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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66화 (66/95)
  • 두 번째 신혼 66화

    어제와는 다르게 화려한 찬으로 식탁이 차려졌다. 민성이 수고한 까닭이었다.

    귀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반찬들은 고급 한정식집에서 공수해 온 듯했다.

    이한은 귀찮지도 않은지 반찬을 일일이 세인의 밥 위로 놔주었다. 하나씩 전부 맛보라는 듯 그렇게.

    세인의 표정을 살피곤 잘 먹는 것을 한 번 더 밥 위에 놔주었다.

    미지근한 물을 마신 세인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먹지.”

    고개를 젓자 그제야 이한도 밥을 몇 술 떴다. 세인은 한참 걸렸는데 이한은 밥 한 공기를 금세 비워냈다.

    그러면서도 정갈함과 단정함을 잃지 않는 게 이한다웠다.

    이한의 핸드폰이 식탁 위에서 진동했다.

    “잠시만.”

    이한은 양해를 구한 뒤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무영의 이름이 얼핏 새어 나왔다. 무영의 행방을 알리는 보고인 듯했다.

    이한은 손을 뻗어 초조하게 꼼지락거리는 세인의 손을 잡아 깍지 끼웠다.

    곁에 이한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란 뜻 같았다.

    통화를 마친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치우지 마. 사람 올 거야.”

    “그냥 내가…….”

    “하지 마. 네가 하는 거 싫어.”

    음식 몇 개 치우는 게 뭐 대수라고. 혜인을 수발하는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닌데.

    이한이 강경한 눈빛을 보내기에 세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프니까. 그러니까 이한의 말을 들어야지.

    실은 자신도 다른 사람이 이 공간에 침투하는 게 싫다고 하면 이한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웃을까, 불붙은 것처럼 밀고 들어올까.

    아니면 그래도 네가 참아보라며 사람을 들일까.

    속단할 수가 없었다. 그게 이한의 좋은 점이며 어려운 점이었다.

    “잠깐 외출해야 돼.”

    세인이 그를 따라 일어났다.

    “꼭 나가야 해요?”

    “이무영 일이야. 마무리 지어야지. 다녀와서 자세히 얘기해 줄게.”

    이한은 그렇게 외출할 채비를 했다.

    이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만한 핑계가 딱히 없어서, 세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올 거죠?”

    늦을수록 걱정이 쌓일 테니 미리 물었다.

    “최대한 빨리 올게.”

    세인이 아쉬움을 가득 안고 외출 준비를 하는 이한의 곁을 빙빙 돌았다.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그가 몇 번이나 피식댔다.

    “예쁜 짓 해도 안 돼. 넌 집에 있어.”

    “따라간다고 안 했어요.”

    “그럼 이건, 뭐야.”

    슬리퍼를 신고 현관까지 내려온 세인을 보며 이한이 물었다.

    “헤어지기 싫으니까…….”

    “하…… 가기 싫네, 정말.”

    중얼거린 이한이 턱을 내려 부드러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그래도 안 된다며 다시금 세인의 의지를 밀어냈다.

    쳇. 실은 이러면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다.

    조금 전 다녀간 김 교수가 반드시 휴식하란 당부를 남겨서인지 이한은 양보가 없었다.

    뻔히 아픈 세인을 데려갈 리 없는 남자였다.

    “푹 쉬어.”

    “……뭐, 봐서요.”

    시간을 끌면 헤어지는 게 더 힘들단 이치를 아는 것처럼 이한은 더 이상 미적거림 없이 현관을 나섰다.

    세인은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경호원이 있을 터고, 그 이상 따라가지 못하도록 막을 게 뻔했다.

    오피스텔 밖 또한 이한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란 건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딩동.

    잠시 뒤 초인종 소리가 공간을 울리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세인이 몸을 일으켰다.

    누구일까. 벨을 누를 사람은 없는데.

    경계하며 문가로 다가가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접니다.”

    이한의 경호원이었다. 더블나인에서 세인을 직접 안아 차에 옮긴 남자.

    “무슨 일이에요?”

    “사모님 앞으로 꽃이 배달되었습니다. 큰 사모님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아. 세인은 잠금을 해제하고 문틈을 열었다. 남자가 팔을 내밀자 푸른 장미가 세인에게로 폭 안겨 들었다.

    “그럼, 문단속 단단히 해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세인은 문을 잠그고 거실로 돌아와 꽃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꽃바구니를 보내줄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긴 신혼집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보내셨을까.

    하긴, 아들의 집을 부모가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세인은 마음이 담긴 선물을 들여다보다가 결심한 듯 일어섰다.

    현관을 열자, 역시나 아까 그 경호원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핸드폰 아직인가 해서요. 이한 씨가 새 핸드폰을 사다 주기로 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란 표정으로 경호원이 대꾸했다.

    “확인해 볼까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이한에게 전화를 하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아뇨.”

    세인이 두 팔을 저으며 그를 말렸다.

    “대신 핸드폰 좀 빌려주시겠어요?”

    어디에 전화를 걸 거냐는 듯 남자가 잘 훈련받은 개처럼 표정으로 질문했다.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단 뜻이다.

    세인이 옅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려 했다.

    “어머니께 전화 드리려고요. 감사 인사는 해야죠.”

    “아. 네.”

    그가 선뜻 핸드폰을 내밀었다.

    꽃을 보내준 이는 이한의 모친 김미연이었다.

    미연이 보낸 꽃이 곧장 전달되었단 건, 그녀를 믿어도 된단 뜻이었다.

    이미 세인은 그녀를 반쯤 믿고 있었다.

    물론 어려운 상대였지만, 미연이 제문 그룹과 세인의 사이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단 건 눈치로 알았다.

