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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1화 (71/95)
  • 두 번째 신혼 71화

    이한의 긴 다리가 은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가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은희를 고압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잠시 얘기 좀 하시죠, 심 원장님.”

    “선약도 없이 방문할 줄은 몰랐네요. 미안하지만 바로 나가봐야 해요.”

    그러니 비켜 달란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물러나지 않았다.

    “인천에 있는 정혜인 일입니다.”

    인천이라 콕 짚어 얘기하는 이한의 말에 어떤 두려움을 느꼈을까. 입매를 굳힌 은희가 발을 돌려 이한을 등졌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며 그녀가 말했다.

    “들어가죠. 길게는 시간 못 내요.”

    “피차 바쁘니 본론만 나눕시다.”

    이한이 대꾸한 뒤 민성과 수하들에게 기다리란 눈짓을 하고 그녀 뒤를 따랐다.

    너른 정원은 잔디 대신 고른 땅으로 다져져 있었다. 대문부터 현관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경사가 없었다.

    혜인을 위한 배려일 터다.

    휠체어를 타고 산책할 수 있도록 조성된 앞마당을 보며, 이곳에 과연 세인을 위한 것도 있을지 잠시 생각했다.

    세인은 이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냈을까.

    세인의 손길이 닿은 곳은 어디인가.

    이한은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며 거실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섰다. 은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앉아요.”

    이한이 까딱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 앉았다. 소파는 널찍했지만, 이한이 앉는 것만으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등을 기댄 이한의 자세는 결코 예의 바르다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천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우아하고 고결한, 어쩌면 은희가 가장 좋아하는 품위를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은희는 이한을 경계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한이 그런 그녀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왜. 해코지라도 할 것 같습니까.”

    “세인이는 어디에 숨겼나요? 연락이라도 하게 해줘요.”

    뻔뻔하긴. 이한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났다.

    이런 사람을 부모로 두고 성장한 세인이 엇나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이한이었다면 진즉 가족과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을 터다.

    말살해 버리고 싶은 인간들이지만, 이런 가족이라도 세인에겐 중요했다.

    만약 자신이 이들에게 해를 가한다면 세인은 또 다른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그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혜인의 장애가 세인 때문이 아니란 사실 또한, 앞으로도 비밀로 끌어안을 생각이었다.

    가족들에게 평생 속았단 사실을 알게 된 세인이 얼마나 상처받을지, 얼마나 아플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혜인을 위해 살았으니 그 충격이 상당할 터다. 이한은 세인이 이보다 더 아프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진실을 숨기고 소리 없이 혜인을 떼어내려 한 것인데 안타깝게도 혜인은 경고를 무시했다.

    조용히 해결하려던 이한의 배려를 걷어찬 건 혜인이었다.

    그렇다면 좀 더 시끄럽게 굴어줘야지.

    이한은 지금쯤 제일의 아내, 연주를 맞닥뜨렸을 혜인을 그리며 입가를 쓸었다.

    이런.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 꼴을 직접 봐야 하는 건데.

    이한은 상념을 넣어두고 눈앞의 은희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이봐요, 서 전무. 세인이 어디 있냐고 내가 묻잖아요.”

    “우리 세인이는 잘 있습니다. 앞으론 포동포동 살도 찔 예정이고 건강해질 겁니다.”

    “뭐라고요?”

    기막힌 소릴 들었다는 듯 은희가 되물었다.

    “우리 세인이보단 정혜인 쪽을 신경 써야지 않나.”

    “혜인이가 인천에 있단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설마…… 우리 혜인이를 어떻게 할 건…… 아니겠죠?”

    “우리 세인이를 멋대로 납치하신 분이 뻔뻔하시게도.”

    “납치라니. 나는 내 딸을, 내 딸을 데려간 것뿐이에요.”

    찻잔을 쥔 은희의 손목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못 받게 한 채 별장에 처박은 게 그럼, 순수한 선의였습니까.”

    이한이 미소를 지운 채 물었다.

    세인이 갇혔던 별장은 시골에 위치했다. 비상 상황에서 의사를 부르기 쉽지 않았을 장소였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고 묻잖습니까.”

    다과를 내오던 도우미가 무섭게 묻는 이한을 흘긋 보곤 줄행랑을 쳤다.

    그만큼 이한의 적의는 선명했다. 은희도 그를 느꼈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이한이 세인을 감싸고 돌 줄은 몰랐던 터다.

    저를 보는 시선이 어떻든 이한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느긋하게 거실을 둘러보곤 2층으로 향하는 계단까지 눈여겨보았다.

    세인의 방은 어디일까. 당연한 궁금증이 따라붙었다.

    혜인을 살펴야 하니 개인 공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려나.

    이한은 신혼집에 세인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을 따로 만들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조금은 질투 나겠지만, 세인을 위한다면 그 또한 감수하리라.

    “서 전무, 지금 이러는 거 월권이에요. 남편이라고 해서 세인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걔 엄마예요.”

    아, 엄마. 이한의 고개가 비딱하게 기울었다.

    “세인이가 서 전무 이러는 거 알아요? 이렇게 서 전무 마음대로, 우리 딸을 속박할 순 없어요.”

    “세인이를 소유하려는 게 아니라, 자유를 찾아주려는 겁니다.”

    “뭐? 세인이가 자유롭지 않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그런 애가 혜인이를 버려두곤 코빼기도 안 비쳐요?

    “당신들이 뺏은 자유 때문에 우리 세인이가 많이 아픕니다. 그게 용서가 안 돼.”

    “서 전무!”

