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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5화 (75/95)
  • 두 번째 신혼 75화

    홍춘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누가 듣든 말든, 제 할 말을 사납게 쏟아냈다.

    “세인이한테도 적당히 했어야지! 그 순한 애가 얼마나 시달렸으면 도망을 가. 도망을!”

    “여보, 조용히 말해도 되잖아요. 혜인이 지금 아픈 거 안 보여요?”

    보다 못한 은희가 나서서 그를 말리려 했다.

    “조용히 하긴 뭘! 동네방네 소문을 내야지! 그래야 저 미친 것이 정신을 차리지!”

    미친 것이라니…….

    “아빠, 어떻게…….”

    혜인은 파들파들 손가락을 떨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홍춘이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혜인이 느끼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혜인이 해달라는 걸 단 한 번도 마다한 적 없던 부친이기에 충격이 컸다.

    “다시는 그치 만날 생각 마라! 그쪽 여자 목숨까지 간당간당한 거 겨우 무마시키고 온 참이니까.”

    “우연주 살았어요?”

    “그거 말이라고 해!”

    “그럼 제일 씨는요?”

    왜 아직도 안 오는지, 정말 그 남자가 자신을 배신한 건지 혜인은 알아야 했다.

    “그치는 제 부인 옆에 딱 붙어서 눈물 뽑고 있더군!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마라. 다시 한번 그런다면 그땐 어디 멀리 보내 버릴 줄 알아.”

    “아빠!”

    혜인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홍춘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가볼래요. 제가 직접 봐야 해요.”

    “가긴 어딜 가!”

    아니야. 그래도 제일과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이렇게 무 자르듯 단절 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 여자가 많이 다쳤으니까 일단 그곳에 있는 거야.

    착한 사람이니까. 마음 떠난 아내를 함부로 내치지 못하는 거다.

    홍춘이 혀를 차며, 뒤따라 들어온 수하에게 말했다.

    “얘 확실히 감시해.”

    “알았으니 그만해요. 이러다 혜인이 또 쓰러져요.”

    “제대로 안 하면 당신도 좋은 꼴 못 볼 거요. 쪽팔려도 유분수지. 서 회장님을 내가 어떻게 보겠어. 어?”

    홍춘이 은희조차 거칠게 대했다. 이상하게도 은희는 입술만 씹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의 집안 분위기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늘 은희 말이 우선이었고 홍춘은 자신의 아내를 떠받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혜인이 몸을 뒤척이며 내려달라 시위했다.

    “제발, 한 번만 만날게요! 그 사람한테 설명 들으면 돼요. 아빠, 저희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사랑하는…….”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거늘.”

    홍춘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은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내 새끼 눈에 피눈물 나는 거, 더 못 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결해.”

    한바탕 일어난 소란에 한쪽 구석에서 머뭇대고 있는 경찰 둘에게 홍춘이 따라오라 손짓하며 돌아섰다.

    홍춘을 불러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화내는 부친을 본 적이 없는지라, 혜인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일을 만나야 하는데. 오해일 텐데.

    아니, 정말 오해일까? 방금 확인 사살을 받은 게 아니고?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이 아프게 혜인을 쑤셔댔다.

    그래, 제일은 혜인을 이용했다.

    마음은 아니라고 하는데 머리가 그만 인정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혜인이 몸부림치며 발작했다. 그마저도 허리 아래론 자유롭지 않아서 겨우겨우 움직였다.

    “으아아아아! 아냐! 아냐!”

    의료진을 호출한 은희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치지 않게 해줘요. 재워도 좋고요.”

    다른 병실로 옮겨달란 은희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것 같다.

    혜인의 세상에 암전이 찾아들었다.

    ***

    이한과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신혼집으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다.

    계속해서 잠이 들면 악몽을 꾸기 일쑤였는데 오늘 세인은 웬일로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눈을 비빈 세인은 오늘도 텅 빈 침대 옆자리를 서운하게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호텔에서부터였다. 이한이 침대가 아닌 소파에서 잠이 들기 시작한 게.

    그의 말로는 업무를 보다가 세인이 깰까 싶어 소파에서 자는 거라고 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이런 날이 계속된다면 여분의 침실을 제대로 갖추는 게 나을 터였다. 그런데 세인은 차마 그러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한이 두 사람의 방을 하나로 합쳤을 때처럼, 세인도 그와 공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사소한 불편함보다 이한과 함께 하는 기쁨이 더 지배적이었으니까.

    그래서 이한이 따로 잠드는 건 내심 섭섭했다.

    세인이 거실로 나가자, 역시나 이한이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자요?”

    세인이 아주 조그맣게 물었다. 불면증을 앓는 이한인지라, 만약 잠들었다면 깨우지 않는 편이 좋았다.

    다행히 이한은 꿈속인 듯싶었다. 미동도 없이 고른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세인은 조심스레 다가가 소파 아래 쭈그려 앉았다.

    잘생긴 얼굴은 이렇게 한참을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예뻤다. 이제 그만 보고 일어나야지.

