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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67화 (67/95)
  • 두 번째 신혼 67화

    서 회장이 노년을 계획한 충명원으로 향하는 길.

    사회 최상류층들만 산다는 동네는 부족함 없이 자란 세인에게도 낯선 땅이었다.

    띄엄띄엄 자리한 주택들에 영혼이라도 깃든 듯이 위엄이 가득했다.

    언뜻 TV에서 어느 대기업 회장의 거처라고 소개한 집이 스쳐 갔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동네는 처음부터 남다른 부유층을 구분 짓고 있었다.

    세인이 서 회장을 독대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혼을 허락받으며 인사하는 자리에선 여럿이 함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한은 다정했다. 손을 잡아주고 괜찮으니 자신만 믿으라던 어린 이한의 얼굴엔 애정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결혼이란 커다란 산조차 달가웠던 날들.

    하지만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세인은, 결혼이란 건 그 커다란 산을 끝없이 올라가는 과정이란 걸 깨달았다.

    이제 이한과 오해를 풀고 마음이 통했다곤 하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았다.

    친정은 계속해서 두 사람을 방해할 터였다. 또한 혜인의 허물은 세인의 것과 같았다.

    자신으로 인해 이한이 오물을 뒤집어써선 안 됐다.

    이젠 방황을 멈추고 산의 정상에 올라설 때였다.

    “긴장되면 엄마도 같이 들어갈게.”

    옆자리에서 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와 무표정에 가까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큰 키와 시원한 마스크를 가진 미연은 쇼트커트의 머리 스타일까지 더해서 상당히 도시적인 분위기였다.

    상대의 기를 압살하는 무거움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이한이 그녀의 이런 점을 닮은 건 아닐까 싶었다.

    “괜찮겠니?”

    다만 그녀가 하는 말이 모두 살갑게 들려왔다. 차가운 겉모습만 보고 미연을 판단해선 안 될 것 같았다.

    피를 나눈 은희보다 낯선 미연이 제게 더 너그러운 사람이란 건 조금 쓸쓸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혼자 갈게요.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꼭.”

    “힘든 일 있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해도 돼. 새아기는 아직 어리니까.”

    아직 어리다고 하기엔 세인은 이미 성년이 훌쩍 지난 나이였다.

    그러나 찰나 미연에게서 아주 어린 아이를 보는 듯한 애잔한 눈빛이 스쳐 갔다.

    “우리 새아기가 불안에 떠는 강아지처럼 보이는 걸 어쩌니. 엄마가 조마조마하네.”

    미연이 가볍게 웃었다. 어떤 영화배우처럼 근사한 미소에 세인의 가슴이 기묘하게 술렁였다.

    “저기, 어머니.”

    “그래, 말해 봐.”

    “그럼…… 저기, 밖에서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귀여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미연의 입가가 길게 늘어났다.

    “그러지 말고 함께 들어가면 좋지 않겠니?”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돼요. 정말 그거면 돼요.”

    “서 회장님이 보통이야? 내가 손이라도 잡아주면 나을까 싶어.”

    “회장님 뵙고 나온 뒤에…… 그때 손잡아주시면 안 될까요?”

    세인이 말을 이어가자 갑자기 미연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호탕하게 웃는 미연이 생각보다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사실에 놀랐다.

    그녀 말마따나 긴장한 세인은 함께 웃을 수가 없어서 눈만 깜빡깜빡했다.

    “미안해, 웃어서.”

    “아닙니다.”

    “자식들이 워낙에 독립심이 강해서 내가 엄마랍시고 나설 자리가 없거든. 그래서 오늘 세인이가 도움 청해 준 게 기쁘네.”

    “제가 감사하죠. 정말 감사해요.”

    “어린애는 어른한테 기대는 거야.”

    미희가 코를 찡긋거리며 세인의 팔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그에 칼을 뽑아 든 졸병처럼 경직되었던 세인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이나마 빠졌다.

    “이왕 만나는 김에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오렴. 세인이는 그래도 돼.”

    꼭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투였다.

    강직한 미연의 눈동자 속에 처량하게 자리한 제 모습에 세인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할 건 내 아들놈이지, 세인이가 아니야.”

    “두 분 사이가 역시…… 하지만 그래도…….”

    “응?”

    “관계가 더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거기엔 저도 있었으면 해요.”

    “……뭐?”

    “이한 씨랑, 저.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이요. 가족 맞죠? 염치없지만 저는 그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잠자코 듣던 미연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그러더니 세인을 꽉 끌어당겨 안았다.

    토닥토닥. 미연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세인의 등을 두드렸다. 무어라 말하려던 세인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벌써 울 것 같았다.

    ***

    이한은 경기도 외곽의 오래된 빌딩 지하에 있었다.

    그는 선팅이 짙은 세단 안에서 송 기사와 민성을 대동한 채, 무영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조폭들이 점거한 이 빌딩은 재건축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빌딩 주인인 무영이 오늘, 중국으로 떠난다.

    얼마 후 얼굴에 붕대를 두른 무영과 그의 수하들이 지하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수석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민성이 몸을 뒤척이며 이한을 불렀다.

    “전무님, 나왔습니다.”

    “어.”

    민성이 재빨리 움직여 차 문을 열어주자, 이한이 뒷좌석에서 내렸다.

