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64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한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그땐 많이 어렸어. 오만하고 독단적이었지.”
자조적인 이한의 목소리를 달래려 세인은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실수인 척 더 만져도 되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세인이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볼우물을 깊게 보인 이한이 등을 소파에 기대며 회상하듯 이야기를 했다.
“형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울 방법은 내가 형의 대신이 되는 거였고.”
“그건 알고 있어요.”
이한이 서둘러 유학을 떠난 것에 대해 원망한 적 없었다.
세인을 밀어내고 혼자 떠나 버리고서 연락조차 없던 태도에 상처받은 것이다.
“유학을 마치자마자 현지에서 중책을 떠안게 될 실정이었어. 그걸 소화하려면 시간이 금보다 더 귀했지.”
일에 몰두해야 했을 터다.
“그렇다고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게 할 순 없었어.”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나도 내 일을 위해서 떠나면서, 너한테 가장 중요한 정혜인을 버리라고 강요할 순 없으니까.”
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예전부터 지금껏 혜인이었다.
그런 세인의 상황을 이해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대번에 속이 시원해지진 않았으나,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다.
또한 이한의 판단이 이해됐다.
어차피 그가 함께 떠나자 권했어도 혜인 때문에 그러지 못했을 터다.
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 혜인이 주저앉혔을 터다.
“하지만 상황을 설명해 줬다면 좋았을 거예요. 나도 이해했을 텐데…….”
“알아. 그래서 미안해.”
“그래놓곤 연락도 없었잖아요.”
세인이 목에 힘을 주고 따졌다.
“네 목소리를 들으면 돌아오고 싶을 테니까.”
“…….”
이한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결국 몇 번쯤 왔지. 너는 모르겠지만.”
이한이 그럴 때마다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말하듯 오피스텔을 휘 둘러보았다.
“멀리서 너를 몇 번 봤어.”
세인의 젖은 두 눈이 커졌다.
“……뭐?”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네가 웃고 있었어. 항상.”
“대체 언제…….”
“억지로 웃고 있더라고. 서비스 정신인지, 아니면 그렇게 살기로 작정한 건지.”
세인이 숨을 가쁘게 내뱉으며 자꾸만 울컥거리는 속을 달래려 애썼다.
“혼자 보고 갔단 소리예요?”
“납치 안 한 게 기적이지.”
“나, 나쁜. 나빴어요.”
“그것도 알아.”
“혼자만 보고…… 나빴어.”
세인이 허망하게 중얼거리다가 툭,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나지 않게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다른 이유는 없던 거죠?”
조금이나마 싫어졌다든가, 미워졌다든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되었다.
“……없어.”
“그럼, 됐어요.”
너무 무른 건지 모르겠으나, 정말 이거면 됐다.
크게 뚫린 상처는 이한이 돌아오는 순간부터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정세인, 그동안 잘 버텼어.”
“…….”
“다른 새끼한테 눈길 줬으면 다 버리고 달려왔을 텐데.”
“그럼 그럴 걸 그랬네요.”
“뭘 해?”
“이한 씨 뛰어오게 그래 볼 걸 그랬다고요.”
흡. 세인이 갑자기 맞부딪쳐 오는 이한의 입술에 뒤로 떠밀렸다. 기우는 세인의 뒤통수를 이한의 커다란 손바닥이 받쳤다.
저돌적이었다. 조금 전 솜사탕처럼 가벼웠던 입맞춤과 다른, 성급하고 열탕 같은 숨이 덮쳐왔다.
세인의 호흡이 앓듯이 터져 나왔으나 이한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지난 6년간의 기다림을 해소하듯 순식간에 그녀를 장악해 버렸다.
“도망가지 마.”
세인의 등허리로 이한의 손바닥이 침습했다. 그녀의 가슴이 하늘을 향해 옅게 튀어 올랐다.
그가 움푹 팬 등줄기를 단단한 손가락으로 더듬어 내렸다. 세인의 머릿속이 이한으로 가득 찼다.
피부가 얇은 살갗에 이한의 뜨거움이 스몄다. 턱을 튼 이한이 각도를 바꿔 입술을 겹쳤다.
찐득하게 얽힌 입술을 떼어낸 이한이 세인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얼른 나아야지. 그동안 못 한 게 아주 많잖아.”
“흣…….”
“전부, 나랑 해.”
말을 마친 이한이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사라졌다.
열에 들뜬 세인은 사라진 온기가 서운해서 담요를 꽁꽁 감싸며 이한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이한이 가져온 건 주얼리 케이스였다.
장식이 휘감긴 옆면을 터치하자 계단식으로 열렸다. 그 안에서 얇은 백금색 링이 나타났다.
작은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심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반지를 뺀 이한이 세인의 손을 잡아 왼쪽 약지에 끼웠다.
“이게 뭐예요?”
“결혼반지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던데.”
이한은 결혼식 날 나눠 가진 반지를 재회했을 때부터 끼고 있었다. 반면 세인의 왼손은 썰렁했다.
“이제 빼지 마?”
세인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오차 없이 딱 맞는 반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젠 안 잃어버릴 거예요.”
“잃어버려?”
“사실…… 결혼반지를 잠깐 빼둔다는 게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안 낀 건가.”
이한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목울대를 거칠게 움직였다.
“응. 미안해요. 잠깐 손을 씻으려고 뺐는데…….”
결혼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중화장실을 찾은 세인은 손을 씻던 도중 혜인이 쓰러졌단 전화를 받았다.
결혼반지가 없어졌단 걸 알고 그 장소로 돌아갔을 땐 반지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한이 원망스럽다곤 하나 결혼반지를 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한참 반지를 찾아 헤맸으나 번번이 허탕이었다.