    세인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도둑 뽀뽀라도 해야지.”

    자욱하게 깔린 아침 햇살 사이로 이한의 음성이 나른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가 눈을 떴다.

    다갈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잠기운이 어려 있었으나 깊게 잠들었던 것은 아닌 듯 눈동자에 이채가 살아 있었다.

    이한이 푹 잠들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세인이 서둘러 물었다.

    “나 때문에 깼어요?”

    “정세인 덕에 조금이라도 자는 거야.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말만 그러지, 매일 혼자 자잖아요.”

    이한이 쭈그려 앉은 세인을 일으켜 소파에 앉혀 두었다. 그러곤 그녀의 뺨에 쪽, 짧게 입을 맞췄다.

    벌떡 일어난 이한이 소파에서 멀어지며 기지개를 켰다. 순식간에 길쭉한 몸은 미련 없이 세인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어디 가요?”

    “욕실.”

    나 일어났는데, 더 안 보고?

    세인이 속마음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꿈질거렸다.

    묘하게 이한이 담백해진 것 같았다. 아닐까. 내가 너무 끈적한 것에 익숙해졌나.

    그것도 아니면 혹시 그날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그래, 그런 것 같았다.

    호텔에서 돌아온 뒤부터 이한의 스킨십이 줄어든 건 확실했다.

    그날 세인은 술인지 애정인지, 무언가 취해 있었다.

    은밀한 곳에 입 맞추는 이한을 밀어내지 못하고 고개를 젖혀 수증기가 가득 낀 천장을 마주했다.

    흐느끼듯 매달리고 나자, 몸이 축 늘어졌던 기억이 났다.

    몰염치하게도 전희 단계에서 그만 잠들고 만 것이다. 그게 실망이었다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한은 여전히 다정했다.

    내심 화가 났을지 몰라.

    이런 쪽의 일이 수월하게 진행된 적이 없어서 번거롭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만약 실망해서 더는 손대지 않는 거라면…….

    서러운 마음이 고여 세인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뭐 이런 거로 울고 그래.

    세인은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홍춘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

    서울 외곽의 한정식집 앞에서 세인을 태운 차가 멈췄다. 운전대에서 손을 뗀 이한이 부쩍 긴장한 얼굴의 세인에게 물었다.

    “같이 갈까.”

    “그래도 돼요? 회사 바쁘잖아요.”

    “혼자 보내면 어차피 일 못 해. 네 걱정만 할 게 뻔한데 좀 데려가 줘.”

    홍춘을 만나기로 한 자리인데, 세인은 아침부터 내내 긴장 상태였다.

    부친을 만나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건 역시나 평범하지 못했다.

    실은 홍춘이 은희처럼, 제 탓을 할까 봐 겁이 났다.

    이제 그만 혜인에게로 돌아오라고 할까 봐,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

    방임자에 가까웠던 홍춘에게나마 희망을 가진다면 미련한 일일까.

    복잡한 마음이지만 세인이 이 자리에 나온 건, 마무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더는 얼굴이 보고 싶지 않은 은희와 혜인을 대신해서 홍춘에게 말해야 했다.

    더는 가족의 연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고, 이제 그만하자고.

    하지만 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처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같이 가. 손잡아줄게.”

    “아버지랑 싸우는 거 아니고요?”

    이한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조금이라도 그녀를 탓하는 말은 한다면 이한은 웃는 얼굴로, 혹은 무표정하게 홍춘을 욕할 것이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

    “거짓말. 막 뒤에서 음흉하게 이것저것 다 했으면서.”

    세인은 아직도 그의 솔직하지 못했던 점과 꿍꿍이에 대해 토라진 듯 투덜댔다.

    “내가 음흉하게 뭘 했을까.”

    “뻔뻔해.”

    “그럼 뻔뻔하게 손 좀 잡아도 되나.”

    세인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제게 내준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이한은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터다.

    그래도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기댄다는 건 생각보다 염치없지 않았고, 폐를 끼치는 일도 아니었다.

    마음을 나누는 것이었고, 마음에 들인 이한의 영역을 더욱 넓히는 일이었다.

    “내가 할 말 다 할 때까진 화내지 않기로 약속해요.”

    “인내가 장점이라.”

    세인이 마음을 바꿀까 싶었는지 이한이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

    정말로 이한과 손을 잡고 예약된 룸으로 향했다.

    가는 길 곳곳에서 보이는 덩치 좋은 사내들이 홍춘의 수하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종종 낯익은 얼굴이 이한과 세인을 향해 인사했다.

    세인은 그게 조금 부끄러웠다. 양지에서 자라 황태자 소리를 듣는 이한에게 그녀의 배경은 흠에 가까웠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 없었다. 이제 모두 끊어낼 테니까.

    직원이 미닫이문을 노크하자, 홍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그러나 세인과 함께 들어오는 이한을 보곤 홍춘이 매우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서 전무님도 같이 오셨습니까.”

    “앉으십시오, 장인어른.”

    이한이 웃으며 그가 일어난 자리를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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