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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9화 (79/95)
  • 두 번째 신혼 79화

    자신을 구하러 수영장에 뛰어들었을 이한을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다.

    만약에 이한이 수영장에 빠졌더라면, 세인은 이성을 잃었을 거다.

    그를 구하긴커녕 아무것도 못 하고 무력하게 그가 가라앉는 걸 보고만 있었을지 몰랐다.

    우선 씻고 보송보송해져야겠다. 그런 뒤 이한을 끌어안고 노닥거려야지.

    그래야 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한도 마찬가지고.

    “일단 씻을래요.”

    “닦아내고 쉬지 그래.”

    가만히 두면 냄새가 날 것 같아서 꺼낸 얘기였다.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한에게 더러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머리도 감아야 해요.”

    세인이 몸을 일으키자, 이한이 잠시 기다리라며 욕실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한이 다가와 세인을 안았다.

    “걸어가도 되는데…….”

    “걸어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어떨 것 같아. 하루에 두 번 죽일 거 아니면 말 듣자.”

    “이한 씨는 조금 극성인 것 같아요.”

    세인이 중얼거리며 훈훈한 욕실 안을 둘러보았다. 욕조의 물이 아침에도 그랬듯이 가득 차 있었다.

    이한이 온도를 조절해 물을 따뜻하게 덥힌 것 같았다. 이한은 담요만 벗겨 세인을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사실 턱이 아플 만큼 몸이 떨리고 있던 터였다. 세인은 따뜻한 물에 몸을 느슨히 풀었다.

    “물이 무서운 건 아니지.”

    “……응. 모르겠어요.”

    일단 지금은 괜찮았다. 욕조에 빠져 죽진 않을 테니 무섭지 않을 거다.

    뒤로 돌아간 이한이 세인의 목 뒤에 수건을 받치곤 그녀의 고개를 젖히게 했다.

    부드러운 물줄기가 두피 사이로 흘러들자, 더욱 빠르게 진정이 찾아왔다.

    이한은 서투르지만 섬세했다. 엇나가다도 부드럽게 두피를 긁는 기묘한 손기술로 세인을 웃게 했다.

    샴푸 거품이 세인의 뺨에 튀자, 서둘러 닦아 놓곤 세인이 괜찮은지 연신 확인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이한이 헹굼을 마친 머리칼을 어설프게 짜며 말했다.

    “다시는 혼자 그런 데 들어가지 마.”

    한없이 진중한 목소리였다.

    “너 없으면 나도 없는 거니까. 수영장 만든 새끼 목을 분지르기 전에 조심해야지.”

    “왜 애꿎은 사람을…….”

    “정세인, 얼굴도 모르는 새끼 말고 내 걱정을 해. 너 없으면 미치는 날 위해서.”

    “조금 무서워요.”

    세인이 솔직하게 마음을 흘려 보냈다.

    “피차일반이네. 나도 정세인이 무서운데.”

    전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적 있었다. 무겁다고 했었나.

    이제 세인도 그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이한을 빼놓곤 정세인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토록 마음이 무겁게 여물었으면서 담아둔 이야기 하나 말 못하고 끙끙거리는 자신의 처지가 어쩐지 바보처럼 여겨졌다.

    죽다 살아났더니 사소한 고민이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옷 벗겨줘요. 답답해요.”

    세인이 허리를 약간 세우며 팔을 뻗었다. 벗겨달란 세인 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뒤로 물러나 선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 아까처럼 답삭답삭 안아주거나 옷을 벗겨주지 않았다.

    돌연 며칠간 누적된 서러움이 울컥 치밀었다.

    “이제 시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묻는 말에, 세인이 그를 피하지 않고 말했다.

    “호텔에서…… 그날 뒤로 나한테 손 안 대는 거, 그거 눈치 못 챌 사람이 어디 있어요.”

    “뭐?”