    계속되는 무례한 언행에 은희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한은 말을 더 섞어봐야 득 될 게 없단 걸 깨달았다. 붉게 칠한 은희의 입술이 가증스럽기만 했으니.

    미움이 쌓일수록 인내하기란 더 어렵겠지.

    세게 쥔 주먹을 푼 이한은 가져온 서류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제 뭔가요?”

    “스위스 최고급 요양원입니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만 이용 가능한 곳인지라 자리를 얻느라 이한도 꽤 애를 먹었다.

    “정혜인 씨가 예뻐서 드리는 건 아니고, 이래야 우리 세인이 마음이 편할 테니까. 떠나는 날은 보름 뒤입니다. 시간은 충분하리라 봅니다.”

    “우리…… 혜인이더러 이곳으로 들어가라는 건가요?”

    “중국 바닥보단 여러모로 나을 텐데.”

    치안이든, 시설이든, 의료진이든.

    그걸 모르지 않는지 서류를 넘기는 은희의 손길이 점차 신중해지는 게 보였다.

    은희도 불륜이 좋아서 눈감아주는 건 아닐 터. 혜인이 망가질까 싶어서 두고 보는 거겠지.

    “혜인이가 가지 않으려 할 거예요. 그리고 이 먼 데를 혼자 보낼 순 없어요.”

    “그거야 심 원장님이 원해서, 심 원장이 함께 가면 될 일 아닙니까.”

    “내가 함께 가란 소리예요?”

    당연하게 세인을 함께 보내고 싶단 욕망을 내비친 은희가 역겨웠다.

    이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호자로서 동생이 따라가는 것보단 부모 쪽이 자연스러운 그림 같은데.”

    이한이 말을 마친 뒤 커프스를 밀어 시계를 살폈다. 슬슬 세인이 있는 충명원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었다.

    “가더라도 여긴 세인이가 가야죠. 그렇지 않으면 혜인이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장애가 호전될 수 있습니다. 실제 기적처럼 완쾌한 케이스도 빈번하고. 그게 안 보입니까?”

    “하지만…… 난 내 일이 있잖아요. 내 손에 딸린 식구가 몇인 줄 알면 그렇게 말 못 할 거예요.”

    끝까지 이기적인 여자.

    자신의 커리어를 내려두고 딸의 뒷바라지는 할 수 없단 고집이 이한의 눈에 훤히 보였다.

    “그렇게 애틋하고 중요한 딸이면 직접 수발해야지. 우리 세인이 잘못도 아닌데, 우려먹는 게 도가 지나치지 않나.”

    “…….”

    “태어나면서부터 장애 판정받은 다리를 우리 세인이 탓으로 돌린 심보, 그 개 같은 죗값 내가 직접 돌려주기 전에 떠납시다.”

    은희의 입술이 공연히 열렸다가 닫히길 반복했다.

    이한은 무감한 시선으로 붉어졌다 파래지는 그녀의 낯을 주시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잡아뗄 거라곤 예상했지만, 연기가 형편없어서 모른 체하기 어렵겠습니다.”

    이한이 픽 웃자, 은희의 입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제문 하늘 아래 비밀은 없습니다. 이 바닥에 오래 머무신 분이 그걸 모르나.”

    은희는 혜인에 관한 서류를 여러 번 세탁했다. 이한도 원본을 찾느라 고생했으나 마음먹고 조사하고자 하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스위스 요양원 자리를 얻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서 전무, 혹시 이혼 얘기 나온 것 때문에 그래요? 우리 혜인이가 이혼하라고 해서, 이러는 거야?”

    “자기 죄책감을 해소하는 데 친딸을 이용하고도 부족한가. 심 원장님, 30년 전 잘못을 또 저지르고 있단 자각은 없습니까.”

    이한은 은희의 과거사까지 꿰뚫고 있었다.

    언니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세인을 몰아붙였을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한 후였다.

    “이 더러운 사실을 세인이가 알기 전에 떠나야 할 겁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

    본색을 드러내듯 은희가 쨍한 비명을 질렀다.

    “정혜인이 이 사실을 알아도 됩니까?”

    완연한 협박이었다.

    혜인 또한 자신의 장애에 대한 진실을 모른다.

    세인 때문에 다친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면, 그 충격이 상당하겠지.

    어쩌면 끝까지 뻔뻔할지도 모르겠으나 그 정도로 악마는 아닐 터다.

    그랬다면 이미 정혜인은 한국 바닥에 있지도 못했다.

    “떠, 떠나지 않으면 혜인이에게 말하기라도 하겠단 건가요?”

    “이해가 빨라서 좋습니다. 그럼 얘기된 거로 알죠.”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 단추를 여몄다.

    은희가 다급하게 이한을 부르는 순간 누군가 거실로 들어왔다.

    홍춘이었다.

    “이게 누굽니까! 서 전무.”

    이 상황을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한 홍춘은 반가운 얼굴로 이한을 맞이했다.

    이한은 그에게 고개를 까딱 숙이며 말했다.

    “두 분이 잘 얘기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청심환 하나 챙겨 드시죠.”

    여전히 어리둥절한 홍춘에게 눈웃음 지으며 이한이 그를 비켜 지나갔다.

    “앞으로 많은 걸 누릴 우리 세인이에게 콩가루 집안 따위가 필요하겠습니까.”

    스치듯 들려오는 이한의 목소리에 그제야 홍춘은 이한이 화가 났단 걸 감지했다.

    “부디 세인이에게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남아주시죠.”

    그리고 그게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은희 때문이라는 것도.

    문을 나서려던 이한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정혜인 쪽에서 곧 연락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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