    세인은 신경 쓸 것 없다는 집안일들이 다 뭐겠는가.

    그 집 문턱을 밟는 일을 허락받지 못한 세인의 몫까지 미연이 힘쓰고 있다는 뜻이겠지.

    “들어가서 전화해도 되죠?”

    세인이 생긋 웃자 그러라며 남자가 한발 물러났다.

    “금방 사용하고 돌려드릴게요.”

    세인이 예의상 한 번 더 웃어주곤 현관문을 닫았다. 그러곤 빠르게 방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당분간 이한의 보호 아래, 세상에서 꼭꼭 숨겨질 운명이었다.

    세인 혼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고서 감정을 배제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김미연입니다.

    머뭇대던 세인이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저, 어머니…….”

    -새아기? 새아기니?

    “네. 어머니. 저예요. 갑자기 전화드려서 놀라셨죠. 꽃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단 말을 하려고요.”

    -세상에. 엄마가 부담 준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전화를 다 주고, 고마워라.

    엄마가, 라는 단어에 울컥 마음이 아렸다.

    엄마.

    허락한 적 없는 호칭이건만 세인의 가슴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따뜻한 단어였다.

    피가 섞였다고 해서 좋은 가족은 아니었다.

    미연처럼, 이한처럼 피가 섞이지 않아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게 진짜 가족이 아닐까.

    -우리 세인이, 꽃은 마음에 드니?

    “그럼요. 너무 예뻐요.”

    목소리가 잠겼다.

    다정한 말 몇 마디가 사실 세인이 그토록 원하던 온기였단 걸 깨달았다.

    남보다 못한 가족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가족을 저버릴 결심은 결코 충동적인 게 아니었다. 차곡차곡 쌓여 넘쳐흘렀을 뿐이다.

    언제까지 슬퍼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한이 무영을 만나러 간 동안 세인 홀로 두 다리를 뻗고 쉴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무영은 위험한 사람이었다.

    전에야 몰랐으나 그가 적이 될지 모른다고 여기자 그가 조직의 사람이란 점이 날카롭게 와 닿았다.

    물론 이한의 선에서 마무리될 수 있을 터다.

    그러니 이제 세인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한동안 입술을 씹던 세인이 힘겹게 입술을 뗐다.

    “죄송하지만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이한을 빼면 우습게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끈끈하게 엮인 것 같던 가족도, 더블나인의 지인들도 모두 기대거나 믿을 수 없는 사람뿐이었다.

    지금으로선 미연에게 기대는 방법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부탁이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럼 엄마가 지금 찾아가도 될까?

    “이쪽으로 차를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한 씨에겐 그냥 어머님 뵈러 가는 거로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니. 새아가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해줘야지.

    “그리고 회장님을 뵐 수 있게 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회장님을?

    놀란 음성을 듣는 세인의 입가에 초조한 기운이 어렸다.

    “네, 어머니.”

    -이한이가 알면 꽤 고달플 텐데.

    “그러니 어머니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그래야지. 누구 부탁인데. 오래 안 걸릴 거야.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이번엔 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호원이 건 전화인 줄 알았는지 이한의 목소리가 냉담했다.

    -무슨 일입니까. 세인이는요.

    “나예요.”

    -어, 세인아.

    자리를 옮기는 건지 조금 시끄러웠던 수화기가 잠잠해졌다.

    “잠시 어머니를 만나고 오려고요.”

    -어머니라니…… 김 이사?

    어머니에게 정 없이 김 이사라니. 이한다운 반응이었으나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세인은 어긋났으니, 이한이라도 가족의 정을 따뜻하게 누리길 바랐다.

    “꽃을 보내주셨는데 감사도 전할 겸, 여기 혼자 있으니까 답답하기도 하고요.”

    -그래, 꽃. 그렇지 않아도 연락받았어. 꽃을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어머니께서 주신 거니 감사해서요. 많이 늦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 만나 뵙고 이한 씨 있는 곳으로 가도 되고요.”

    그의 의심을 지우려 일부러 적극적으로 말했다.

    -오피스텔에서 만나지 그래.

    한 번 세인을 잃어버린 그의 초조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한을 설득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이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면 감정적 호소만 한 것이 없었다.

    “바깥 공기 쐬고 싶어요. 기분도 전환하고.”

    -많이 답답해서 그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 어머니가 모질게 하면 바로 연락해. 아, 핸드폰이 없지.

    “대신 위치 추적되는 반지가 있죠.”

    세인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이한이 함께 웃으며 저녁에는 새 핸드폰을 가져오겠노라 약속했다.

    전화를 끊은 세인은 경호원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옷장을 뒤졌다.

    아침나절 윤 비서가 가져온 옷 중 가장 단정한 것을 골라 걸쳤다.

    얼마 후, 초인종이 울렸다.

    큰 사모님이 도착하셨으니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말이 덧붙었다.

    미연이 직접 올 줄은 몰라 세인은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미연이 차에서 내려 직접 세인을 맞이했다. 세인은 긴장감을 지우려 최대한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못 본 새 얼굴이 반쪽이네?”

    세인은 민망함에 얼굴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내 정신 좀 봐. 어서 타자.”

    미연이 차 문을 잡아주며 세인에게 눈짓했다.

    허리를 숙이며 차에 오르다 세인이 휘청거리자 날렵하게 허리를 잡아 세워준 건 덤이었다.

    “죄송, 감사합니다.”

    “입원한 애를 억지로 퇴원시켰으니 이러는 거 아니니.”

    입원했던 일을 알고 계시는구나.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계실까. 세인은 미연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공연히 차창만 바라보았다.

    호기롭게 그녀를 불러냈으나 막상 마주하자 미연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입을 떼기 어려웠던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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