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69화 (69/95)
  • 두 번째 신혼 69화

    이렇게 눈물로 호소할 생각은 아니었다.

    세인은 당혹스러움에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그러나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죄송…… 정말 죄송합니다.”

    “이한이가 좋으냐?”

    “흑, 네…… 너무, 너무. 많이…… 좋아해요.”

    “그 녀석이 널 그렇게 내쳤다. 나 또한 널 외면했어. 그런데도 원망조차 안 드는 게야?”

    세인이 고개를 저었다. 원망했던 시간조차 이젠 소중해졌다.

    어느덧 마음이 이렇게 커졌구나.

    정세인의 인생은 서이한이구나.

    세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자, 덕수가 헛기침한 뒤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러곤 잠시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려 주었다.

    “이한이 그 녀석이 알면 길길이 날뛸 터인데……. 그래도 정작 세인이 네가 마음이 약해서 흔들리는 걸 보니 말을 해야겠다 싶다. 나도 그래, 늙었다. 늙었지. 지난 일을 후회하는 걸 보면.”

    그녀의 눈물이 어쩌면 그에게도 참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네가 그렇게 울 일이 아니야. 세인이 네 잘못이 아니었다. 나조차 그릇이 부족했던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덕수가 세인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라.”

    “네. 회장님.”

    “서혜인이 말이다. 네 언니.”

    세인이 눈물을 닦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요?”

    “그래, 그 아이.”

    덕수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입양아다.”

    “……입양, 이요?”

    세인이 처음 듣는단 얼굴로 눈을 크게 키웠다. 격한 파동이 그녀의 눈동자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래.”

    덕수는 씁쓸한 눈으로 세인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탄식했다.

    아아. 내가 몹쓸 짓을 하였다.

    큰 회사를 거머쥐고,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고선 이 여린 아이에게 돼먹지 못한 짓을 했구나.

    덕수는 뒤늦게 통탄했다. 후회했다.

    재한이 죽고 난 뒤, 이한에게 더욱 애착이 생겨서 그랬다.

    덕수는 자식 중 종운을 특별히 예뻐했다.

    장남 종운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상냥한 아이였다. 포용력이 넓고 세상을 올곧게 보는, 비뚤어진 곳이 없는 아이였다.

    그래서 더욱이 정이 갔다. 세상에 찌든 자신에게서 이런 순수한 아이가 나왔다는 것에 감동한 것이다.

    그런 종운을 쏙 빼닮은 게 재한이었다.

    재한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고, 그게 꼭 어린 종운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이한을 채찍질했다.

    어서 재한처럼 장성하라고, 그의 자리를 채우라 종용했다.

    그 과정에서 이한과 세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이 둘을 억지로 떼어놓으면 안 되었는데.

    6년 그 긴 세월을, 이 아이는 이렇게 혼자 울었겠구나.

    덕수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마른세수했다.

    “그리고 서혜인이는, 태어나면서 장애를 가졌어. 네 잘못으로 그런 게 아니다.”

    세인이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녀는 덕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입양할 때부터 아픈 아이였다. 심 원장의 뜻으로 입양한 것 같더구나.”

    “…….”

    “네 잘못으로 다친 게 아니란 소리야. 내가 면목이 없구나.”

    갑자기 구토감이 치밀었다. 세인은 이를 악물며 덕수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가까스로 과거를 더듬어 보았다.

    혜인이 다치던 날은 여전히 생생했다.

    아니, 네 살 아이의 기억이 이토록 뚜렷한 게 정상일까.

    마치 누가 주입해 놓은 것처럼 상황이 자세했다.

    “회장님…….”

    “사실이다. 증명할 자료도 충분해. 원한다면 보여 주마. 나도 처음에 알곤 꽤 놀랐지.”

    세인이 입가를 손등으로 누르며 가쁘게 호흡했다.

    덕수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그럴 리가 없는데.

    ‘널 구하기 위해서 혜인이가 뛰어든 거란다.’

    ‘세인아, 언니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세인아, 세인이 때문에 언니가 다친 거니 세인이가 도와야 해.’

    ‘네가 트럭에 깔리려던 걸 혜인이가 구한 거야.’

    ‘언니가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데 너만 놀면 되겠니?’

    은희의 목소리가 빗발치듯 흘러들었다.

    설마. 은희가 그렇게 믿도록 말을지어낸 게 아닐까.

    한계에 다다른 세인이 어린 마음에 만들어 낸 허상이라면, 사실은 자신이 그런 게 아니었다면…….

    “너무하잖아요, 회장님.”

    세인이 울먹이며 말을 토해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덕수가 어딘가로 향했다. 서랍에서 무언갈 찾아온 그가 세인에게 내밀었다.

    “찬찬히 봐라.”

    세인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서류였다.

    입양 허가 서류와 갓 돌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사진이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이게…….”

    “그래, 이제 믿겠어?”

    세인이 차가워진 손으로 사진 한 장을 집었다.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작은 생명의 두 다리가 기이하게 휘어 있었다.

    “김유진. 이건 원래 이름이고.”

    “……이 아이가 혜인이 언니예요?”

    “그렇다.”

    덕수가 혀를 찬 뒤 뒤돌아섰다. 도저히 자신의 죄를 눈앞에 두고 덤덤할 수 없던 터다.

    덕수는 이 모든 사실을 6년 전에 알았다.

