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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7화 (77/95)
  • 두 번째 신혼 77화

    세인과 이한은 몇 시간의 비행 끝에 따뜻한 나라의 작은 섬에 도착했다.

    마지막에 헬리콥터로 이동하는 건 조금 힘들었으나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작은 섬을 보자 피곤함이 단번에 씻겼다.

    “와…….”

    세인은 거대한 성처럼 덩치가 큰 리조트를 입 떡 벌리고 구경했다. 그사이, 이한이 리조트 관리인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가벼운 린넨 셔츠에 얇은 팬츠 차림으로, 평소보단 힘을 뺀 모습이었다.

    뭘 입어도 자연스러운 이한은 세인의 심장을 가만두지 않았다.

    누가 잘생긴 게 최고라던데, 정말 그 말이 맞지 않을까 싶은 요즘이었다.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이한이 웃으며 물었다.

    “마음에 드는 데가 정확하게 어디야.”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여기 꽤 유명한 관광지인가 봐요. 규모가 크네요.”

    그런 것치곤 관리인을 제외한 다른 손님이 없어 이상했지만, 세인은 곳곳에서 느껴지는 고급스러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할아버지가 레저에 관심이 많으셔.”

    “그래서 바로 예약하고 올 수 있던 건가 봐요.”

    세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한이라면 이곳저곳 많이 다녀봤겠지.

    혜인을 수발하느라 해외는 난생처음인 세인과 다르게 그가 보고 들은 세상은 한없이 클 것이다.

    그런 이한이 부럽다기보단 대단하게 보였다. 든든하기도 해서 평생 기대어 따라가도 좋을 것 같았다.

    타인의 친절이 불편한 독립적인 성격의 세인으로서는 굉장한 변화였다.

    “뭐부터 할까. 식사는 조금 전에 했으니까 한숨 자도 좋고.”

    “여기까지 와서 자면 안 되죠. 수영할래요.”

    “그럼 객실부터 고를까.”

    “예약한 거 아니었어요?”

    “네가 쉬고 싶은 방으로 골라 봐. 아니면 하루하루 객실을 바꿔도 좋고.”

    일주일 여정의 여행이었다. 매일 객실을 바꿔 자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리 없었다.

    이런 초호화 리조트라면 예약이 꽉꽉 차 있을 터였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될까요?”

    “여기서 정세인 마음대로 안 되는 건 없어.”

    이한이 소년처럼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세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한 가지 추측이 고갤 내밀었다.

    “혹시 여길 전부 빌리고 그런 건 아니죠?”

    재벌의 돈지랄을 결혼식에서 겪어본지라 세인은 두려움을 품고 물었다.

    그러자 이한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피식 웃었다.

    “맞아. 이 섬에 손님은 우리뿐이야.”

    “…….”

    세인은 하얗게 질려 침을 꼴깍 삼켰다. 리조트가 아니라 섬 전체를 빌린 건가?

    믿고 싶지 않아서 세인은 못 들은 척하려고 했다.

    “와, 저 나무 엄청 크다.”

    “이 섬이 서 회장 명의거든.”

    “…….”

    섬 하나 정도는 마트 쇼핑하듯이 턱턱 살 수 있는 거물을 독대한 바 있는 세인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 잠시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여기가 마음에 들면 근방에 비슷한 섬이 있는데, 원한다면…….”

    “가죠. 얼른 가요. 2층이 좋겠어요.”

    세인이 싱긋 웃으며 앞섰다.

    준비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몸만 가면 된다던 이한의 말처럼, 세인이 갈아입을 옷부터 필요한 물품이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객실을 고르고 다시금 밖으로 향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향한 탈의실엔 각양각색의 수영복이 가득했다.

    세인의 고뇌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수영복이 어째 전부 파격적이고 과감한 것뿐이었다.

    끈과 레이스로만 이뤄진 것 같은 비키니, 등이 홀딱 파여 비키니보다 더 야해 보이는 원피스 수영복, 엉덩이에 낄 것 같은 손가락만 한 하의.

