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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60화 (60/95)
  • 두 번째 신혼 60화

    이한을 피하기 위해 이리로 옮겼다고?

    그런즉, 세인이 이한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단 뜻과도 같았다.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들.

    전의 세인이라면 죄책감 때문에 혜인의 선택을 따랐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혜인과 등져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점점 악독해지는 혜인에게 차라리 감사한지도 몰랐다.

    “여기, 별장이죠?”

    세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답하자 제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아나 보네? 아무튼 서 전무도 여기 찾으려면 며칠 걸릴 거야.”

    “그럼 저를 숨긴 거네요.”

    “정 지배인, 왜 이래. 서 전무가 혜인이와 나 사이 두고 협박한 거 몰라? 정 지배인을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더는 그딴 짓을 안 하지.”

    “그래서 이한 씨와 저를 이혼시키려는 거예요? 고작 두 사람 만나려고?”

    한숨과 함께 질문한 세인이 헛숨을 내쉬다가 기도하듯 손바닥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고작이라니, 말이 심하네. 정 지배인.”

    “엄마도 허락하셨어. 그러니 너도 차분하게 머리 비워. 서 전무 이러는 것도 잠깐이겠지. 자존심 상해서 그러는 게 뻔한데. 정말 네가 좋아서 이러겠니?”

    “엄마가…… 허락을 해?”

    “응. 이혼 소송 걸 거야. 서 전무 쪽으로 여자 소문 안 좋았던 것도 다 증거 된다더라.”

    “언니.”

    “우선 그렇게 이혼하고, 이 대표님 쪽은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나중에. 일단 내일 일찍 우리랑 떠나자.”

    힘없이 쓰러졌던 혜인이 맞나 싶게 그녀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했다.

    마치 이날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축배라도 되는 양 와인을 머금으며 제일이 말했다.

    “정 지배인도 그쪽 땅에서 새 작업 시작할 준비 해야지.”

    “……정말 다들 미친 거야?”

    세인이 아연실색해서 물었다.

    다들 정상인데 혼자가 비정상인 걸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나 중국 안 가. 이혼도 안 하고 이한 씨랑 헤어질 생각도 없어.”

    몇 년 전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린 이한보다 이 집이 더 끔찍하단 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혜인에게 저지른 잘못만큼, 혜인도 차곡차곡 죗값을 뜯어갔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사무치게 이한이 보고 싶어졌다.

    이한의 품에서 농담이나 들으면서 잠깐일지 모르는 행복을 불안하게 품는 쪽이 훨씬 나았다.

    끝내 자유마저 박탈당한 채 이들에게 끌려가는 것보단, 언니를 버린 악녀가 될지라도 이한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제일 씨랑 내 사이, 서 전무가 알고 있어. 어디에서 입을 나불댈 줄 알아. 우리가 매장이라도 되길 바라니?”

    혜인이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떨었다. 그러자 제일이 매섭게 세인을 노려본 뒤, 혜인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알뜰하게 살폈다.

    눈물 없인 못 봐줄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세인은 볼모로 잡힌 운명이었다.

    세인을 인질로 잡고 있단 건, 결국 그들도 이한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단 뜻이었다.

    “이러는 거, 상황만 악화시키는 거야. 이한 씨랑 통화할 수 있게 해줘.”

    “그건 안 돼.”

    혜인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득달같이 달려와서 너 데려가면 우리는? 그 후에 다시 협박하지 않겠어?”

    이한의 애정이 얼마 못 갈 것처럼 얘기했으면서, 세인이 그에게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었다.

    세인이 입을 열었다.

    “이무영이 날 꼭 데려와야 한다고 그래? 그래야 두 사람 중국에 살림 차리는 데 협조하겠대?”

    “정세인! 너는 나를 보살펴야 하잖아. 내 뜻대로 해야 하잖아. 왜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야?”

    혜인이 현기증을 느낀 듯 제일의 팔을 부여잡았다.

    “제일 씨, 2층 방으로 갈래요.”

    “그래, 우선 쉬자. 쉬고 얘기해도 늦지 않아.”

    제일이 소름이 끼치리만치 다정하게 말했다.

    세인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제일이 혜인을 안고 계단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주변이 조금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랜 시간 사용하고 있던 듯 생활의 흔적이 느껴지는 가구와 가재들.

    “설마…….”

    이곳에서 두 사람이 정을 쌓았던 걸까.

    대체 언제?

    주말이면 혜인은 일찍 잠이 들었다. 그래서 주말이 되어서야 세인은 술을 마시곤 했다.

    그때마다 자는 척했던 거라면?

    밤마다 몰래 나갔다면 말이 되었다.

    일요일엔 점심쯤 객실로 오라고 할 때가 많았으니, 외박까지 가능했을 거다.

    그럼 간병인 이모님도 한통속이었나?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세인이 창으로 가까이 다가가 섰다.

    주변이 온통 산이었다. 이런 곳에 있으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겠지.

    세인은 차분하게 머리를 정돈했다.

    핸드폰이 없으니 이한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내선 전화도 없는 듯했다.

    이한은 아마 자신을 찾고 있을 터였다.

    오겠다고 했으니, 올 거다. 그 믿음이 확고했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이한을 믿게 되었을까.

    “여기가 어딘지 그걸 알아야 하는데…….”