    그러나 이한에게조차 함구했다.

    그래야 세인이 혜인에게 최선을 다할 테니. 미국으로 떠나는 이한의 발목을 붙들지 않을 테니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잘못은 빠르게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왜 간과한 것일까.

    이한을 사랑해 친정과 연을 끊겠다는 아이를 너무 괴롭혔다.

    재한을 잃은 상실감을 다른 식으로 해소했는지도 몰랐다. 덕수 또한 가해자였다.

    그가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제 모든 부채감은 내려놓아라. 네 잘못이 아니다.”

    “…….”

    “그리고 부탁은 들어주마.”

    “…….”

    “그게 내 사죄가 될 수 있다면 좋겠구나. 미안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세인은 의외로 빠르게 감정을 정돈했다.

    “오늘 감사합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세인이 비척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밥이라도 먹고 가지 그러냐. 새아기 온다고 용주댁이 한 상 차렸어.”

    “죄송합니다.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세인의 충격을 이해한 덕수는 두 번 붙잡지 않았다.

    “살펴 가라.”

    세인이 고개를 꾸벅 조아리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돌아섰다.

    어떻게 집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세인이 정신을 차렸을 땐 미연의 차에 올라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가, 괜찮은 거니?”

    “저기, 제가…….”

    “서 회장님이 아픈 말이라도 한 거야? 호통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영감이 정말…….”

    “그게 아니라…… 제가…….”

    제 잘못이 아니었대요.

    하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이 나가질 않았다.

    믿기질 않아서. 믿어버리면 지난날의 자신이 너무 불쌍하니까.

    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죄송한데.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실 수 있나요?”

    “지금?”

    “네. 어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저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서요. 차 좀 빌려주세요.”

    “그러마. 대신 이번에는 혼자 못 가.”

    “네?”

    “불안해서 못 쓰겠어. 엄마도 갈 거야.”

    미연이 바르르 떨려오는 세인의 어깨를 제 쪽으로 기대게 했다. 그러곤 이유도 묻지 않고 연신 토닥여 주었다.

    혜인을 재워 주던 은희가 했던 것처럼, 오래오래 다정하게.

    ***

    은희는 백색 계열의 옷을 선호했다.

    크림색과 베이지가 주를 이루는 옷장을 살피던 그녀가 성에 차는 옷을 찾지 못해 가만히 문을 닫았다.

    요새 신경 쓸 일이 많아 쇼핑을 못 했더니 입을 만한 게 없었다.

    은희는 며칠 전에 홍춘에게서 선물 받은 가방을 떠올리곤 그에 어울리는 코트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반대편 옷장을 열어 옷을 꺼냈다.

    희고 고운 피부,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만큼 빼어난 외모.

    우아한 말투와 몸짓, 의사란 자부심.

    심은희란 여자는 가진 걸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분 단위로 시간을 사용하는 건 자신 만큼이나 중요한 존재 혜인을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투자하고 남은 시간은 혜인에게 몰두한다.

    그게 은희의 규칙이었다.

    은희는 재력가인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거머쥔 채 남편 홍춘을 만났다.

    일명 깡패로 불리는 홍춘이 처음부터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 그의 열렬한 구애에 서서히 마음이 기울었다.

    사랑으로 결혼한 건 아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했다.

    우려와 달리 홍춘은 은희에게 지극정성이었고, 홍춘의 사업이 승승장구하며 재산뿐만 아니라 인맥도 차곡차곡 넓혀갔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번번이 좌절한 끝에 아이를 입양하기로 계획했다.

    은희는 봉사 활동을 하던 보호시설에서 자꾸만 눈이 가던 혜인을 입양하길 결심했고, 홍춘도 그녀의 의견에 따라 주었다.

    출산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평생 걷지 못할 아이라고 했다. 육아가 쉽진 않겠지만, 가슴 아픈 사연이 은희의 측은지심을 건드렸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입양하며 은희는 해묵은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은희에겐 바로 위에 언니가 있었다.

    그녀도 혜인처럼 다리가 불편했다.

    혜인만큼은 아니었으나, 다리를 절어 거동이 불편한 편이었다.

    어렸을 때 은희는 그런 언니가 너무 창피했다. 거의 외면하다시피 했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날이면 모른 체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은희의 언니는 열여덟 살, 싱그러운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외로움과 우울증이 어디서 기인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언니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더라면.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가진 않았을 텐데, 하고 평생을 자책했다.

    그래서 혜인에게 눈이 갔다.

    혜인에게 애정을 쏟아부으며 언니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그런데 혜인을 입양한 지 얼마 뒤, 세인을 임신했다.

    입양한 몸이 아픈 큰딸, 그리고 건강한 친딸.

    애정의 저울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은희는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손이 많이 가는 혜인과 순하기만 한 세인을 돌보며 은희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혜인을 두고 세인에게 미소 짓는 날이 많아지자, 그게 꼭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은희는 세인이 혜인을 다치게 했단 거짓말을 고안해 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그뿐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혜인이 겪을 좌절감을 세인도 나눠 가지는 것뿐이었다.

    세인에겐 건강한 두 다리가 있지 않은가.

    혜인은 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세인은 하고 있었다.

    그러니 혜인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뜻을 들어주고 싶었다.

    가련한 아이니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니까.

    죽은 은희의 언니가 누려야 했던 것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혜인은 중국행과 세인의 이혼을 원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