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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6화 (76/95)
  • 두 번째 신혼 76화

    세인은 홍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곁에 앉은 이한이 그녀의 등받이를 조절해 주었다.

    “서 전무 보기에 민망합니다. 집안이 시끄러워서, 원.”

    홍춘이 혀를 차며 말하자, 이한이 세인의 겉옷을 받아 걸며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식사는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홍춘이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이한이 술병 주둥이를 그 앞으로 내밀었다.

    “일단 한잔하시죠.”

    “그럽시다.”

    홍춘도 마다하지 않고 가득 찬 술잔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빈 술잔을 내려놓은 홍춘은 이한에게 술잔을 건네는 대신, 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인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홍춘이 먼저 보자고 했을 때, 그에게 할 말이 있단 걸 알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노고를 위로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세인이 어색하게 미소를 만들어냈다. 생전 듣지 못했던 말을 하는 홍춘이 의아할 뿐이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홍춘의 입에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말이 연이어 흘러나오자, 세인은 부쩍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눈 뜬 봉사처럼 살았어. 이렇게 하는 게 가정의 평화를 위한 건 줄 알았지.”

    말을 마친 홍춘이 이한을 흘긋 바라보았다. 말을 계속해도 되겠냐는 의미였다.

    침묵하는 이한에게서 무언의 동의를 얻은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딸자식들을 잘못 키웠다. 내 실수야, 내 실수다.”

    홍춘의 수심이 깊어 보였다. 따로 자리까지 마련해 이런 얘기를 꺼낸다는 건 홍춘에게도 이번 일이 복잡하단 뜻이겠지.

    혹시 혜인의 일을 알게 된 걸까.

    언제 알아도 알았을 일이었다. 홍춘이 지금에야 눈치챈 게 더 이상했다.

    “혹시 언니 일 때문에 이러세요?”

    “그래, 너라도 애비한테 말했어야지. 혜인이가 짐승만도 못한 짓을 벌이고 있단 걸 알았으면, 말을 했어야지!”

    분에 겨운지 홍춘이 스스로 술을 따라 한 잔 더 넘겼다.

    착잡함이 얼룩진 홍춘이 세인은 낯설었다. 누군가에게 비굴할지언정 패자의 얼굴은 하지 않던 부친이었다.

    홍춘의 솔직함을 마주한 그녀는 속마음을 조금 흘려보냈다.

    “……혼란스러웠어요. 제 머릿속을 정돈하느라 아버지 생각은 못 했고요.”

    “그래, 안다. 언니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 게 몇 년인데. 어찌 널 비난하겠냐.”

    홍춘은 세인의 고민을 공감해 주고 있었다. 세인은 이때다 싶어 하고 싶던 말을 꺼내었다.

    “저…… 아버지, 그 일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그 일?”

    세인이 마음을 가다듬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언니의 출생과 장애에 대한 이야기, 전부 알게 됐어요.”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말끝이 떨려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방조한 홍춘 또한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의 눈을 똑바로 보기 어려웠다.

    세인에게 아버지란 한없이 멀고 어려운 이였다. 그래서 홍춘에게 기대어 이 고난을 헤쳐 나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 혹시 서 전무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이 식어가고 있었으나 젓가락을 들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건 홍춘도 마찬가지였다.

    “심 원장 뜻이었어. 알잖냐. 이 못난 애비가 네 엄마한테 약한 거.”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시는구나.

    세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는 엄마와 언니를 안 보려고 해요.”

    “뭐?”

    홍춘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가 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뭐, 뭘 한다고?”

    예상했던 바이기에 세인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도저히 두 사람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버지한테 이해해 달란 말 안 해요. 하지만 제 뜻은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자리에 나온 거예요.”

    “……허.”

    실소를 흘린 홍춘이 말없이 술잔을 꺾었다. 그로서도 세인에게 이 이상 희생을 강요할 수 없었던 건지 입술만 달싹이다 말았다.

    “그리고 서 회장님께 저희 집안과 연을 끊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자랑스럽지 않은 가족, 이한 씨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정세인!”

    홍춘은 세인이 모녀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을 했다.

    홍춘이 처음으로 미안하단 말을 하기에 조금은 기대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곧바로 깨졌다.

    홍춘은 언제나 그랬듯 방임을 가장하고서 세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서 회장과의 관계를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한다고.

    “소리, 지르지 마세요. 아버지.”

    자신을 이토록 소중히 아껴주는 이한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멸시를 당하면 그건 이한을 기만하는 짓이었다.

    세인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을 참지 않기로 다짐한 후였다.

    더불어 이한과 그 가족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맞설 생각이었다.

    “너,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홍춘이 쾅,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가진 것도 없이 이한 씨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게 염치없단 건 알아요. 하지만 최악은 면하고 싶어요.”

    세인에게 가족의 굴레가 최악이란 소리였다. 홍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세인은 잠시 이한을 바라보았다. 덕수와 나눈 대화는 아직 이한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마 그라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이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했는데 그가 옅게 웃었다. 더불어 아까부터 테이블 아래로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더 가했다.

