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78화
둘째 날은 해변을 거닐고 주변을 산책했다. 때마다 식사하고 저녁에 가볍게 술까지 마시니 어느새 밤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흥을 즐기는 이 시간이 세인은 마음에 들었다.
또한 짙은 노을 뒤에, 쏟아질 듯 많은 별이 박힌 이곳의 하늘이 좋았다.
물론 가장 좋은 건 함께하는 이한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때 이한과 이런 한가로운 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단 막연한 생각까지 해보았다.
셋째 날 아침 식사 후 세인은 바쁜 이한을 두고 홀로 인공 잔디밭을 누볐다.
넓은 공터는 바위가 많은 해안가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루이!”
세인이 어느새 친해진 관리실 개를 부르며 입술로 쫑쫑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귀를 바짝 붙이곤 갈색 레트리버가 달려왔다.
개는 세인을 꽤 잘 따랐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목적으로 들였는데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고 정원 관리인이 말한 바 있었다.
“루이, 어딜 다녀오는 거야?”
세인이 고민하다가 한국말로 묻자, 루이가 컹 하고 짖더니 그녀의 손바닥을 핥고는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그 무게에 세인이 뒤로 넘어가자 루이가 촐싹대며 뺨이며 귀를 핥았다.
“간, 간지러워! 루이.”
세인이 웃으며 개를 밀어내려 했으나 잔뜩 신이 난 동물을 힘으로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루이, 비켜.”
조금 전, 미안한 얼굴로 업무 전화를 받으러 떠났던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한……!”
루이를 피하려 세인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를 부르자, 이한이 원반을 던져 루이를 유인했다.
“물어 와.”
컹! 루이가 귀를 바짝 붙이곤 잽싸게 어딘가로 사라지자, 세인은 그제야 자유로워졌다.
이한이 다가와 넘어진 세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그녀를 일으켰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물빛 원피스를 툭툭 털어주었다.
“자꾸 다른 데 입술 내어줄래?”
“뭐, 루이가 사람이에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너한테 닿는 건 나 하나면 돼.”
잘 닿지도 않으면서. 세인이 속으로 구시렁댔다.
이한은 눈물 나게도 자기 아내를 아주 잘 지켜주고 있었다. 세인이 생긋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역시나 눈치 빠른 이한은 거짓 웃음을 금방 눈치챘다. 하나 당신이 두 번 다시 스킨십을 하지 않아서 삐졌단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이한이 따라오며 말했다.
“혼자 지루하지? 처음 온 여행인데 미안해.”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잖아요. 난 천천히 즐기면 돼요.”
“나랑 있으면 더 즐거울 텐데.”
이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곧잘 했다.
“정말 괜찮으니까 급한 일부터 해요.”
여행 날짜를 비우기 위해 이한은 필시 무리했을 터다. 돌아간 뒤엔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이한의 업무가 조금이나마 물꼬를 틀 수 있다면 몇 시간쯤은 양보해도 좋았다.
어차피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과 함께 신혼여행을 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시원하고 좋아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맑아졌다.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않아도 됐다.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습관처럼 혜인의 식사 시간이나 세안 시간을 계산하고 검진일을 신경 썼겠지.
그러나 이곳에선 한국의 일이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세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한의 핸드폰 벨 소리를 듣곤 그의 등을 밀어냈다.
“그러지 말고 얼른 하고 와요. 할 일 먼저 하고 놀아야죠.”
“선생님 말투네.”
“가끔 이한 씨 아이 같아.”
“그래도 입술 내어주는 건 안 돼. 저 자식 수컷이거든.”
저 멀리서 달려오는 루이를 보며 이한이 엄중히 말했다. 세인이 웃자 그가 뺨에 키스한 뒤 리조트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인은 한동안 루이와 뒹굴었다. 시원한 셔벗을 먹고 나자 슬슬 땡볕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까지는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시원한 물속을 떠돌다가 식사를 하면 시간이 얼추 맞을 듯했다.
그때면 이한도 긴 통화를 마치고 식탁으로 올 것이다.
“루이 수영 잘하니?”
왈! 한국말을 알아듣는 걸까. 루이가 꼬리를 힘차게 저으며 대답했다.
세인은 수영장으로 향했다.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나가 봐도 좋단 말을 한 뒤 선베드 앞에서 원피스를 벗었다.
속에 받쳐 입은 쇼트 팬츠와 민소매 티셔츠가 드러났다.
남사스러운 수영복 차림으론 마음껏 수영하기 불편하단 사실을 깨달은 터라, 머리를 굴려 고안해 낸 차림새였다.
세인은 루이와 함께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바닥까지 헤엄쳐 잠영했다.
아, 시원하다. 조금 깊은 곳까지 팔을 이용해 수영했다.
앞서가는 루이의 뒷다리가 방정맞게 흔들리는 걸 보자 웃음이 터졌다.
물방울이 뽀글뽀글 시야를 가리는 순간이었다.
