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72화
세인은 서울로 올라가는 미연의 차 안이었다. 차창을 바라본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혜인이 실은 입양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혜인의 장애에 대한 진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던 듯했다.
우습고 또 멍청했다.
충명원에서 나온 세인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넌지시 미연을 떠보았다.
‘혹시 저희 언니에 대해 잘 아세요?’
‘세인아, 회장님께 무슨 소리를 들은 거니?’
씁쓸하게도 미연 또한 혜인의 사연에 대해 자세히 꿰고 있었다.
세인은 염치 불고하고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미연이 어려움 없이 혜인을 담당했던 보육원 원장을 만나게 해주었다.
지방의 한 가정집에 머무는 60대 중반의 여성은 한때 보육원 원장직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혜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약 30년 전, 미혼모 여성이 병원도 아닌 집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뒤늦게 아이는 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제야 시설의 도움을 받았으나 미혼모는 아픈 아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서 떠났다.
그렇게 원장이 혜인을 돌보게 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종종 봉사 활동을 오던 의사가 혜인의 입양을 결정했다고 했다.
그녀는 늘 아픈 혜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결국 그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의사의 이름은 심은희.
세인은 아릿한 숨을 넘기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 이제 인정해야지.
두 눈으로 보고도 인정 못 할 만큼 미련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지난 세월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없었다.
혜인의 장애가 세인의 잘못이 아니었단 진실은 또 다른 칼날처럼 그녀를 할퀴고 있었다.
은희는 진실을 숨겨 혜인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애꿎은 세인을 궁지로 몰아넣은 방식엔 문제가 많았다.
세인은 생각할수록 은희가 이해되질 않았다.
만약 나도 두 아이가 있는 엄마였다면, 은희처럼 행동했을까.
차창에 부딪혀 반짝이는 헤드라이트가 어느덧 깊어진 밤을 실감케 했다.
세인은 여전히 미연의 차를 얻어 타고 이동 중이란 걸 기억해 내고 풀로 붙인 것처럼 닫혔던 입술을 떼었다.
“어머니.”
한층 잠겨 버린 목소리에 조용히 태블릿을 살피던 미연의 고개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미연은 아까부터 세인을 재촉하지도, 다른 말로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 고마움을 알아서라도 세인은 이 고통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이제야 말할 기운이 좀 나는 거니?”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애는 원래 심려 끼치는 거야.”
세인이 쓰게 웃었다. 은희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기에 그녀의 말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다만 위로가 되었다.
“만약에 저희 엄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지, 여쭈어도 될까요.”
“글쎄.”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미연이 고뇌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미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가 질문을 돌려보냈다.
“혹시 심 원장을 이해하고 싶은 거니?”
“엄마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알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옅게 한숨 쉰 미연이 고개를 비딱하게 틀었다.
“이해되지 않는 게 당연하잖니. 제대로 된 부모라면 이와 같은 상황은 만들지 않았을 거야.”
그럼 자신은 비정상이 아닌 걸까.
은희가 더 미워지는 지금을 다행으로 여겨도 될지 세인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내 딸이라면 이런 고민은 안 시킬 것 같은데.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게 부모야.”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은희에게 받은 거라곤 허울뿐인 울타리밖에 없었다.
속절없이 동요하던 세인이 간신히 답했다.
“……그렇군요.”
“큰 상처를 안긴 부모를, 자식이 이해할 필요는 없단다.”
“하지만 부모님이잖아요.”
“자식 인생을 자기 것처럼 휘두르는 부모만큼, 독단적인 애정이 어디 있겠어.”
“…….”
“세인이는 이제라도 자기 인생을 얻은 거야. 힘들게 주어진 걸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구나.”
미연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진 세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얘기했다.
혜인의 인생을 귀하게만 여겨봤지, 세인은 자신의 시간을 소중하게 다루는 법을 잘 몰랐다.
그걸 알아가면 되는 걸까.
세인이 차츰 가까워지는 도심을 바라보며 미연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옴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미연에게로 계속해서 전화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의 비서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이 빗발치듯 전해질 때마다 세인은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말씀 감사해요.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집으로 갈 거니?”
“이 근처에서 내릴 수 있을까요? 저 호텔 방향에서요.”
세인이 제문 그룹 계열사 호텔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으음, 혼자 이동하는 건 안 될 것 같은데. 지금 세인이 상태도 걱정되고.”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었기에 세인은 일부러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바로 이한 씨한테 연락할게요.”
“그래, 그럼 그건 엄마가 할게.”
혹여나 세인이 혼자 있을까 걱정이었는지 이한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세인은 그것까진 막지 못하고 알았다고 대꾸했다.
차가 갓길에 정차했다. 호텔 입구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을 사양한 세인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미연을 돌아보았다.
망설이다가 툭, 마음을 내보였다.
“어머니께서 제 엄마였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어머. 이거 영광인데?”
“그러니까…… 이한 씨도 아마 좋을 거예요.”
이한이 가족과의 관계가 데면데면한 걸 알기에 위로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자 미연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놈의 자식은 됐고, 세인이가 이제라도 엄마 딸 할래?”
