으며 받아들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한만큼이나 세인도 들떠 있었고 설렜고 그가 아름다웠으니까.

    그렇게 또 이한에게 한 차례 시달리고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세인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터라, 결국 외출은 물 건너갔다.

    세인이 다시 눈을 뜬 건 저녁때가 지나서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푹 잠든 이한을 두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발코니로 향한 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왜 수영장이 없지?”

    분명히, 있어야 할 수영장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방을 바꾼 것도 아닌데…….

    자세히 눈을 뜨고 보자 수영장 자리에 수북하게 쌓인 흙더미가 흉측하게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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