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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3화 (73/95)
  • 두 번째 신혼 73화

    그녀는 이한의 품에 묻었던 몸을 떼어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속이 안 좋아요.”

    볼우물을 보이던 이한의 표정이 약간 난감해졌다.

    “조금 참을 수 있나.”

    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한이 몸을 틀어 손부터 잡았다. 단단히 깍지를 낀 그가 한 손으로 계산을 마치고 세인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호텔로 갈 거예요?”

    “화장실은 함께 못 들어가니 호텔 방이 낫지. 영 참기 힘들면 말해.”

    “참기 힘들어지면 어쩌려고요?”

    가는 길에 토기가 쏠리면 이한이라고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으로라도 받아야지.”

    이한이 말하니 거짓말 같지 않았다. 세인은 눌러 담듯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약간 알딸딸하긴 하지만 고주망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빈속에 술을 마셔서 힘든 거지, 게워낼 만큼도 아니었고.

    세인은 굳이 해명하지 않고 얌전히 이한이 체크인하고 객실로 올라가는 걸 뒤따랐다.

    카드키를 스쳐 문을 열고 들어간 이한을 따라 몇 발자국 안으로 들어갔을까.

    “그래서 누굴 만나고 왔어.”

    “응?”

    “화장실보단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지 않나?”

    이한이 돌아서며 세인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경호원이 따라왔으니 오늘 하루 그녀의 행방이 어땠는지 그도 알 터였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그래, 너에 대한 건 줄줄이 꿰고 있어.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많아서 사소한 건 잘 모르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정세인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

    세인이 잠시 말문을 닫았다.

    혜인의 일을 그가 알고 있을 거란 확신이 불거졌다.

    혼자만 몰랐던 게 바보 같은 한편, 자신이 이한의 입장이라고 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을 거란 이성적인 생각이 뒤따랐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왜 말 안 했어요?”

    이한의 볼우물이 짙어졌다. 마치 그게 곤란하단 뜻처럼 보였다.

    반면 세인의 눈 끝이 뾰족해졌다.

    “왜 회장님이 보내서 떠난 거라고, 내가 부족해서 떠나야 했단 말은 안 한 거예요? 이유는 그게 다라며!”

    “뭐?”

    “내가…… 우리 집이 부족해서 이한 씨가 곤란했다면서요. 그래서 회장님 지시대로 혼자 떠난 거라고…… 다 들었어요.”

    “영감이 쓸데없는 말만 늘어놨네.”

    이한이 눈가를 찌푸리며 덕수를 폄하했다.

    “전부 말해 주기로 했으면서, 거짓말이나 하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해.”

    토로하듯 나온 이한의 말에 세인의 심장이 아프게 지끈댔다.

    “나쁜 건 난데, 빌어먹을 집안에 붙들린 내 죄인데. 어떻게 정세인을 탓하는 말을 할까.”

    “그래도, 나는…… 나는 몰랐잖아요.”

    그의 우려대로 만약 모든 걸 알고 이한을 보냈다면, 세인은 형벌을 받듯이 6년을 보냈을 거다.

    하지만 이한이 제게로 돌아온단 믿음으로 버텨냈겠지.

    서이한이라는 남자가 대가라면 뭐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모르고 6년을 원망했어요.”

    덕수는 제문의 수장이었다. 어렸던 이한은 그를 거스를 힘이 없었을 터였다.

    세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머나먼 타지로 내몰린 어린 그가 안쓰러웠다. 곁에서 힘을 줬어야 했는데…….

    세인의 울먹이는 얼굴을 그가 부드럽게 쓸었다.

    “시간을 되돌린 대도 내 결정은 같아. 정세인이 자신을 탓하는 걸 어떻게 두고 봐. 지금도 봐.”

    이한이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세인은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부족해서 내가 떠났단 말이나 하고 있잖아. 착해 빠진 정세인, 너 때문에 내가…….”

    이한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괴물이었다가 사람이었다가 하지.”

    흐윽, 세인이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바보. 세인에 한해서 착해 빠진 건 이한일지 몰랐다.

    이한은 어떻게 그 긴 세월을 돌아오겠단 일념 하나로 버틴 걸까.

    이한의 사랑을 얕잡아 보았던 건 아닐까. 그의 마음이 이렇게 넘치는데, 그간 세인은 무엇 하나 알지 못했다.

    자신을 이용하는 가족에 착취당하면서도 거짓 웃음을 쥐어짜기 바빴지, 이한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이제야 얻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 이미 답이 나왔다.

    이제라도 이한을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아무런 구애 없이, 누구의 참견도 없이 편하게.

    방해물이 있다면 이제 그걸 뛰어넘고 싶었다.

    오직 세인 하나만을 위해 달려온 서이한이란 남자에게 자신의 자유를 전부 주고 싶었다.

    “흐윽…….”

    “눈물 마를 날이 없네, 가슴 미어지게.”

    “서이한 때문이에요…… 흐윽.”

    세인이 서럽게 울자 이한이 찰나 이채 서린 눈빛을 했다.

    “널 아프게 한 사람 전부. 그게 누구든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어.”

    “흐윽…… 무서운 말 좀.”

    “네가 나를 돌게 해. 법도 도덕도 무시하고 금수처럼 굴어볼까.”