같은 디자인으로 제작하려 해도 이한이 섭외한 해외 디자이너의 단일 작품이라 구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돌아가니까 없더라고요. 같은 것도 구하지 못했어요.”
이한이 한숨을 낮게 토해냈다.
“그런 거라면 백 개도 사줄게. 정세인이 이걸 정말 빼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면 상관없어.”
“고마워요. 예뻐요.”
세인이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혹시 모르니까 여기에 위치 추적이라도 달아 놓을까요?”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이한이 바로 찾아올 수 있게, 최소한의 장치를 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무표정한 이한을 보자 너무 앞서갔나 싶어져 세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 이런 작은 것엔 못 할까요?”
“이미 했지.”
세인이 촘촘한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다시는 내 시야에서 못 벗어날 거야. 내가 닿는 곳에 있게 될 거고.”
이한이 세인의 손을 잡아 반지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만에 하나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그땐 커다란 성을 지어서 널 가둬야겠어.”
“진심 같아서 조금 무서워요.”
“아니. 너 하나도 안 무서워. 내가 정세인 발아래 있는 거 너도 잘 알거든.”
이한이 태연한 투로 세인을 마주했다.
커다란 성이라니.
그 안에 이한도 함께라면 좋을 것 같았다. 둘만의 성은 오히려 행복할지도 몰랐다.
뭐야, 좋은 거잖아.
“뭐 그러든가요.”
세인의 시원한 답으로 이한이 또다시 고뇌에 휩싸인 표정이 되었다.
“그만 미치게 하고, 일단 자자. 너 자야 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요.”
세인을 안아 들고 침실로 이동하려던 이한이 곧장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말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자 음영 진 그의 얼굴이 한층 서늘해 보였다.
오늘도 이한은 잠들지 못할지도 몰랐다.
세인은 자신이 위로받은 것처럼 이한도 편해지길 바랐다.
그리고 심장이 아플 만큼 그를 원했다.
“지금, 하면 안 돼요?”
“뭐?”
“참지 말고…… 그냥 안아주면 안 돼요?”
세인이 웅얼거리다 결국 고개를 이한의 가슴 쪽으로 돌렸다.
이만큼 용기 내는 것도 굉장히 힘든 일이구나. 이번에도 에둘러 거절당하면 어쩌지.
번번이 거절당했던 이한의 심정이 이랬을까.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면…… 그거 도와줄게요. 이대론 이한 씨 못 자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인은 남은 용기를 쥐어짜 보았다.
“……풀고 나면 잠이 잘 온대요.”
“그런 건 어떤 새끼가 알려 준 걸까. 난 아닌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이한 씨가 잘 잤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그를 재워줬던 것처럼 이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더 진한 안정감을, 만족감을 공유하고자 하는 바람을 이제 와 숨기고 싶진 않았다.
뭐든 좋으니 이한과 뜨겁게 섞이고 싶었다.
그러면 아팠던 일이 조금 더 쉽게 희미해지지 않을까.
“우리 애가 못된 걸 배워왔네.”
침대에 부드럽게 세인을 눕힌 이한이 말했다. 세인은 대꾸 대신 이한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었다.
촉. 간지러운 소리가 지척에서 부푼 입술 새로 터졌다.
“정세인 야해서 큰일이야.”
“옆에 누워 봐요.”
“안 돼. 정말 못 참아.”
이한이 한숨 쉬며 침대에 걸터앉기 무섭게 세인이 그의 옆으로 덮치듯 달려들었다.
물론 솜털 같은 무게로 그를 짓누른 거지만, 이한은 돌덩이에 깔린 듯 신음했다.
“정세인.”
“싫으면 거절해요.”
이한의 한쪽 팔을 베고 눈은 세인은 이한의 복근을 손으로 쓸었다.
티셔츠를 들추고 단단한 치골을 어루만지자 이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계속 이렇게 두면 괴롭잖아요.”
“그래, 괴로워. 그러니까 손 치우자.”
어서 치우란 말에 약간 반항심이 치솟았다.
사람을 다 먹어 치울 것처럼 입술을 맞춰놓고 발을 빼겠다는 이한의 배려는 감동보단 서운함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한의 이런 노력은 가슴이 아플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이한이 편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세인의 손끝이 방향을 바꿔 허릿단에 손가락을 끼운 순간이었다.
“난 분명히, 치우라고 했어.”
상체를 들어 올린 이한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세인은 버겁게 그를 맞이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서툴게 움직인 세인의 손을 이한의 손이 덮었다.
두 손이 겹쳐졌다. 낮아지는 이한의 숨소리에 안주하며, 세인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어쩌면 이한은 세인보다 더 짊어진 게 많을 터다.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혜인은 살아 있으나 재한은 떠났으니까.
이한의 마음이 대체 얼마나 망가졌을까 상상하면 가슴이 찢길 듯 아렸다.
그리고 6년이나 홀로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지루했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세인은 6년이란 시간을 원망으로 채워 넣었다. 그래서 견딜 만했다.
그러나 이한은, 여전히 사랑하며 6년이란 시간을 버텨왔다.
입술을 잠시 뗀 이한이 정욕에 물든 눈을 보여, 세인은 또 홀린 듯 말을 내뱉고 말았다.
“더 세게 안아줘요. 이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하, 너…….”
그가 짧게 욕설을 붙였다가 사과했다. 미안해. 욕해서. 이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세인이 손을 들어 이한의 뺨을 어루만졌다.
세인의 왼손에서 이한의 마음이 가득 담긴 반지가 반짝였다.
더욱 거세진 빗소리가 두 사람을 아늑하게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