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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62화 (62/95)
  • 두 번째 신혼 62화

    여전히 달리는 차 안에서 이한은 세인의 걱정에 편히 쉬질 못했다.

    안도해 잠들었을까. 아니면 회피하듯 눈을 감은 건가.

    후자라면 마음 아팠다.

    피로가 많이 누적되어 잠든 걸 터다. 이한은 투박하게 세인을 도닥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오랜만이구나.

    전화를 건 이는 이한의 모친 김미연이었다. 그녀는 갤러리 대표로 예술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한만큼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이한이 어렸을 때부터 집보단 바깥에 많이 머물렀다.

    그는 어머니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미연을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듯 전화가 오면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껄끄러운 정적이 흐르곤 했다.

    재한이 죽은 뒤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더 멀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녀는 하나 남은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차마 원망은 하지 못할 거다. 아들 둘을 잃는 것보다, 이한이라도 살아남은 편이 나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한에겐 형 재한을 제 손으로 떠나보낸 죄가 있었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것 같던데, 괜찮은 거니.

    “소식이 거기까지 흘러 들어갔습니까. 사람이라도 심어두셨나 보네요.”

    -어쩌다 알게 되었어. 너희는 괜찮은 거니?

    “세인이 주변에 사람 심지 말라고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세인은 모르는 일이지만, 미연은 방패막이 역할이었다.

    서 회장의 호출을 중재하고, 제문 그룹의 살림이 세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미연의 선에서 차단해 왔다.

    유학을 떠나기 전, 이한이 요청한 바였다.

    그러자 미연은 이한의 뜻을 받아준단 명목으로 세인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했다.

    말로는 세인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했으나, 그런 건 이한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미연은 제문 그룹의 일원이 된 세인이 엇나가지 않도록 살펴야 했을 거다.

    그래야 서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테니.

    보호와 감시는 한 끗 차이였고, 그래서 이한도 항상 미연에게 날이 서 있었다.

    요즘엔 세인에게서 손을 뗀 줄 알았더니, 또다시 투시경을 들이밀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더블나인 경영 체계에 대해 말이 많던데, 그건 관련 없니?

    “문제없이 해결될 겁니다.”

    -이무영 그 사람 확실하게 정리해. 세인이 힘들지 않게.

    사뭇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괜한 추문 들리지 않도록 해. 서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곧 세인이 부르실 것 같으니 흠 안 보이게 네가 잘하란 소리야.

    “아뇨. 서 회장님이 세인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세인을 이한의 약점으로 이용해 놓고 불러들일 생각을 하다니.

    쓴 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일었다. 이한은 굳이 늙은이의 장단에 맞춰줄 이유가 없었다.

    아직 서 회장의 지지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한이 그동안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서 회장의 라인이 아니어도 이한은 한 계단씩 올라설 수 있는 입지를 다진 뒤였다.

    -그리고 집으로 꽃을 보낼까 하는데, 아무래도 다음이 좋겠지?

    “무슨 꽃 말입니까.”

    -세인이가 예쁘다고 하던 꽃 있어. 나중에 여력 되면 보내마.

    “혹시 세인이랑, 연락하십니까?”

    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모친을 추궁했다.

    -나한테도 하나뿐인 며느리야.

    “자꾸 그러시면 어머니도 안 봅니다.”

    계속되는 통화가 시끄러웠던 걸까.

    작고 여린 세인의 등이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이한의 허리를 꼭 감싸 안으며 달라 붙어왔다.

    누구든 세인을 곤경에 빠뜨린다면, 이한은 고민 없이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어머니일지라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세인만은 지켜낼 터다.

    -그리고 너도 내 아들이야. 부디 몸조심하고.

    몸조심이란 단어가 방지턱처럼 충돌해 의아함을 낳았다.

    혹시 강현준에게 자상을 입은 사건을 알고 있는 건가.

    “끊겠습니다.”

    이한은 아직도 떨리는 세인을 다독이며 통화를 종료했다.

    며칠 후면 서 회장, 덕수의 생일이었다. 그때 세인을 불러들이려 할 거다.

    이한은 그곳에 세인을 데려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서두르죠.”

    이한이 건조하게 말했다.

    ***

    세인이 눈을 뜬 건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 안에서였다. 그녀는 욕조 안의 따뜻한 물 속이었다.

    가슴까지 잠긴 터라 세인이 잠들기 전 시달리던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투명한 물속으로 환자복이 비쳤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갑자기 움직이면 못 쓰지.”

    세인의 등 뒤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한이 뒤에서 받치고 있단 생각까진 못한 터라 약간 놀랐다.

    “어…….”

    세인이 잠긴 목소리로 허둥댔다. 욕조는 큰 편이었으나 이한과 둘이 겹쳐 안기엔 비좁은 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딱 붙은 자세와 욕실 특유의 불빛, 그리고 온도가 괜스레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왜 이렇게…….”

    세인은 열감이 느껴지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다시금 그에게서 떨어지려 노력했다.

    “우선 편하게 씻어.”

    그러자 이한이 몸을 일으키며 세인을 안아 욕조 벽 쪽에 몸을 기대게 했다.

    이한 또한 아까 본 옷차림 그대로였다.

    세인의 아리송한 눈빛을 해명하듯 이한이 말했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급한 대로 들어온 거야.”