    “키스도 안 하고 같이 잠도 안 자잖아요. 어제도 소파에서 자고…….”

    “시들다니. 그게 말이 돼?”

    다른 이유라도 있었단 소리일까. 세인은 먹먹한 머리를 굴려보았다.

    “매번 너한테 환장해서 이러는 거, 못 봤어? 안 보였을 리가 없는데.”

    팔짱을 끼고 선 이한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잔뜩 흥분한, 짐승 같은 신체는 물론이고 본능을 어쩌지 못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괜한 걱정인 게 분명했다. 섭섭함에 억측을 하느라 눈여겨보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저 상태로 참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럼 왜 거리 두는 거예요?”

    “하…….”

    이한이 곤란한 한숨을 내뱉다가 말을 이었다.

    “쌓이고 쌓였어. 이번에는 시작하면 못 멈출 거고. 그럼 정세인이 기겁하고 도망갈 게 뻔한데 욕심대로 밀어붙일 순 없잖아.”

    이한이 마른세수를 했다. 성마르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마저 사람을 동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한이 계속 안달 나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자 안도감과 함께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한은 늘 한발 먼저 앞서 있었다. 그의 아득한 애정을 따라잡으려면 세인은 힘껏 뛰어야 했다.

    주춤할 시간이 어디 있을까.

    애정을 나누기도 아까운데.

    “사랑해요.”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고백한 당사자도, 그리고 이한도 서로 믿지 못할 표정을 했다.

    억겁 같은 몇 초가 흘렀다. 세인의 두 뺨이 따끈하게 달아올랐고 이한의 입가는 느슨히 풀렸다.

    그가 등을 돌리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 갑자기 한 말이지만 진심이에요.”

    세인이 눈을 질끈 감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다가온 이한이 입술을 겹쳤다.

    “흣…….”

    말캉하고 뜨거운 감촉이 기꺼웠다. 세인의 목덜미를 감싸며 그가 짓쳐들어왔다.

    세인은 탄식하며 공간을 열어 그를 맞이했다. 이한과 농밀하게 섞이고 얽혀 축축한 소리를 내었다.

    말캉한 두 입술이 종이 한 장 거리를 두고 잠시 떨어졌다.

    “뭘 해달라고, 세인아.”

    “옷 벗겨주고…….”

    촉. 이한의 입술이 귓불을 간지럽히고 목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전에 하던 거…….”

    촉. 쇄골 근처에 입술이 닿자 세인이 등을 움칠 떨었다.

    “끝까지 해요.”

    “또 잠들어 버리면 그땐 어떻게 할까.”

    “안 그럴게요. 나도 반성했다고요.”

    “반성까지 하고 착해졌네? 애태울 땐 선수더니.”

    이한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세인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티셔츠 아랫단을 들추었다.

    “이제 안 멈춰.”

    그러니 거절하려면 지금뿐이란 말이었다. 세인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하고 싶은 건 이한뿐만 아니었다. 세인도 그를 만지고 그에게 닿고 싶었다.

    이한이 입을 맞추며 젖은 옷을 전부 치워냈다. 씻는 둥 마는 둥 입을 맞추느라 정신이 혼미했다.

    세인이 호흡을 가쁘게 내쉬며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침대 위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한은 나신으로 세인을 찾아왔다. 그의 눈가가 조금 붉었다.

    양쪽 손을 깍지 껴 잡은 뒤 시트에 누르며 이한이 부딪쳐 왔다. 잔잔했던 파도는 해일이 되어 격정적으로 세인을 집어삼켰다.

    낯선 격랑 속에서 이한을 꼭 붙들고서 약간의 통증까지 기꺼이 감내했다.

    거의 울듯이 숨을 내쉬는 세인의 등에 입을 맞추며 이한이 속삭였다.

    “눈 떠야지.”

    눈물을 입술로 훔치며 이한이 다정한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맞닿은 단단한 몸은 성난 짐승처럼 거칠게 활개 쳤다.

