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65화
이른 새벽.
고이 잠든 이한을 바라보던 세인은 조심스레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정말 한동안 잠들지 못했는지 이불에 걸린 세인이 낑낑대도 이한은 미동이 없었다.
어젯밤 그 일 때문일까.
이한이 그녀에게 토해낸 진득한 열망.
민망하고 부끄럽긴 했으나, 날것 그대로의 이한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한과 비밀을 하나 나눈 것 같아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와의 밀접한 교류에 빠른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여기 있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그의 곁에 있단 사실에 찔끔 눈물까지 고였다.
물리적으로 멀어져 있던 시간을 해소하듯 친밀한 행위가 두 사람의 거리감을 좁혀주었다.
침대에서 벗어난 세인은 아직은 조금 어지러워 벽을 짚고 더듬더듬 거실로 향했다.
그녀가 깊게 잠들지 못한 건 역시 혜인과 은희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텐데…….
혜인은 또 소리를 지르며 애꿎은 물건을 던지고 있을지 몰랐다.
세인의 부재에 그녀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낯선 일이 아니었다.
“참, 핸드폰이 없지.”
거실에서 두리번거리던 세인은 식탁 위에서 이한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비밀번호가 걸린 이한의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고심 끝에 제 생년월일을 눌렀다.
실패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자만한 것 같았다.
“음…….”
어젯밤 열에 들뜬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던 이한을 떠올리자, 다시금 용기가 생겼다.
한 번만 더 해보자. 머리를 좀 더 굴려 결혼기념일을 입력하자 액정이 환해졌다.
잠금을 풀어놓고도 믿을 수 없어 눈을 키웠다.
세인은 핸드폰에 남은 수많은 부재중 전화를 넘기고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전화를 할 셈이었다.
연결 신호는 세 번도 가지 않아 뚝 끊겼다. 이어 다급한 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서 전무?
세인이 없어졌단 걸 알고 꽤 당황하고 있던 모양인지, 그녀는 동요하는 음성이었다.
“저예요.”
-너 대체…… 너 어디니? 어? 어떻게 된 거야.
“이한 씨랑 있어요.”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네가 사춘기 어린애니?
은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그간 세인이 저지른 반항은 소소한 것들이었으니, 그 충격이 상당했으리라.
세인이 은희의 성에서 탈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인이 정신이 든 후에도 별장에 얌전히 남아 있을 줄 알았겠지.
몇 번쯤 반항해도, 어쩔 수 없이 혜인과 함께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으리라 생각했을 터다.
그래, 예전의 세인이라면 포기하듯 불륜에 동조했을지도 몰랐다.
그래, 난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자신의 속죄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세인은 새삼 자신의 비겁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세인에겐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었고, 떳떳하게 어깨를 맞대고 싶은 이한이 있었다.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버티며 살았던 몇 주 전과는 달랐다.
이한과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그러려면 변질된 고리를 끊어낼 필요가 있었다.
자신 때문에 다친 혜인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한이 또 다른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가족과의 일을 정리해만 했다.
세인은 핸드폰을 꽉 쥐며 말했다.
“저 이제 이한 씨랑 있을 거예요. 엄마가 부르셔도 지금은 못 가요.”
-혜인이는. 네가 돌보지 않으면 걔는 어떻게 할 거야. 버리기라도 하겠단 거니?
은희도 예감하고 있었을 터다.
몸도 성치 않은 혜인을 두고 떠난 세인의 반항이 한 번에 그치지 않으리란 것을.
“언니가 강제일과 정리하지 않는 이상, 언니 못 봐요. 제 이혼을 언니가 결정할 권리는 없잖아요.”
세인이 단단하게 결심한 투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엄마, 여기서 더 바닥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아요. 저를 조금 이해해 주시면 안 돼요?”
세인이 애원하듯, 마음을 열어 보였다. 조금만 나를 봐달라고 그렇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너그러움을 제게도 한 번만 허락해 달라고.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돌아온 건 또다시, 혜인 얘기뿐이었다.
-이게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야? 그럼 혜인이는 어떻게 하라는 거니. 너만 찾고 있을 텐데. 계속 이렇게 고집부리다가 혜인이 탈 나면. 그땐 네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야?
“…….”
-우선 혜인이부터 만나. 이혼 문제는 그래, 성급했다고 생각해. 그래도 혜인이 따라서 중국엔 가줄 수 있는 거잖아.
“불륜을 눈감아주란 소리인가요?”
-너 하나 때문에 지금 몇 사람이 인생을 손해 봤니!
그러니까 네가 참아. 네가 눈감아줘.
“그러면 제 인생은요?”
-혜인이가 불쌍하지도 않니?
평생을 들었던 말이 유독 아프게 여겨졌다. 세인은 지끈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문질렀다.
“저는 안 불쌍하고요?”
-뭐?
“엄마, 저는 제가 불쌍해요. 평생 불쌍했어요.”
태어나지 말걸, 하는 덧없는 후회를 너무도 많이 했다.
세인이 가슴에 묵은 말을 토해내자, 정적이 흘렀다.
우습게도 그게 답이 되었다. 이대로 고집을 부린다면 딸 취급도 안 해주겠지.
