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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68화 (68/95)
  • 두 번째 신혼 68화

    처음엔 이한도 더블나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나 세인이 입사하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조직의 검은돈으로 쌓아 올린 호텔. 그러나 누구보다 잘난 대한민국 최상위 부류들이 휴가를 즐기는 공간.

    그 작은 왕국에 세인이 낙하산을 타고 착지했다.

    관심을 가진 이한은 순식간에 더블나인의 구조를 파악해 냈다.

    그 후엔 여러 개의 차명을 이용해 차츰차츰 지분을 늘려갔다.

    그리고 이번에 귀국한 즉시, 홍춘의 친구이자 무영의 보스인 박중혁과 접촉했다.

    무영이 모시는 중혁은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인 만큼 머리 회전이 빨랐다.

    이한이 투자금을 회수하지 않는 대신 대표 자리를 요구하자, 선뜻 힘을 보태주었다.

    무영이 중국 사업으로 발을 돌린 건 중혁의 지시였다. 딴 주머니를 찬 건 오롯이 무영의 실책이었고.

    이한은 계획했던 대로 무영을 저 멀리 밀어내게 되었다.

    이한이 그늘진 눈으로 차창을 바라보는 동안, 소란이 종식되어 갔다.

    이어 민성이 차 문을 열고 올라타 뒤로 고개를 꺾으며 말했다.

    “전무님, 강제일 위치 확인됐습니다. 인천 호텔이랍니다. 정혜인과 함께 체크인 했습니다.”

    아무 데나 들어앉은 걸 보니 마음에 급했나 보다.

    “우리 세인이는.”

    “현재 큰 사모님과 함께 이동 중입니다. 그런데…… 가시는 방향이 충명원 쪽입니다.”

    “뭐?”

    서 회장이 부른 건가 싶어서 이한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이한의 모친인 미연은 그다지 모질지 못했다.

    냉철한 업무 처리 능력과 다르게 친밀한 관계에 한해선 무른 편에 가까웠다.

    미연이 억지로 서 회장의 사가로 세인을 끌고 갔을 것 같진 않았다.

    미연이 아니라면 세인이겠지.

    유독 사근사근하던 세인의 전화 목소리가 회장을 찾아가기 위한 포석이었단 걸 깨달은 이한이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정세인, 무슨 생각이야.”

    영특한 정세인. 그녀가 이런 상황에 서 회장을 찾아간 이유가 대충 예상은 됐다.

    덕수에게 도와달라 손이라도 내밀려는 건가.

    제일과 혜인을 분리해 달란 부탁을 하려는 거라면.

    제게 부탁하기엔 염치가 없었을까.

    아니, 세인은 그저 이한의 안전을 염려하는 걸지도 몰랐다.

    무영과 접촉하며 이미 한바탕 일이 커졌으니, 남은 일이라도 나서서 해결하고 싶었던 거겠지.

    전에 강현준에게 칼을 맞았을 때도 세인은 끈질기게 자신이 나서길 원했다.

    그래, 세인은 빚지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미였다.

    하지만 지금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선 세인에겐 이한 말고는 달리 기댈 곳이 없었다.

    그러니 덕수를 찾아간 거겠고.

    차라리 미연에게 부탁하지, 서 회장이라니.

    어떻게 보면 정답이었다. 서 회장은 사람 마음까지도 주무르는 간교한 이였다.

    “통도 크지.”

    골치가 아팠다. 그러면서도 세인이 그 조그만 머리를 굴려가며 자신을 위했을 걸 생각하자 속도 없이 기뻤다.

    이한은 픽 웃음을 흘렸다.

    “전무님, 충명원으로 모실까요?”

    서 회장은 많이 늙었다. 얼마 전 쓰러졌단 소식을 듣고도 찾아가지 않은 건 단순함 반항심이 아니었다.

    이한이 굽히고 들어가는 순간, 세인까지 얕보일 터다.

    그런데 세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속이 음험한 노인네라 걱정됐지만 적어도 손자 하나를 더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함부로 대하진 못할 터다.

    미연을 믿기로 하고 이한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예정대로 움직여.”

    세단이 매끄럽게 도로 위를 질주했다.

    세인 모르게 치워 버리려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니, 제대로 시선이나 끌어볼 작정이었다.

    쓰레기 처리를 위해.

    ***

    세인과 미연이 충명원 대문을 지났다. 초록빛 나무와 잘 가꾼 정원이 작은 숲길처럼 이어졌다.

    세인은 마지막 돌계단을 오른 뒤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말 괜찮니?”

    앞서 걷던 미연의 질문에 세인이 얼른 대답했다.

    “네. 너무 늦은 건 아니죠?”

    “남는 게 시간이라고 하시더라. 그러니 서두를 거 없어.”

    “네.”

    “그럼 엄마는 여기서 기다릴게.”

    미연이 테라스를 눈짓했다. 한옥 카페처럼 단장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작은 공간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어머. 큰 사모님, 작은 사모님. 어서 오세요.”

    그녀와는 결혼식 날에 인사를 나눈 적 있었다. 충명원의 살림을 도맡은 이라고 들었다.

    “저는 용주댁이라고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작은 사모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선두에 선 용주댁 뒤로 집안일을 돕는 직원들이 여럿 보였다.

    세인은 고개 숙이는 그들에게 일일이 눈으로 인사를 하며 용주댁의 뒤를 따라갔다.

    바깥과 통일된 느낌의 한옥 마루가 계속 이어졌다.

    “여기예요. 노크하지 않으셔도 돼요. 들어가 계시면 차를 내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긴장감으로 얼룩진 손을 꼭 말아 쥐며 세인이 대꾸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흔들의자에 앉아 화초를 들여다보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서덕수. 세계 굴지의 기업을 구축한, 역사에 길이 남을 제문 그룹의 수장.

