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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0화 (70/95)
  • 두 번째 신혼 70화

    은희가 화장대 거울 안의 표정 없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혜인이었다.

    “준비는 다 했니?”

    -네, 엄마. 세인이는 찾았어요?

    “일단 먼저 중국으로 건너가 있어. 세인이는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혼자는 싫은데. 나 세인이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혜인이 짜증스레 투덜댔다. 간병인으론 혜인의 성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오냐오냐 키운 탓이지만, 그마저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세인의 위치를 수소문하고 있으나,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사람 찾는 일은 홍춘이 적임이지만, 혜인의 불륜 사실을 그에게 들켜선 안 됐다.

    노발대발할 게 뻔했다.

    홍춘은 유달리 불륜과 혼외 자식에 민감했다.

    홍춘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며, 홍춘이 아닌 내연녀와 사생아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준 터였다.

    그 때문에 홍춘은 다른 범죄엔 무디면서 이런 일엔 예민하게 반응했다.

    “공항으로 윤순 씨도 갈 거야. 현지 간병인보단 그게 편하잖니.”

    혜인의 오랜 간병인도 중국에 함께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족이 없는 간병인은 웃돈을 얹어주자 흔쾌히 짐 가방을 쌀 만큼 가까운 관계였다.

    -빨리 좀 해줘요. 응? 나 정말 세인이 없으니까 힘들어. 걔 서 전무랑 있는 거 맞죠?

    혜인은 세인이 행복한 걸 견디지 못했다. 그건 은희도 잘 알았다.

    하지만 혜인이 비뚤어진 건 온전히 아픈 다리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건강했으면 비뚠 마음 없이 곱게 자랐을 아이였다.

    그러니 더 보듬어줘야 했다.

    세인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넓게 먹고 제 언니를 좀 더 이해해야 했다.

    이한이 돌아온 이후부터였을까. 세인은 점점 혜인에게 소홀해졌고, 결국엔 혜인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한과의 결혼을 밀어붙이지 않았을 텐데.

    하긴, 홍춘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막긴 어려웠을 터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회사를 키워낸 남자였다. 홍춘을 생각하자, 수습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은희는 두통을 느끼고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이한은 크나큰 복병이었다. 무영과도 충돌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무영과 세인을 재혼시키면 좋을 거란 혜인의 생각엔 동의하는 바였는데…….

    무영이 이한을 꺾지 못했다. 은희도 이한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을 게 명명했다.

    이한이 세인에게 진심일 줄이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한이 세인에게 진지하단 걸 알지 못했다.

    은희도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이한은 세인을 온전히 소유하려 들고 있었다.

    다만 세인은 마음이 약한 아이였고, 혜인이 쓰러졌단 말이면 금세 돌아올 착한 딸이었다.

    혜인이 자살 소동이라도 일으켰다고 하면, 아마 세인도 버티지 못하겠지.

    “걱정하지 말고 준비나 하렴.”

    -엄마는요?

    “하던 일이 있어서 마무리해야 해. 먼저 중국으로 가 있어. 세인이 데리고 곧 뒤따라갈게.”

    -네.

    어쩌다 유부남에 눈이 뒤집혀선.

    은희는 한숨 쉬며 통화를 끊었다.

    대문을 나선 그녀가 준비된 차량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낯익은 남자가 은희의 시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디 가십니까.”

    서이한이었다. 은희에게 눈짓한 그가 미소 지었다.

    “여기가 제주도는 아니고. 우리 세인이 찾으러 갑니까.”

    등줄기가 당길 만큼 선득한 표정이었다.

    ***

    은희와 통화를 마친 혜인은 물소리가 나는 욕실을 보며 휠체어를 움직였다.

    비행기 시간까지 넉넉하지 않았다.

    잔짐을 좀 더 챙겨야 하는데, 이제야 씻으러 들어간 제일은 급할 필요가 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짐을 혜인이 손수 정리할 순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기만 했다.

    혼자만 마음이 급한 것 같아서 서운하기도 했다.

    똑똑똑.

    그때 호텔 문을 누군가 노크했다. 직원인가?

    짐을 내려주려고 온 것 같은데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에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똑똑똑.

    “잠시 뒤에 와주세요.”

    혜인이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똑똑똑.

    그러나 아까보다 더 간격이 좁아진 노크 소리는 물러가겠단 신호가 아니었다.

    똑똑똑똑똑.

    혜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누구지? 방을 잘못 찾은 건가?

    “혹시 세인이니?”

    똑똑똑똑똑.

    문밖의 상대는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노크하며 혜인을 위협하듯 대답했다.

    “누구세요?”

    “왜 그래?”

    씻고 나온 제일이 묻기에 혜인이 손으로 문가를 가리켰다.