    주변에는 이한의 경호원들이 포진해 있어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승자가 반전될 일 따위 없었다. 그런데도 세인은 현관까지 따라 나와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어젯밤 이한을 미치게 하던 그 눈빛으로, 애절하게.

    이한이 작게 욕설을 흘렸다. 다시금 배꼽 아래로 열이 몰린 탓이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왁자지껄한 소음에 이한의 피가 싸늘해졌다.

    이한을 알아본 무영이 퉁퉁 부은 얼굴을 설핏 찡그렸다. 통증이 이는지 짧게 욕한 그가 이한을 향해 말했다.

    “또 볼일이 남았습니까?”

    눈에 독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것을 보아 무영은 천생 깡패였다.

    사실 무영이 중국에 딴 주머니를 차고 사업을 구상하든 말든, 그런 건 이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영이 다시는 한국 땅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쐐기를 박아야 했다.

    세인을 그따위 시선으로 바라본 무영의 두 눈깔을 당장에라도 뽑고 싶었다.

    무영이 또다시 세인을 탐내면 아마 그땐, 인내를 발휘할 수 없을 터다.

    이한이 너른 어깨에 슬쩍 얹어둔 코트 사이로 팔을 꺼내 이너 포켓을 뒤졌다. 그러곤 담배를 꺼내 입술에 물었다.

    연기를 내지 않아도 이한의 존재감은 자욱하게 깔렸다.

    무영이 제 수족들을 약간 뒤로 물리자, 이한이 입을 열었다.

    “중국으로 가는 게 이무영 씨뿐만이 아닌 것 같던데.”

    세인을 찾은 날 오후, 별장으로 수하들을 보냈으나 이미 텅 비어 있단 보고를 받았다.

    제일과 혜인이 이미 자리를 뜬 후란 소리였다.

    그들이 세인을 직접 찾아 나섰을 리는 없으니 서울로 올라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곧바로 제일과 혜인의 중국행 티켓 날짜가 변동되었단 걸 알아냈다. 바로 오늘로.

    세인이 없으니 곧장 떠나지 못하고 지체한 거겠지. 그래서 이한은 안심할 수 없었다.

    “강제일, 정혜인까지 줄줄이 달고 행복한 여행이라도 하시려고.”

    “총지배인이 중국 가는 건, 예정되어 있던 일입니다.”

    “정혜인이 우리 세인이도 데리고 가려 하겠지.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이한이 제대로 짚었는지 무영의 눈썹이 씰룩였다.

    “그것까진 나도 모릅니다.”

    이한이 머리를 쓸기 위해 손을 올렸을 뿐인데 무영이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이래서 미친개에겐 매가 약이라고 하는 거다.

    “전무님, 여기 있습니다.”

    이한이 눈짓하기도 전에 민성이 서류를 가지고 왔다. 그는 인주까지 챙기는 섬세함을 잊지 않았다.

    무영이 궁금해할 틈도 주지 않고 인주와 서류를 내미는 열정에 무영이 주춤했다.

    “뭐야?”

    “이 대표님, 아니. 이제 이무영 씨죠. 이곳에 지장 찍으십시오.”

    “이, 이게 뭐야?”

    “더블나인 지분 포기 각서입니다. 이 시간 이후부터 리조트 호텔에 그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는 확인 서류입니다.”

    무영에게 설명하며 민성이 굵직한 활자를 손가락을 가리켰다.

    법인 지분 포기 각서.

    문서 분류까지 눈이 닿은 무영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걸 왜 서 전무가 내밉니까?”

    “아직 대표직을 내려놓지 않았던데. 네 그 개 같은 욕심을 이해하기엔 내가 한계야.”

    “뭐?”

    “그 머리로 자세히 알 건 없고, 찍지.”

    무영의 턱이 불끈거렸다.

    “X발…….”

    “쓰레기를 치워야 환기가 되겠지. 우리 세인이가 더러운 공기를 마실 순 없지 않나.”

    무영이 묻어둔 돈의 위치를 이한이 알고 있었다.

    그건 무영이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안전하게 돈을 확보하기 전까지 이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단 뜻이었다.

    가뜩이나 무영은 중국에 있는 수하로부터 연락이 닿지 않고 있어 조급하던 차였다.

    “서, 설마 내 돈 가지고 어떻게 해볼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푼돈엔 관심 없어. 하지만 누구에겐 그런 푼돈이 목숨보다 중요하단 건 잘 알지. 윤 비서.”

    “네. 여기 있습니다.”

    민성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서류에 기재된 포기 사유를 눈으로 훑던 무영이 흘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가 얼굴을 굳혔다.

    무영이 고이 묻어둔 금고가 영상 속에서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걸 네 보스가 알면 재미있겠지. 솔직히 난 네가 어떻게 뒈지든 상관없거든.”

    “이, X발! 그냥 둔다고 했잖아!”

    “다시는 한국 땅 밟지 않는 조건.”

    “안 와! 안 온다고!”

    “그래, 그래야 할 거야. 그 돈 대주느라 뭣 빠지게 일한 네 형님한테 칼침 맞고 싶지 않으면.”

    이한이 웃으며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이한의 뒤에서 민성이 지장을 받아내느라 약간의 소란이 일고 있었다.

    그를 무시하고 세워둔 차에 올랐다.

    이한이 더블나인의 운영 구조에 손을 댄 건 꽤 오래전이었다.

    세인과 결혼하며 이한은 홍춘에게 자금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예단비 명목으로 받은 게 더블나인의 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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