세인은 급격히 들이닥친 종아리 통증에 놀라 몸을 뒤집었다. 가득 머금은 숨이 꼬르륵, 한 번에 빠져나갔다.
고통을 호소하며 다리를 잡았다. 쥐가 나고 말았다.
수면 밖으로 빠져나가려 손을 사용했으나 밀려드는 통증에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발을 잡고 아래로 잡아당기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무력하게 허우적거렸다.
“읏……!”
수영장 밖에서 루이가 컹컹, 짖는 소리가 아연하게 들려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며 점차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혜인이 별장 수영장에 빠질 뻔한 사고 뒤로 수영을 배웠다.
이런 순간에도 떠오르는 걸 보면 세인의 삶에서 혜인을 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엉망인 세인마저 누군가가 사랑해 주고 아껴주고 있었다.
버텨야 해. 세인이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점점 점멸하는 시야 안으로 물보라가 일었다.
세인이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이한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빗발치고 있었다.
“정세인!”
콜록콜록. 쓴 기침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세인의 입에서 기침과 물이 함께 흘러나왔다.
“정세인! 세인아.”
혼이 쏙 빠지도록 기침을 한 뒤에야, 세인은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이한이 앉으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세인을 품에 넣었다.
“정세인, 너 진짜…….”
세인은 그의 팔에 기댄 채로 몇 번 더 기침을 쏟아냈다.
“하아…….”
“곧 의사가 올 거야.”
그러니 안심하라며 이한이 그녀의 팔을 쓸어주었다. 이한의 몸도 온통 젖어 있었다.
직접 구해 주었구나. 또 그가 와주었다.
세인이 눈썹을 구기자, 이한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파? 어디가 아픈 거야. 말 못 하겠으면 손으로 가리켜 봐.”
세인은 차마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놀라고 무서웠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이대로 이한을 못 볼까 봐…….
“놀랐…… 놀랐어요?”
“그걸 말이라고.”
원망이 밴 목소리가 세인을 뒤덮었다.
“나도, 나도…… 무서웠, 어…….”
이한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본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세인이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진짜 죽는 줄 알고…….”
만약 예전이었다면.
이한이 곁으로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세인은 그대로 가라앉는 방법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다리가 터질 듯 당기는데도 발버둥 칠 게 아니라, 차라리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지 몰랐다.
수영장에 물을 꽉꽉 채우곤 언제든지 뛰어들 사람처럼 살았던 지난날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세인이 말을 더듬으며 입술을 파르르 떨자 이한이 옆으로 손을 뻗어 담요를 받았다.
달려온 직원 중 하나가 그에게 담요를 건넨 것이다.
“이제 괜찮아. 내가 옆에 있는데 뭐가 두려워.”
세인을 꽁꽁 감싼 이한이 중얼거리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제야 세인은 자신을 감싼 커다란 몸까지 함께 떨리고 있단 걸 깨달았다.
“이한 씨…… 잠깐 얼굴 좀…….”
“너 좋아하는 잘난 얼굴 어디 안 갔어. 그러니까 이렇게 있어.”
놓칠세라, 누군가에게 빼앗길세라 꽉 끌어안고 있는 통에 세인은 슬슬 숨이 막혀왔다.
“그깟 전화가 뭐라고 너를 혼자 둬선.”
“……이한 씨가 구해 줬잖아요.”
그가 세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러다 압사하는 건 아닐까 생각할 때쯤, 40대로 보이는 의사가 머리칼 휘날리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자신을 메이린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몇 가지 질문을 하며, 이한에게 세인을 눕혀달라 요구했다.
“꼭 눕혀야 합니까. 이대로 진찰하죠.”
그러나 이한은 대항하듯 세인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우리 애가 많이 놀라서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미스터. 진료하게 협조해 주세요.”
메이린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세인은 슬슬 낯이 뜨거워졌다.
“이한 씨. 이러면 아무것도 못 해요. 나 괜찮은지 안 볼 거예요?”
“……그럼 여기 말고 편한 곳에 누워.”
이한은 세인을 침실로 옮긴 뒤에야 약간의 거리를 허락했다.
침대에 고이 누운 세인은 손을 꽉 쥐고선 초조하게 메이린의 진단을 기다리는 이한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던 이한이 이렇게까지 쫓기는 모습은 처음 봤다.
죽을 뻔했으니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그동안은 몰랐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이상했다.
속도 없이 조금 설렜다.
메이린은 현재 세인에게 문제가 없으니 이상 증상이 있으면 곧장 호출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세인이 듣기엔 이만 안심해도 좋다는 뜻 같았다.
“봐요, 괜찮을 거라고 했죠?”
그러나 이한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를 둔 남편처럼 여전히 심각했다.
“입술 퍼렇게 질려선 누굴 안심시키려는 걸까.”
이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전신이 모두 젖어 있단 걸 다시 확인한 세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