    기억을 더듬어 이곳이 어디쯤이었는지 떠올리려 해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질 않았다.

    “아…….”

    세인은 어렸을 적 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들렀던 작은 슈퍼가 언뜻 떠올랐다.

    혹시 지금도 있을까.

    별장에서 가까운 거리였던 것 같은데. 뛰어가면 되지 않을까.

    몸이 말썽만 부리지 않으면 전화를 할 수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세인은 주변을 신중하게 살폈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환자복 위에 담요를 두른 채 현관 서랍을 뒤져 우산을 하나 찾아냈다.

    신발이 없어서 거실 슬리퍼를 신은 채 바닥으로 내려가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호원 한 명이 그녀를 제지했다.

    “혼자 나가시면 안 됩니다.”

    “잠깐 비 오는 거 구경하려고 그래요. 답답해서.”

    “그래도 안 됩니다.”

    “이 앞에 수영장 자리가 있어요. 그곳이 어떻게 됐는지 그것만 구경할게요. 어차피 달리 갈 데도 없잖아요.”

    세인의 말이 설득력 있었는지 그가 뒤로 물러났다.

    고립된 성처럼 자리한 별장을 지금 세인의 몸으로 벗어나는 건 솔직하게 불가능했다.

    “너무 늦으시면 안 됩니다.”

    “아침 산책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두 사람 2층에 있는데 껄끄러워서 그래요.”

    불륜을 불사할 만큼 불붙은 두 남녀가 한 방에 들어갔다. 그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미는 건 사실이었다.

    세인의 심중을 읽었는지 남자가 세인이 든 우산 대신 더 큰 걸 가져다주었다.

    빗줄기가 굵게 떨어지는 곳으로 세인이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입김이 서리는 기분이었다.

    제법 쌀쌀해진 공기가 여린 몸을 에워쌌다. 세인은 말했듯이 수영장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수영장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잔디가 뒤덮인 공간에서 혜인을 향한 가족들의 염려만 엿보게 됐다.

    은희는 역시나 혜인의 편이었다. 홍춘이 바짝 엎드려 따낸 결혼이건만, 모친은 제문 그룹의 가호마저 포기할 만큼 혜인이 중요하단 뜻을 내비쳤다.

    제 딸의 불륜을 눈감아주고, 또 다른 딸은 희생양으로 삼는 은희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모친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인 걸까.

    뭐긴 뭐야. 별거 아니겠지.

    세인이 눈감고 외면하던 진리를 다시금 깨달으며 쓰게 웃었다.

    세인은 수영장이 있던 자리를 지나 덤불이 우거진 곳으로 향했다.

    세월히 흘러 사라졌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개구멍은 그대로 있었다.

    덤불에 가려진 통로는 세인의 작은 몸이 통과하기엔 넉넉한 편이었다.

    물론 아까 그 덩치 큰 경호원은 힘들 터였다. 세인을 찾으려면 커다란 담장을 빙 돌아야 할 터.

    개구멍을 기어 빠져나온 세인은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집어 두른 뒤 비탈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으나 쉴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넘어지고 슬리퍼가 벗겨졌으나 멈추지 않았다.

    “흐윽, 하윽…….”

    이 지옥에서 나가고 싶었다.

    사실은 출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한이 나타난 거다.

    머물러 썩어가던 세인을 향해 팔을 뻗어준 서이한.

    어쩌면 지금, 이한은 세인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세인이 두 다리를 질질 끌며 아연하게 탄식했다.

    “아…….”

    슈퍼가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세인이 망연자실하게 멈추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보였던 마을 속 지붕들이 빛이 바래 있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흐윽…….”

    허허벌판은 세인을 오래 숨겨주진 못할 터였다.

    여기까지일까.

    세인이 주저앉으려는 순간이었다. 굉음을 내며 세단 한 대가 좁은 길로 들어섰다.

    세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은희나 홍춘이 보낸 사람이라면 도망쳐야 했다.

    너무 겁을 먹은 터라 세인이 빗길에 미끄러져 두 무릎과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녀가 허둥지둥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정세인.”

    그토록 바라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누가 이딴 꼴로 돌아다니라고 했어. 가슴 찢어지게.”

    이한이었다. 다급히 다가온 그가 무릎을 굽혀 세인을 안아 들었다.

    “너 이렇게 만든 나를 죽이고 싶잖아.”

    이한의 머릿결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세인이 파들거리는 손으로 그를 꼭 움켜쥐었다. 다신 떨어지기 싫다는 듯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서이한이다.”

    “그래, 네 남편인데 알아보겠어?”

    “너무 추워요.”

    “늦어서 미안해.”

    세인이 젖은 몸을 편히 맡기도록 그가 꽉 끌어안았다.

    세단의 뒷좌석에 오른 이한이 자리를 잡아 앉으며, 자신의 품에 세인을 가두었다.

    “근데 너무 많이…… 저, 젖었는데…….”

    “비 맞으면서 도망칠 만큼 나한테 오고 싶었단 소리로 들려. 가만히.”

    이한이 바르작거리는 세인의 손을 잡아 단단히 깍지 끼었다.

    바들바들 떨던 세인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자, 이한이 그녀의 젖은 이마에, 뺨에, 그리고 목과 귀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예쁜 걸 떼어놓으려니까 숨이 안 쉬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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