그 처분을 받아들이듯 세인은 마지막처럼 인사를 고했다.
“제 뜻은 전한 거로 알게요. 죄송합니다.”
-정세인.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심호흡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
울듯이 웃고 나자, 뒤늦게 혜인의 건강이 걱정됐다.
제가 없어졌단 소리에 쓰러지진 않았을까.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건강이 악화되면, 과연 자신이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야.”
세인이 잠긴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대로 혜인의 잘못을 묵인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죗값을 다하기 위해 죄 없는 강제일의 아내를 기만할 순 없었다.
“이게 맞아.”
세인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피곤이 내려앉은 눈가를 손등으로 비볐다.
문득 따뜻하고 너른 이한의 품이 그리워졌다.
이어 어젯밤의 강렬한 행위가 영상처럼 떠올랐다.
끝까지 관계를 나누진 못했으나 이한을 어루만지며 그와 더 깊은 교류를 했다.
큰일이다. 틈만 나면 그 생각이 났다.
“따뜻했는데…….”
온기를 넘어 열기가 전해진 시간이 선명하게 재생되자,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세인은 붉어진 눈가를 가리며 심호흡했다.
가족 생각을 하느니 이한과의 행위를 되새기는 게 훨씬 나을 터다.
차라리 그의 얼굴을 어떻게 볼까, 그런 고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씻고 나자 어제보단 몸이 가뿐한 듯했다. 속이 빈 것 같아 냉장고를 열어 주스도 한 잔 마셨다.
식탁에 엎드려 서서히 빛이 들어오는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 새로 스미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지금쯤이면 혜인을 깨워 아침 세안과 식사를 도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느긋하게 누워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잘하고 있는 거야.
슬리퍼 소리가 났다. 세인이 고개를 들자 이한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와 잔근육이 촘촘히 박힌 상체로 시선이 쏠렸다.
이한은 바지만 입은 채였다.
어젯밤 그의 티셔츠가 더러워져서 벗어두었던 게 기억났다.
낯이 뜨거워진 세인은 다시금 엎드려 창밖을 살피는 척했다.
그러나 이한이 바로 앞으로 서며 하필이면 그녀의 눈높이가…….
세인은 눈을 고정하고선 어찌해야 하나 갈등했다.
몸을 일으키자니 늦은 것 같고 계속 이러고 있자니 그 부위가 너무 확대…….
“보고 싶으면 말을 하지.”
이한의 잠긴 목소리가 웃음을 머금고 흩어졌다.
“누가…… 봤다고 그래요.”
“어제처럼 흘긋대지 말고 당당하게 봐. 아예 벗어줄까.”
세인은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진짜 다 컸네.”
아이처럼 웃은 이한이 생수를 마셨다.
“그게…… 뭐 물어봐도 돼요?”
이한이 물을 넘기며 그러라며 눈빛으로 말했다.
“너무 크…… 던데 평소엔 어떻게 숨겨요? 많이 티 나진 않은 것 같던데…….”
푸흡, 이한이 사레들렸는지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고갤 돌렸다.
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괜찮아요?”
조리대에 손을 짚고 있던 이한이 젖은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게 궁금해?”
세인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의 말대로 야해진 것 같았다. 이한의 무엇이든 알고 싶었다.
“이리 와 봐.”
세인이 홀린 것처럼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갔다.
그러자 이한이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게로 바짝 붙였다.
“맞춤옷이야. 앞선이 양쪽 비대칭이지. 공간이 넉넉한 쪽으로, 이해가 돼?”
얼굴이 빨개진 세인이 눈을 깜빡였다.
“농담이에요?”
“야해 죽겠네, 누구 부인인지.”
“이한 씨 부인이에요.”
세인이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세인을 그대로 들어 올린 이한이 입을 맞춰왔다. 물기에 젖은 차가운 입술이 금방 노곤하게 감겨들어 열기가 어렸다.
입술을 머금으며 그가 움직여 벽 쪽으로 세인의 등을 밀어붙였다.
숨이 가빠 힘겨워하는 세인을 귀여워하며 그가 잠시 입술을 뗐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한데 얽혀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네가 내 아내야.”
“……응.”
세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미끈해진 입술을 아무 생각 없이 혀로 핥았다.
그 모양을 내려다보는 이한의 시선이 언뜻 탁해졌다. 그가 잡념을 털어내듯 말했다.
“안 돼. 벌써 한계야.”
세인을 그대로 끌어안은 이한이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래서. 우리 세인이 기분은 좀 나아졌어?”
“…….”
“너만 좋다면 홀딱 벗고 춤도 출 수 있는데.”
“아니요. 하지 말아요.”
“그럼 울 것 같은 표정을 하지 말아야지.”
설마 울 것 같은 표정이었을까. 세인은 이마를 찡그리고 있단 걸 깨닫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 잘하고 있어, 정세인.”
“……정말 그런 거 맞죠?”
“그래, 내 옆에 있잖아. 그게 정답이야.”
이한이 몇 번이고 세인의 등을 두드려 주며 잘했다고,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통화를 나누며 아프게 꽂히던 은희의 목소리가 옅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