    마치 그가 함께 있으니 할 말을 다 하란 뜻 같아서, 세인은 남은 말을 털어냈다.

    “아버지는 엄마와 언니에게 도리를 지켜주세요. 저한테 가족은 이한 씨면 충분하니까요.”

    “……지금 이 애비더러 제문과의 연을 포기하란 소리냐?”

    홍춘이 미련스레 되물었다.

    부친이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세인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보통의 집념과 실력으론 되지 않았겠지.

    세이지오 금융자산이 몸집을 부풀린 데는 분명 제문의 도움이 있었다.

    앞으로도 제문을 발판 삼아 도약하려 들 터였다.

    하지만 이한을 이용해 홍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결혼해선 안 됐던 걸지도 몰랐다.

    “아빠, 저는 이한 씨가 소중해요. 이 사람 앞에서 제가 더 작아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진심을 다해 부탁하듯 세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홍춘이 또다시 쾅, 테이블을 내려쳤다.

    이한에게 늘 조심스러운 모습만 보이더니, 홍춘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듯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떴다.

    “너 내 딸이야. 내 딸!”

    세인은 함묵했다. 더는 그와 말씨름할 이유도 기력도 남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마찰을 빚는구나.

    “얘기 끝난 것 같은데, 일어나겠습니다.”

    그런 세인을 잡아 일으킨 건 이한이었다.

    이한의 말대로 전할 말은 이게 끝이었기에 세인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서 전무! 서 전무가 좀 말려 보세요!”

    “세인이에게 허울뿐인 가족이라도 필요할까 싶었는데, 마다할 건가 봅니다. 굳이 말려야 할 이유는 내게 없고.”

    이한의 말에 홍춘이 노골적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세인아, 옷.”

    세인은 그렇게 그늘이 짙게 드리운 홍춘을 뒤로하고, 이한과 손을 잡은 채로 큰 마당을 걸어 나왔다.

    “좀 걸을까. 이 뒤에 산책로가 있어.”

    세인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울렁거려 바로 차에 오르기엔 답답하던 차였다.

    이한의 손을 잡고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한정식집의 뒤편에 자리한 산책로는 빽빽한 수목을 품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손님이 단란하게 거닐 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은 세인의 기분과 다르게 아름다웠다.

    부서지듯 나뭇잎을 투과하는 햇살마저 눈부셨다. 세인은 섭섭할 만큼 세상이 어여쁘다 생각했다.

    나뭇잎을 구둣발로 밟으며 세인이 입을 열었다.

    “이한 씨도 나한테 말 안 한 거 많으니까 우리 이거로 퉁 쳐요.”

    “네 가족을 배제해 달라는 그런 부탁이라면, 나한테 했어야지.”

    생각보다 날 선 대꾸에 세인이 두 다리를 멈추었다.

    “앞으로 부탁을 하려거든 회장님이 아니라 나한테 해. 여기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줄 사람이 있는데 왜 그런 곳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

    이한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남색 슈트를 빼입은 근사한 남자의 뒤로 조금 전의 그 찬란한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한에게로만 눈이 갔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모은다고 해도 이 남자만 못하겠지.

    “이한 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어요.”

    “얼마나 더 매력 있고 싶어서 그래.”

    이한은 농담조로 말했으나, 세인은 진지했다.

    더는 이한에게 바닥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는 모른다.

    워낙 가진 게 많은 사람이고, 빈곤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니 아마 끝내 세인의 마음을 모를 수도 있었다.

    “떳떳해지고 싶었어요. 이제 정말 빈털터리라서 이한 씨에게 면목은 없지만, 더 이상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진 못하겠죠.”

    이한이 손을 뻗어 세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연인에게 하듯 조심스러웠으나 툭툭 가볍게 두드리는 감각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자상하기도 했다.

    눈물이 찔끔 차오르는 걸 세인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너 가진 것 많아.”

    “서이한이 내 거니까?”

    “그건 당연하고. 더블나인도 곧 네 소유가 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한이 의뭉스럽게 웃으며 세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금세 떼어냈으나 열기가 살갗에 박힌 듯 닿은 부위가 화끈해졌다.

    “정리되는 대로 줄게.”

    더블나인을 어떻게 준다는지 감도 안 왔다. 남편의 통 큰 결정에 세인이 헛숨을 내쉬다가 웃어버렸다.

    “웃으니까 좋네. 그럼 이제 신혼여행 갈까?”

    “갑자기?”

    “어. 내일 아침 비행기야.”

    세인은 대책 없는 이 남자 때문에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산들바람이 고뇌를 씻어가듯 세인의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얼른 백화점에 데려다줄래요? 준비할 게 많아요.”

    세인이 그의 커다란 손을 이끌었다. 이끌어주고, 따라가고, 앞서가며 뒤를 봐주고.

    세인은 이한과 그런 관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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