    고지에 오른 그가 나른하게 한숨 쉬었을 땐, 세인은 이미 두 번의 깊은 절정을 지나 보낸 후였다.

    이한이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세인의 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녹초가 된 세인과 다르게 이한은 쌩쌩하기만 했다.

    세인이 울먹이며 눈을 감았다.

    “너무, 너무하잖아…….”

    “그래, 푹 자둬. 일어나면 이어서 해야지.”

    이어서? 세인은 등에 닿는 이한의 가슴에서 세차게 맥박 치는 심장을 느끼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의 품에 갇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다시금 열기를 내보이는 이한을 감당할 자신이 없던 터다.

    “안 잘 거면 더 할까.”

    “조금 쉬고 그래야 한대요.”

    “누가 그래.”

    “그냥 세상 사람들이. 복상사 같은 거 할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이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귀엽다며 세인의 목 뒤와 어깨를 핥고 깨물어 붉은 수를 놓았다.

    “내 힘은 걱정할 것 없으니까, 체력이나 열심히 보충해 놔.”

    세인은 돌아누워서 앞머리가 살짝 젖은 그를 빤히 보았다.

    “많이 아프면 말하고.”

    그걸 말했다간 조금 전의 그걸 다시금 하겠지?

    전에 욕실에서처럼 이한은 긴 시간 공들여 세인을 배려해 주었다.

    그게 못내 부끄러워서 버둥대고 말았다.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에요.”

    “난 더 배고파졌어. 어떨 땐 정세인을 내 배 속에 넣고 싶어.”

    사랑한단 말보다 더 뜨거운 고백이었다. 이편이 더 이한의 본심에 가까운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세인은 그를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약간 눈을 내리깔았다.

    이한에게 더는 숨길 게 없고, 더는 계산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 고백에 능숙해져서, 미치도록 떨리는 심장이 조금은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덜 부끄러운 사이가 되어서 그를 선뜻 만지고 마음껏 마주 볼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에게 녹아들다 보면 언젠간 이한의 배 속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레 하나가 되어 있겠지.

    남은 인생을 함께 걷는, 그런 부부가 되길 세인은 소망했다.

    “세인아, 얼른 자자.”

    이한의 목소리에서 숨기지 못한 정염이 묻어났다.

    ***

    금일 밤, 자선 단체의 껍데기를 씌운 부잣집 사모님들의 회동이 있었다.

    장소는 한동 자동차 그룹 부사장의 사가로, 서울의 한 주택이었다.

    모임의 주축은 거대한 기업체를 가진 부친이나 남편을 둔 여성, 혹은 한 기업의 주인인 여성들이었다.

    가장 먼저 초대장을 받은 미연은 오늘 회동에 참석하겠단 의사를 선뜻 밝혔다.

    참석자 명단에서 은희의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심은희. 그녀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미리 심어둔 정보망을 통해 들었다.

    남편 홍춘이 돌아서기 직전이며, 딸 혜인이 살인미수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고.

    그런 중에도 은희는 병원 출근을 거르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대단했다.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그렇게 아끼던 딸을 등한시하는 건 보통의 집념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

    그날, 세인이 서 회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싶어 알아보던 차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포착했다.

    서 회장은 변호사를 불러 세인의 친정에 관한 모든 사업을 정리하게 했다.

    그 기특한 아이가 제 친정과 연이라도 끊어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영리하면서도 순수한 아이였다.

    거멓게 죽어가던 이한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보물 같은 아이.

    미연은 세인이 상처받길 원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사랑하는 아들 이한을 위해서라도, 미연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또각또각.

    미연의 규칙적인 발소리는 은희의 휴게실로 향하고 있었다.

    회동 중 아무 때나 쉴 수 있도록 개인에게 휴게실을 내어준 건 미연의 입김이었다.

    미연은 손을 들어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조금 지친 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앉은 은희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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