    대체 이럴 거면 수영복을 왜 입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홀딱 벗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더블나인에서 수영장 파티를 열었을 때 보았던 비키니를 견주어 보면, 이쪽이 훨씬 더 원색적이었다.

    “탈의를 도와드릴까요?”

    여성 헬퍼가 다가와 묻기에 세인이 손사래를 쳤다. 모르는 여성 앞에서 자연인이 되는 수모는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 충분히 겪었다.

    세인은 옷걸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다른 수영복은 없나요?”

    “준비한 수영복이 마음에 차지 않으시나요?”

    “노출이 덜한 걸 찾고 있어요.”

    “신혼여행이라고 하셔서 고심해서 준비했는데, 죄송합니다.”

    헬퍼가 진심 어린 자세로 고개 숙이자, 세인은 미안해져서 다시금 손을 휘휘 저었다.

    얼마 전까지 지배인 생활을 하던 세인이니, 면목 없는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수영복은 혼자 입을 테니 나가셔도 좋아요.”

    세인이 마다하자 헬퍼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세인은 신중하게 옷걸이를 젖혀 그나마 평범한 수영복을 찾아냈다.

    목 뒤로 매듭을 짓는 상의와 양쪽 골반에 매듭이 달린 하의. 개중엔 가장 튀지 않는 디자인이라 위로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도 너무 과한 것 같긴 한데…….”

    거울에 비친 수영복을 바라보던 세인은 노크 소리에 놀라 비치가운을 걸쳐 입었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문을 열자, 탈의실 밖에 선 이한이 느긋하게 물어왔다.

    “난 또, 잠든 줄 알았잖아.”

    “안 잘 거예요.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녀가 의욕 만만한 모습을 보이자 이한의 다갈색 눈동자가 세인의 비치가운을 슬쩍 훑어 내렸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세인의 손을 잡고선 걷기 시작했다.

    약간 앞서 걷는 이한은 수영복 반바지만 걸친 채였다. 오늘을 위해 몸을 가꿨나 싶을 만큼 결점 없는 몸매가 눈앞에서 어른대자 왠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세인은 흘긋 제 아래를 내려다보곤 비치가운을 잘 여몄다.

    복도를 거닐면서도 시원한 해안가를 엿볼 수 있었다. 벽은 없고 기둥만 세워진 뚫린 공간으로 따뜻한 바람까지 불어 휴양지에 온 걸 실감케 했다.

    세인의 눈이 어디에 있는지 본 이한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수영장에서 놀고, 바다는 내일 가지.”

    “좋아요.”

    너무 아이처럼 좋아한 것 같아 세인은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준비된 수영장은 두 사람이 놀기에 지나치게 넓어서 세인은 다시 한번 놀랐다.

    선베드에 다다르자 이한이 그녀를 끌어 자리에 앉혔다.

    “누워. 선 오일부터 발라야지.”

    “선 오일이요?”

    “새까맣게 타길 원해?”

    그가 약간 머뭇대는 세인을 의아하게 보았다. 주춤대던 세인이 주변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고 결심한 듯 비치가운을 벗었다.

    세인의 속살을 본 이한의 눈가가 좁아졌다. 와락 눈썹을 구기는 것도 같았다.

    “너…….”

    “나도 이상한 거 알아요. 근데 수영복이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이한 씨가 지시한 거 아니에요?”

    민망함을 그의 탓으로 돌린 세인이 잽싸게 선베드에 누웠다.

    욕실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세인은 약간 위축되어 있었다.

    애정은 넘치도록 느껴지는데 이한은 어느 선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틈만 나면 달려들려던 때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속상했다.

    “우리 세인이 왜 도끼눈이 됐어?”

    “원래 찢어진 편이에요.”

    “그런 걸 섹시하다고 하지.”

    섹시하면 왜 안 건드는데!