    이한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TV나 신문으로 볼 수 있던 위인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가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그래, 왔구먼.”

    “안녕하셨어요, 회장님.”

    세인이 면목 없는 낯으로 인사했다.

    결혼한 지 6년이 넘었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남들은 다하는 신혼여행조차 생략했으니, 가족들에게 인사하는 관례마저 건너뛰었다.

    꾸중을 염려했는데 덕수는 의외로 나긋나긋했다.

    “거 서 있다가 또 쓰러지겠다. 일단 앉아라.”

    세인은 어디로 앉아야 할까 고민했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방석을 발견하고 그리로 향할 때였다.

    “노인네 늙어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도 힘에 부쳐. 저리로 앉아.”

    덕수가 눈짓한 건 티 테이블 쪽이었다. 세인은 네, 하고 대답한 뒤 그리로 향했다.

    덕수와 마주 앉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세인은 이 집 문턱을 밟지 못했다. 그랬기에 오늘 이 시간을 허락해 준 덕수에게 고마웠다.

    “죄송하면 자주 오면 되는 거야.”

    “네. 그리고 감사합니다.”

    덕수의 두툼한 눈썹이 위로 들렸다.

    “계속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회장님, 부족한 저를 이한 씨 곁에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끝이 조금 떨려왔으니 세인은 뜻을 또박또박 전하는 데 성공했다.

    “허허. 이 말을 그놈이 들으면 노발대발하겠구먼. 아직도 그렇게 어리숙해서 세상 어떻게 살 거야.”

    타박하는 투에 언뜻 걱정이 어린 것 같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네?”

    “내가 두 사람 생이별하게 만들었는데, 감사하단 말을 받는 건 욕심이지. 천당은 아니어도 지옥은 안 가고 싶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한이 그 녀석이 말 안 해? 내가 자네를 두고 떠나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

    “그 녀석이 내세울 만한 일을 해낼 때까진 한국에 얼굴 보이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아두었지. 그래서 이한이 녀석 그렇게 급하게 떠난 게야.”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세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덕수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덕수가 일부러 떼어놓은 거라고? 왜?

    세인은 그 이유가 단번에 이해되질 않았다.

    “결혼을 허락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왜…….”

    “이한이 녀석이 제 형만큼 되려면 든든한 처가를 얻는 건 필수였어.”

    “…….”

    “자네와 떨어져 있는 게 결혼을 허락해 주는 조건이었네. 자네 집안이 기우는 건 사실이었으니. 이한이 녀석 혼자서라도 힘을 쥐어짜야 하지 않겠나.”

    덕수가 이마를 찌푸렸다. 쭈글쭈글한 얼굴엔 여전히 위엄이 가득했다.

    “든든한 처가는 물 건너갔으니 이른 시일 안에 능력을 보이라고 명령했지. 이한이 마음 약해지는 일 없도록 자네와 연락도, 만남도 금지시켰네.”

    “저는…… 전혀 몰랐어요.”

    저 때문에, 자신 때문에, 이한이 고군분투했다.

    그가 혼자 떠났다고 투덜댈 때, 이한은 결점 많은 결혼으로 인해 발생한 부족함을 채우고 있었다.

    언제 용주댁이 다녀간 걸까.

    세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물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이한이 녀석이 내 예상보다 잘해 주었어. 그러니 이제 두 사람 생이별도 끝이네. 나도 이제 고집부릴 마음 없어.”

    충격적인 이야기에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하려던 이야기는 해야겠지.

    마음은 여전히 술렁였으나 나중에 이한과 풀어야 할 문제였다.

    그래. 지금은 마음 아파 주저앉을 시간이 없었다.

    모처럼 용기를 냈는데 흐지부지할 순 없었다.

    “서 회장님, 저 부탁이 있어요.”

    “부탁? 갑자기 찾아온다고 할 때 이상하다 했네만. 그래, 말해 보게.”

    “이한 씨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불륜을 정당화하고 이혼을 강요하는 혜인과 은희.

    이건 아마 시작일 터다.

    혜인은 제 뜻을 이룰 때까지 세인을 괴롭힐 테고, 필요하다면 이한에게까지 오명을 뒤집어씌울 터다.

    그렇게라도 이한과 이혼을 시키려 들겠지.

    실제로 세인이 고등학교 때 전화번호만 나눈 남학생을, 혜인은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 전학까지 하도록 만든 적 있었다.

    “회장님, 제 별것 아닌 친정…….”

    “별것 아니라고까지는 안 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면 결혼 허락 안 했을 게야.”

    “회장님, 제 친정과 연을 끊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세인이 제법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자 쏴아아, 창밖으로 갑작스레 비가 쏟아져 내렸다.

    잠잠하다 했더니 다시금 폭우였다.

    “연을, 끊어? 내 쪽에서 끊으면, 세인이 너는. 너도 친정과 연을 끊겠다는 거냐?”

    의아하다는 듯 덕수가 물어왔다. 세인이 흔들리는 음성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언니한테 큰 잘못을 했어요. 그래서 평생 죄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살았어요.”

    세인이 떨려오는 두 손을 서로 지탱하듯 붙들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더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이한을 지켜야 했다. 이한만 생각해야 했다. 이한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세인이 혜인에 대한 죄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야 했다.

    “네 언니 얘긴 들었다. 강제일이란 작자와 눈이 맞았다더군.”

    덕수까지 알고 있었다니.

    세인은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수치스러워 목덜미가 화끈해졌다.

    그러나 이젠 혜인과 한 몸처럼 살지 않을 터다.

    “친정과 연을 끊겠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연을 끊어주세요. 그러고 나면 제가 가진 게 정말 없겠지만, 그래도 저를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세인의 두 뺨으로 소리 없이 눈물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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