    살벌한 말과 달리 세인의 뺨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따스했다. 세인은 그의 손목을 잡아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이한의 체온이 좋아서, 그의 애정이 고마워서 잠시 뺨을 묻고 눈을 내리감았다.

    “영감탱이가 폭탄을 여러 개 던졌던데. 전주 다녀온 거, 정혜인 출생 때문인 거 맞나.”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이한은 혜인의 사정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정혜인 일은 모르길 바랐는데.”

    가만히 내려앉았던 세인의 눈꺼풀이 들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나도 귀국 후에 알았어.”

    이한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단 소리였다. 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보육원 원장님을 만나서 확인했어요.”

    “힘들었겠네.”

    이한이 커다란 손으로 세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아서 세인은 잠자코 있었다.

    “서 회장이 다른 말은 안 해? 모질거나 나쁘게 대한 말이 있다면 전부 털어놔.”

    “아뇨. 충격적인 말씀은 많이 하셨지만, 그런 건 없었어요.”

    이한이 미심쩍은 눈을 하고선 의심을 풀지 않았다.

    “감싸지 말고.”

    “왜 감싸겠어요. 이한 씨한테 솔직한 게 우선이에요.”

    솔직하지 못했던 이한을 은근히 저격하는 말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이한이 가슴이 흔들리도록 웃음을 쏟아냈다.

    세인을 안아 든 이한이 그대로 움직여 소파에 앉았다. 옆으로 안긴 채로 앉은 터라 자세가 편하진 않았다.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찾으려는 세인의 허리를 당긴 그가 마주 보도록 세인의 몸을 돌려 앉혔다.

    “나 봐.”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세인이 아연하게 바르작거리자, 그가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스커트 단을 살짝 젖혔다.

    덕분에 거동은 편해졌으나 이한과 더욱 바짝 밀착되었다.

    “하지 마?”

    고개를 젓는 세인의 젖은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려왔다.

    “차라리 거절을 해. 내가 자꾸 도 넘게 되잖아.”

    “싫은 거 아니에요.”

    세인이 꿍얼거리듯 말하자 이한이 속으로 앓았다.

    이한은 중간부터 세인의 뒤를 따랐다. 미연에게서 세인을 데려올 생각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세인이 계속해서 정해진 경로를 이탈한다는 건 심경의 변화가 있단 뜻이었다.

    당장에라도 덕수의 응접실로 쳐들어가 세인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세인을 쫓는 게 우선이었다.

    미연에게 메시지가 왔다. 세인을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온통 정세인 생각뿐인데.

    뒤를 밟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세인이 호텔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미연을 만나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세인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던 것을 직접 듣고 나자, 누그러뜨렸던 분노가 다시금 일었다.

    뒤늦게 바로 들어섰는데 그녀의 옆에 웬 떨거지가 붙어 있었다.

    마음으로는 그 새끼를 대여섯 번 죽였다. 그렇게 세인을 데리고 체크인 했다.

    휘청거리며 안겨 든 세인은 혼자서 설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거다. 길고 긴 하루였겠지.

    그런 그녀에게 휴식처가 되었으면 했다.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그녀에게 조금의 지지대가 될 수 있다면 이한은 그거로 됐다.

    그러니까 세인이 마음 아프게 울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세인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굴러다니는지, 전부 알고 싶은데.”

    “이제 가족들 얼굴을 못 볼 것 같아요.”

    “누군들 쉽겠어.”

    너만 약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다.

    실은 이한도 형이 죽은 뒤 가족들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 당시 세인을 만나 구원받았고, 그래서 이렇게 사람 구실을 하게 됐다.

    “그런데 그러면 도망가는 것 같잖아요.”

    이한은 천천히 세인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도망가는 게 나쁜가.”

    “…….”

    “널 위협하는 모든 게 나쁜 거야. 마음 편히 도망가. 그리고 내 뒤에 숨어. 평생 안전할 테니까.”

    이한은 정말 자신 있게 그녀를 지킬 수 있었다.

    지난 6년은 아마 세인을 지킬 힘을 기르기 위한 시간이었을 거다.

    오로지 세인을 보고 달리던 순간은 창살처럼 이한을 가두었으나 또한 그를 단련시켰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내가 또 빌어야 할까?”

    “원망도 할 수 없게,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나를,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요. 세인은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또 한 번 흐느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정세인이지.”

    이한의 음성이 고요한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세인은 아마 바로 극복하지 못할 터다. 마음이 약한 여자니까.

    상실감과 배신감은 세인의 삶에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힘들게 할지 몰랐다.

    그럴 때마다 이한은 세인을 다잡아줘야 했다. 여기 내가 있으니 너는 무너져도 된다고.

    강하지 않아도 정세인이니까 내가 사랑하겠다고,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었다.

    “씻고 올래요.”

    “너 제대로 서지도 못해.”

    “그럼 같이 씻을까요?”

    이한은 이런 순간에도 짐승처럼 반응했다. 가끔은 뇌가 거기에 붙었나 싶을 만큼 예민하게 열이 올랐다.

    한 번도 육체관계를 가져본 적 없으면서 세인이 주는 향락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발광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신체 건장한 남자가 수절한 건 오로지 세인 덕이었다.

    “그냥 같이 씻어요.”

    “대담해졌네.”

    “전에도 그렇고 어차피 내 몸 다 본 것 같던데?”

    “난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야, 세인아.”

    이한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부드럽게 찔러 넣었다. 그러곤 조심스레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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