    “누가 왔나 봐요. 그런데 누군지 물어도 답을 안 해요.”

    “그래?”

    제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가운 끈을 여몄다.

    “누구십니까.”

    열어도 되는 걸까? 혜인이 쉽사리 결정 내리지 못하는 사이 제일이 문을 열었다.

    “누구예요?”

    문을 한 뼘쯤 연 제일이 아무 말 없이 등만 보이자 혜인은 조금 더 초조했다.

    “오빠, 누구예요?”

    “문, 열어.”

    밖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것이었다.

    설마…….

    “문 열어!”

    비명 같은 목소리에 혜인은 지레 겁을 먹고 다리를 덮은 담요를 꽉 쥐었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한 발 뒤로 물러난 제일이 당혹스러운 말을 채 쏟기도 전에,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단번에 혜인을 찾아냈다.

    여자는 혜인도 많이 본 적 있는 이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늘 제일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그의 아내, 우연주.

    혜인은 늘 그녀를 질투했다. 제일은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결국 연주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언젠간 연주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길 기도했다.

    제일은 가진 것이 없었다. 온전히 제힘으로 자수성가한 타입이었다.

    무영과는 사촌 관계지만, 부모덕을 조금이나마 본 무영과는 처지가 달랐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인생이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연주를 만났고, 두 사람은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러니 혜인은 그 자리가 제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주와 달리 제일에게 줄 수 있는 게 많았다. 제일도 곧 이혼할 거라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중국으로 넘어가면 곧인데, 이렇게 들키다니…….

    혜인이 입술을 짓씹는 사이, 연주가 그녀 앞으로 당도했다.

    “하, 진짜 이 여자였네. 당신, 당신 어떻게 나한테…….”

    “연주야, 내가 다 설명할게.”

    이상했다. 제일이 왜 연주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짓는지.

    일단 상황을 무마하려고 연기하는 거겠지.

    혜인은 마음을 다잡고 연주의 날 선 기세에 밀리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이런 상황은 수도 없이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혜인은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제일이 사랑하는 건 어차피 자신이었다.

    “무슨 설명! 내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무슨 설명이 필요한 건데!”

    연주가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광분하며 소리쳤다.

    “저기요.”

    “네가 먼저 꼬셨니? 네가 제일 씨 흔들었지?”

    연주가 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혜인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그러곤 혜인이 앉은 휠체어를 마구 흔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래!”

    “어, 왜 이래요!”

    혜인이 절규하는 연주를 떼어내기 위해 팔을 휘둘렀으나 역부족이었다. 흥분한 연주는 혜인의 팔까지 할퀴었다.

    “그, 그만해요! 그만!”

    혜인은 서둘러 제일을 찾았다. 아무렴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아는 그가 이런 상황을 가만두고 보진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제일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왜?

    “제, 제일 씨! 도와줘요. 이 여자가…… 이 여자가!”

    “그 입 닥쳐!”

    연주가 힘껏 휠체어를 밀었다. 순식간에 혜인의 몸이 떠밀렸다.

    휠체어가 옆으로 넘어지는 순간 혜인은 본능적으로 땅을 짚었다.

    손가락뼈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윽, 으…….”

    혜인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안 돼…… 손가락.”

    혜인이 엎어진 채로 손가락 상태를 확인하고 하얗게 질렸다. 화가에겐 손가락이 생명이었다.

    “손가락…… 흐윽…….”

    덜덜 떠는 혜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서 제일은 가슴을 치며 우는 연주의 뒤로 다가섰다.

    “미안해. 미안하다. 연주야.”

    “미안? 미안해? 너는 이게 미안하단 말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니?”

    “미안해. 빚 갚으려고 그랬어. 돈이 필요해서…… 인맥이 필요해서……. 쟤 그림이 그래.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제일이 몸을 바르르 떨며 엉엉 우는 연주를 당겨 안았다.

    할퀴고 맞으면서도 제일은 꿋꿋하게 연주를 껴안았다.

    “놔! 놔! 이 나쁜 새끼야!”

    “미안해. 전부 그림, 그림 때문이었어…… 그림 때문에.”

    잘못 들은 걸 거야.

    혜인은 부러진 손가락을 바르르 떨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혼몽한 중에 현실을 부정했다.

    왜 제일은 그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연기라기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연주를 달래고 있을까.

    미안함, 애틋함, 괴로움이 가득 담긴 표정.

    혜인에겐 고압적이던 사람이, 연주에겐 한없이 작은 사람처럼 보였다.

    “손가락, 손가락이 부러졌어요! 손가락! 나 좀 일으켜 주세요!”

    그럴 리 없다고. 제일이 자신을 이용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혜인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오빠! 오빠 뭐 하는 거예요? 왜 그 여자랑……. 그 여자 지긋지긋하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제일은 혜인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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