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63화
슬쩍 내려다본 배꼽 아래 부근이 유독 아까보다 더 부풀어 있었다.
세인이 턱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이 변태!”
“그 변태는 네가 걱정돼서 어쩔 줄을 모른다던데.”
“거짓말. 안 보겠다고 했으면서.”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세인이 고양이 솜방망이처럼 팔을 휘두르자 이한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고 손목 안쪽에 입술을 맞췄다.
간지러움에 세인의 등줄기가 바짝 조여들었다.
“뭐 좀 먹을 게 있을 거야. 나가자.”
좀 더 들러붙을 줄 알았는데. 이한은 미련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조금 아쉬워서 세인은 이한에게 잡힌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뭐야. 귀엽게.”
이한이 중얼거리는 말에 가슴이 또다시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한이 귀국할 때마다 들렀다던 오피스텔은 두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너무 넓어 미로처럼 뱅뱅 돌아야 하는 신혼집보다 아늑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금빛 담요를 덮었을 것 같은 이한이 살기엔 한없이 작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내일 윤 비서 통해서 받을 테니.”
이한이 다소 썰렁한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인을 식탁 의자에 앉혀놓곤 무언가 달그락거리던 이한이 들고 온 것은 인스턴트 수프였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냄새에 온종일 굶은 위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먹을 만한 게 별로 없네. 우선은 이걸로 참아.”
“이거면 충분해요. 그런데 이한 씨가 이런 걸 끓일 줄 알아요?”
“데우는 것 정도는 해.”
이한이 자신을 뭐로 보냐는 듯한 자태로 세인을 보며 웃었다.
이한이 직접 스푼을 쥐여 주었다. 세인은 한 숟가락 떠올린 수프를 후후, 불어서 정성스레 식혔다.
“이리 줘. 해줄게.”
이한이 손을 내미는 걸 고개 저어 반항한 뒤, 먹기 좋게 식혔다.
세인은 수프를 들고 잠시 고민했다.
“왜. 아무래도 입맛에 안 맞아?”
“자요.”
세인이 맞은편에 앉은 이한의 입술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섰다.
“독 들었나 확인을 이렇게 해?”
“괜히 좋으면서 그러지 말고, 얼른요.”
“병 주고 약 주는 데 선수야.”
이한이 웃는 입으로 수프를 받아먹었다. 그러곤 이제 세인에게 어서 먹으라며 눈짓했다.
세인이 맛있게 한 그릇 비우자, 이한이 이번엔 따뜻한 차를 내왔다.
고급 차였는데 조금 떫은맛이 강했다. 먼저 입을 댄 이한이 이마를 찌푸리며 티슈로 입을 닦았다.
“썩은 물도 이보단 낫겠네.”
“푸흡.”
세인의 웃음보가 터졌다. 언제 챙긴 건지 이한이 약을 가져와 세인 앞에 내밀었다.
이한이 어울리지도 않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인은 양치질했다.
그러곤 거실의 커다란 창 아래, 널찍한 소파에 자리 잡았다.
창을 반쯤 밀어두고 빗소리를 들었다. 아까만 해도 세인을 궁지로 몰아넣던 빗소리가 지금은 자장가처럼 푸근하게 들려왔다.
희미하게 남은 음식 냄새, 따뜻한 불빛, 그리고 저 앞에서 생전 해보지도 않았을 설거지를 하는 서투른 남자까지.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찔끔 고였다.
어느덧 설거지를 마치고 담요를 가져온 이한이 세인의 뒤로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래 걸렸지.”
“바쁜 거 아니에요? 전화가 많이 오던데.”
아까부터 이한의 핸드폰이 울렸으나 그는 흘긋 발신자만 확인하고 덮는 식이었다.
은희와 혜인에 관련된 전화는 아닐까.
세인이 깔깔한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채근했다.
“받아보지 그래요?”
“다 헛소리하는 영감들이지. 신경 쓸 거 없어.”
꽉 당겨 안는 팔에 은근한 악력이 실려 있었다. 세인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으며 낮게 신음했다.
“이제야 살겠네.”
꽉 갇힌 몸이 아프다기보다는 마음이 아렸다. 이한 특유의 여유가 사라진 듯한 기분.
“나 어디 안 가요.”
“이젠 가고 싶어도 못 갈 거야.”
그 말을 증명하듯 이한이 두 다리까지 이용해 세인을 꽉 옭아맸다.
전에는 대형견처럼 꼬리를 살랑였다면 지금의 이한은 맹수처럼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오히려 세인은 이쪽이 좋았다. 혜인과 은희가 떠오를 때면 여전히 불안했기 때문에 이한의 구속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이번 일로 세인은 이한의 집착적인 애정이 절실하단 걸 깨달았다.
다시는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내일 윤 비서랑 김 교수 올 거야. 지금 몸은 어때.”
“지금은 괜찮아요.”
당장은 이한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
세인은 살짝 몸을 틀어 이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쭉 뻗은 턱선과 잡티 하나 없는 말끔한 피부.
오뚝한 코와 윤기 나는 입술. 조금은 신경질적인, 그래서 매력적인 눈매를 시선으로 더듬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버거워지는 상대였다. 세인이 가쁘게 숨을 내쉬자 그가 세인의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이번에도 피곤해서 터진 거라고 해봐.”
세인이 손을 올려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는 입가를 더듬었다. 정신이 없어서 은희에게 맞아서 입가가 터진 줄도 몰랐다.