“……그래도 될까요?”
“그럼. 영광이라니까?”
농담 같은 말에 세인의 마음이 한결 비워졌다.
그래, 미연의 말이 옳았다.
지금 주어진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했다.
“들어가세요.”
세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차에서 내렸다. 시원한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그간 애썼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혼자 희생하는 사랑이었다.
보통의 부모란 자식에게 온전히 사랑을 쏟아붓는 존재란 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세인은 외사랑을 끝내고 이제 이한이란 울타리 안에서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녀는 호텔 지하에 자리한 바를 찾았다. 이런 기분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
오늘 하루 휘몰아치듯이 여러 얘길 들어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세인은 칵테일을 한 잔 주문하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미연이 전화를 넣었으니 이한은 곧 이리로 올 터였다.
세인을 따라온 경호원 여럿이 내부에 자리 잡은 게 보였다.
그 순간 세인의 옆자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회사원처럼 보이는 남자가 세인 앞의 바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혼자 오셨으면 옆에 앉아도 되죠?”
“죄송합니다. 일행이 있어요.”
세인은 인이 박인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호의를 거절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한 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인은 빠르게 칵테일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을 주문했다. 계속해서 남자가 이곳을 흘긋대는 게 느껴졌으나 괘념치 않았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해야 옳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혜인의 불륜을 지지해 줄 수 없듯이, 은희의 오랜 거짓말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인이 평생 우선해 온 가족이란 가치가 바닥에 곤두박질친 지 오래였다.
상종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들이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막연하게 그들이 참회하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참 억울했다.
세인이 다섯 번째 잔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의 남자가 재차 말을 걸어왔다.
“에이, 일행 없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같이 마셔요. 내가 살게.”
슬슬 술기운이 올라와 세인이 손등으로 뺨을 누르며 말했다.
“아뇨. 거절할게요.”
그녀는 다시금 칵테일 잔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의 술이 바다처럼 영롱했다.
바다를 헤엄치는 어류는 적어도 자유로울까. 걔네는 아무 생각이 없을까.
이한이랑 바다에 가고 싶다.
점점 취하는지 생각의 폭이 다양해졌다. 지치지도 않는지 옆자리의 남자가 불순물처럼 끼어들었다.
“그쪽이 너무 내 스타일이라서 그래요. 이런 미인 만나는 게 흔치도 않은데.”
작정하고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가 지치지 않고 추태를 부렸다.
세인이 결혼반지를 보이며 남자를 거절하려던 순간이었다.
“정세인.”
작지 않은 이한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세인은 그를 향해 몸을 돌리다가 높은 바 스툴에서 중심을 잃었다.
서둘러 테이블을 잡았으나 다리를 헛디딘 터라 몸이 휘청거렸다.
고개를 들자 이한이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한…….”
이한을 부르려던 세인은 뒤늦게 옆의 남자가 제 팔을 잡아주었단 걸 깨달았다. 원치 않은 친절에 서둘러 팔을 비틀어 남자의 호의를 밀어냈다.
“고맙습니다.”
“조심하세요. 힘들면 더 기대셔도 되는데.”
아직 이한을 발견하지 못한 남자가 쓸데없이 사족을 붙였다.
“우리 세인이가 그쪽한테 더 기댈 일은 없고. 정세인, 왜 거기에 몸 붙이고 서 있어.”
어느덧 세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한이 비딱하게 말했다. 세인은 알코올 때문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취했네.”
“넘어질 뻔해서 이분이…….”
“이분? 거절당한 줄도 모르고 추태 부리는 새끼한테 호칭이 과하네. 아무한테나 도움받지 말란 건 유치원 다닐 때 배우는 거고.
흐끅, 세인이 짧게 딸꾹질했다. 잘생긴 얼굴로 화내니 더 무섭게 느껴진 터다.
“차라리 그냥 넘어지는 쪽이 나았을 거야.”
그렇지 않냐며 이한이 웃었다.
화가 난 걸까? 세인은 몽롱한 술기운을 떨치려 고개를 젓다가 안 될 것 같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두 팔을 뻗어 쓰러지듯이 이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단단하고 넓은 품에 뛰어들자 비로소 머리가 가벼워졌다.
이한은 화낼 자격이 없었다.
이한에겐 비밀을 만든 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건 젖혀두고 싶었다. 지금은 사랑 먼저 하고 싶었다.
이한이 힘없이 몸을 내맡긴 세인을 추슬러 안았다.
“따뜻하고…… 향기 좋아.”
“얼마나 마셨는데.”
“아직 안 취했어요.”
“나 없는 데서 취하면 곤란하지.”
세인은 고개를 편히 돌려 뺨을 이한의 가슴에 기댔다. 그러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제 남편이에요.”
그에 세인이 묻지도 않은 말을 남자에게 전했다. 이한의 슈트를 꽉 잡고선 한 번 더.
“제 남편이에요.”
“누가 아니라고 했어?”
이한이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세인을 어루만졌다.
이제야 살 것 같아서 세인이 옅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