    이한이 욕조에서 빠져나가자 수위가 낮아졌다. 레버를 돌려 물을 보충하는 이한의 몸을 살피며 세인이 몸을 웅크렸다.

    물에 젖은 옷이 이렇게 야할 일일까.

    이한은 제 모습이 어떤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세인은 제게 닥친 불행을 되새길 여력도 없이 이한에게 온 정신을 뺏기게 됐다.

    허벅다리에 달라붙은 슈트와 유독 도독해 보이는…….

    “왜 그렇게 봐.”

    세인이 고개를 휙 저으며 빨개진 귀를 어루만졌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자 물이 금세 차올랐다.

    “너무 오래 있으면 현기증 나. 나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씻고 나와.”

    좀 더 질척거릴 줄 알았는데 이한이 쉽게 자리를 뜨려 했다.

    다급히 그의 팔을 잡은 건, 세인의 충동이었다.

    “왜. 거품이라도 채워줘? 향 좋은 거 있는데.”

    이한이 연하게 웃으며 볼우물을 보였다. 그 모습이 또 예뻤다.

    이한이 잠시나마 멀어진다고 생각하자, 덜컥 겁이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금 이한을 마주 보자 불안감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담배, 피워도 돼요.”

    세인이 욕조 한구석에 놓인, 필터만 망가진 담배꽁초를 보며 말했다.

    6년 전, 흡연자였던 이한에게서 요즘은 담배 냄새가 나질 않았다.

    종종 입술에 물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기만 했다. 아마 끊고 있단 뜻이겠지.

    그러나 불면증을 앓는 이한에게 흡연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면, 굳이 금연을 권장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안 태워. 누가 양아치 같다고 해서.”

    “누가요?”

    “기억이 안 나?”

    세인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주 예전 이한에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 병원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던 이한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다.

    늘 가족이 정해 놓은 길만 걷던 세인에게 방탕아 같던 이한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샘하는 마음에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양아치 같아요.’

    솔직히 날티 나기도 했다. 지금 이한에게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면, 그땐 가벼운 느낌이 더 많았다.

    ‘어, 고맙네.’

    ‘그러다 뒤로 떨어지겠어요. 이쪽으로 와요.’

    세인이 부르자 이한이 반도 넘게 남은 담배를 지져 끄곤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메케한 담배 냄새마저 좋았던 그때를 추억하자 희미하게 웃음이 났다.

    “지금 웃음이 나와? 사람 말려 죽여 놓곤.”

    “피워요. 난 괜찮으니까.”

    “물속에 오래 있으면 안 좋아. 씻어.”

    이한이 세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준 뒤 정말 나가려는지 문 쪽으로 향했다.

    “힘들면 불러. 앞에 있을 테니까.”

    이한이 밖으로 사라진 뒤 세인은 슬금슬금 움직여 병원복을 벗었다.

    이윽고 산뜻한 플로랄 향이 욕실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샤워 후 세인은 갈아입을 옷이 없어 비치된 가운을 입고 매듭을 단단히 여몄다.

    거울을 보고 몇 번이나 이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이한에게 어떻게 비칠까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 조금은 한심했다.

    세인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수건으로 누르며 욕실을 나섰다.

    “깜짝이야.”

    이한이 문 바로 앞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칼이 젖은 채로 반짝였다.

    “씻었어요?”

    “응.”

    이한도 간편한 차림이었다. 평상복을 입은 이한은 패션 화보에서 나온 것처럼 태가 좋았다.

    “오래 걸렸어. 하도 안 나오기에 10초만 더 기다려 보고 들어가려 했는데.”

    “들어오기 전에 불러봐야죠.”

    “너에 대한 건 전부 조마조마해. 내 간이 점점 작아지나. 정세인 서 있는 것만 봐도 위태로워 보여.”

    이한은 말에서 그치지 않고 세인을 안아 들었다.

    가운 하나만 입은 터라 차림새를 신경 쓰고 있던 세인은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멀어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떨어져.”

    “혹시 옷은 없어요? 나 불편한데…….”

    “머리부터 말리고.”

    이한이 또 수작질에 시동을 거는가 해서 세인이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그러나 이한은 묵묵히 세인의 머리를 말려주고 제 옷을 가져왔다.

    막상 이한의 옷을 받아 들었으나 속옷이 없어서 머뭇댔다.

    “편의점 속옷이라도 괜찮으면 사 오고.”

    세인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불로 잘 감고 있으면 그다지 티 나지 않겠지.

    무엇보다 이한이 어딘가로 가는 게 싫었다. 이한도 같은 마음일 터다.

    “입어.”

    이한이 눈짓하곤 자리를 떡하니 지키고 서 있었다.

    “안 가요?”

    “마음 같아선 직접 입혀주고 싶어. 많이 양보하는 거야. 뒤돌아 있을 테니까 입어.”

    “…….”

    “아, 해줘?”

    세인은 쭈뼛거리다 뒤돌아서서 가운을 풀었다. 툭, 발치에 떨어지는 가운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움찔하며 티셔츠를 껴입고 반바지에 발을 넣는데, 쿵. 의자에 다리를 찧고 말았다.

    “뒤, 뒤돌아보지 말아요!”

    세인이 소리치며 잽싸게 바지를 입었다. 뒤돌았을 땐 이한이 이쪽을 보며 눈썹을 위로 들고 있었다.

    “봐,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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