통증을 느낄 여력이 없어서 숨길 생각도 못 했는데…….
“거짓말 말고 확실히 말해. 누가 이 꼴을 내놨는지.”
끝을 모르고 가라앉는 이한의 목소리가 분에 차 있었다. 세인이 우물쭈물했다.
“정세인.”
“엄마가…….”
이한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누군 아까워서 입도 마음껏 못 맞추는데.”
“가끔 감정이 격해지면 그래요.”
“정세인,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어.”
무어라 더 대꾸하려던 세인은 그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러나 이한이 턱을 잡아 올려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한이 고개를 숙여 혀를 길게 뺐다. 부드럽고 촉촉한 혀가 입가를 느긋하게 쓸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맞지 마. 혹시 너한테 위해를 가하는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맞서.”
“읏…….”
세인은 눈을 질끈 감고 혀끝을 짓누르는 이한을 견뎌내려 숨조차 참았다.
“어려우면 내가 하고.”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이한이 세인의 입가를 죄 훑어 상처를 헤집었다.
스치듯 지나가는가 싶더니 결국 입술을 깊게 머금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눅진한 접촉에 깊은 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
두 입술이 빈자리를 찾아 맞물렸다가 느리게 떨어졌다. 그에 맞춰 세인도 눈을 떴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한이 웃으며 물어서 영문을 몰라 세인이 고개를 저었다.
“환장하게 만들잖아. 번번이 돌게 하고.”
“…….”
“세인아, 날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괴롭히는 네가, 너무 무거워.”
그래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한이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이한이 세인을 꽉 끌어안았다. 더 진한 스킨십을 하려나 싶었다.
그의 가슴에 기댄 채 긴장했으나, 이한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상하다. 이쯤이면 다시 입술을 붙여올 때가 되었는데…….
허벅지에 닿는 이한의 열망은 아까보다 더 거대해져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한은 분명 욕정 했으나 주저하고 있었다. 상처받은 그녀에게 욕심대로 손을 뻗을 수 없는 거다.
하지만 세인은 그 어느 때보다 이한이 간절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생각했다. 이한을 다시 만난다면 물러서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 나가고 싶다고.
큰일을 당하고 나니 지체하는 순간이 아까웠다.
사랑하기 바쁜데, 안아주기 바쁜데.
이한과 좀 더 닿고 싶었고, 그가 곁에 있단 확신을 직접적으로 새기고 싶었다.
조금 더 입 맞추고 싶은데…….
세인은 망설이다가 손등으로 이한의 허벅지를 살짝 스쳤다.
곧바로 단단하게 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봐. 참고 있으면서.
그렇다고 제 입으로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기엔 세인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한은 눈치가 빠른 편이라, 신호를 보내면 의도를 바로 알아챌 터다.
그래서 세인은 언어보다 행동으로 이한을 재촉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주 보고 앉아서 껴안아 볼까.
세인은 엉덩이를 들썩여 자세를 정돈했다. 그의 복근을 짚고 움직인다는 게 그만, 생각지 못한 곳을 짚어버렸다.
세인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 미안, 미안해요.”
이한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세인을 그저 바라보았다.
차라리 평소처럼 야한 말이라도 하지, 이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
“그, 내가 해줄까요?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과 달리 서툴게 그를 자극한 뒤라 아무 말이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세인의 입술이 붕어처럼 벌어졌다가 꾹 다물렸다.
“도와줄 수 있어? 뭘 어떻게.”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라는 거야.
“어떻게 해줄 건지 말로 해야 알지.”
점점 더 창백해져 가는 세인을 보며 이한이 픽 웃음을 흘렸다.
“무리하지 마, 세인아.”
세인은 공연히 후끈한 감촉이 남은 손을 쥐었다가 펴며 도리질 쳤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는 세인의 귓불이 아까 먹었던 수프처럼 뜨끈해졌다.
“겁먹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못 믿겠는데.”
“나는 괜찮아요. 아니, 지금 하고 싶…….”
그 순간 이한이 강하게 세인을 끌어안았다.
“읏…….”
“정세인, 그냥 나를 먼저 죽여. 그게 덜 고통스럽겠어.”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그거 나밖에 없단 소리지?”
그의 단단한 팔에 갇혀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세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 죽지 말라는 게 다 뭐겠어. 사랑한단 뜻이지.”
“순…… 자기 마음대로야.”
“사랑해.”
돌연 날아든 고백에 그의 팔에서 풀려나려 바르작거리던 세인의 몸이 굳었다.
이한이 팔을 살짝 풀고 헝클어진 세인의 머릿결을 정돈하며 말했다.
“보고 싶었나, 너도.”
“……그랬어요.”
“안 들려.”
“보고 싶었어요.”
작은 소리로 대꾸한 세인은 후다닥 담요를 끌어 뒤집어썼다. 하나 혼자 담요 속으로 들어온 게 아쉬워져 꼼질꼼질 움직였다.
이한의 어깨까지 담요를 덮어놓곤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한이 가슴을 울리며 웃었다.
세인이 담요를 걷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얘기해 줘요. 그때 왜 그렇게 떠났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있었던 거죠?”
어쩌면 세인이 실수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상처를 덮어두기 급급해서 이한을 제대로 볼 생각을 못 했던 거다.
자신의 상처만 중요해서.
제 사랑만 앞세우느라 이한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밀어냈을지 가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게, 이한 씨 얘기를 제대로 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