    세인은 차마 입 밖으로 속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팔을 교차해 가슴에 얹었다.

    이러니 좀 낫다. 세인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자, 이한이 머리를 성마르게 쓸어 넘겼다.

    “오일만 바르는 거야. 오일만.”

    혼자 중얼거린 이한이 손바닥에 오일을 듬뿍 짰다. 이한의 손길이 닿자 몸이 절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인은 어느새 노곤해져 버렸다.

    긴 비행으로 근육이 뭉쳤던지, 이한이 살살 주무르는 감각이 기분 좋았던 터다. 잠까지 솔솔 왔다.

    그의 손가락이 비키니 라인 근처를 배회할 땐 눈이 번쩍 떠졌지만.

    “엎드릴까.”

    세인이 등을 보이며 엎드린 후, 이한의 한숨이 날갯죽지에 닿았다.

    “바르는 거 힘들어요?”

    어째 이한에게서 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이한도 장시간 비행에 지쳤을 텐데 너무 그에게 받기만 한 것 같았다.

    세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가 해줄게요.”

    그러자 이한이 오일을 옆으로 치우며 빙긋 웃었다.

    “난 잘 안 타는 체질이야.”

    “그래도 바르는 게 낫지 않아요?”

    휴양지의 햇빛은 따가운 편이었다. 자칫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단 걸 이한이 모를 리 없었다.

    “얼른 줘요. 응?”

    순간 이한이 벌떡 일어나며 세인을 어깨에 둘렀다. 비명을 지르는 세인을 둘러멘 그가 큰 보폭으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러곤 그가 풍덩, 시원하게 입수했다.

    거꾸로 매달린 채 소리를 지르던 세인은 들이닥치듯 쏟아지는 물속에서 숨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게 푹 잠겼다가 떠올랐다. 다행히 이한이 끝까지 세인을 놓지 않고 그녀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잡아주었다.

    “괜찮은 거지?”

    “푸흡, 병 주고 약 주고!”

    “어, 다 내가 줘야지.”

    “이상한 고집 있는 거 알죠?”

    세인이 얼굴을 닦으며 따졌다. 이한이 볼우물을 보이며 웃는 게 또 예뻤다.

    세인이 수면을 때려 이한에게로 물을 튀겼다. 이한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소리 내 웃자, 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문득 세인은 더블나인 수영장에 그와 함께 빠졌던 일이 기억났다.

    그땐 갑자기 찾아온 이한이 멋대로 따라 들어온 거지만, 지금은 함께 즐기고 있었다.

    이 순간이 소중하고 또 행복했다.

    세인은 물속을 헤쳐 다가가 이한의 발 위에 제 발을 올렸다. 그리고 이한의 목에 팔을 감아 몸을 밀착시켰다.

    “수영장에선 수영을 해야지. 우리 세인이 건전하질 못하네.”

    “싫어요?”

    “입 찢어진 거 안 보여?”

    키스해 줄까 싶어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았으나, 이한은 어째 요지부동이었다.

    말만 좋아하는 거야. 정말 이제 별로인 걸까.

    조금 시무룩해져 세인은 그에게서 멀어지며 물 위로 누웠다. 둥둥 떠다니다가 이한이 다가와서 헤엄쳐 멀어졌다.

    이한과 경주하듯 수영을 하다 보니 힘이 죽 빠졌다. 이한이 끌어주는 보트를 타고 유영하다가 저녁이 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는 현지 식자재로 만들어진 이국 음식이었으나 세인의 입에도 잘 맞았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맛이 좋았다.

    해가 저물고 잠들기 전, 이한은 핸드폰을 가지고 테라스로 향했다. 세인은 침대에 누워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이겨내려 애썼다.

    피곤한 일정에 세인은 녹초가 된 후였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도 업무 전화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한을 보자니 혼자 편히 잠들기 미안해졌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었다.

    나쁜 생각은 조금도 할 겨를이 없었다.

    아름다운 해변과 그보다 더 눈부신 남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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