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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9화 (59/95)
  • 두 번째 신혼 59화

    이한은 한산해진 대교를 헤치며 속력을 높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운전대를 잡지 못했는데, 세인을 생각하며 트라우마를 이겨냈다.

    운전대조차 잡지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으로 세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완벽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세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완성형의 인간이 되고자 했다.

    형의 사고로 짊어진 죄책감을, 이한은 반복된 연습을 통해 가슴 저 안쪽의 서랍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거고.

    이한이 핸들을 매끄럽게 감았다.

    손등에 군데군데 묻은 핏자국이 이한의 급한 심경을 대변했다.

    이한의 손을 적신 피는 당연하게도 무영의 것이었다.

    무영의 앞니 두 개가 덜렁거릴 무렵, 냄새를 맡은 그의 수하들이 달려왔다.

    그러나 무영이 비밀리에 파묻은 자금줄의 출처를 알고 있는 이한을 거스를 순 없었다.

    이한은 그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영을 짓밟았다.

    후환? 두렵진 않았다. 기를 제대로 꺾어두었으니, 아마 기어오를 생각조차 못 할 터다.

    혹시나 무영이 멍청하게 덤빈다고 하더라도, 그건 무영의 마지막 발악이 될 것이다.

    그 화살이 세인에게로 향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우습게도 무영은 세인을 해칠 만한 작자가 못 되었다.

    어쭙잖은 감정을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을 무영에게선 풋내가 났다.

    무영은 절대로, 세인을 망가뜨리진 못할 터였다.

    무영의 어설픈 지위와 능력, 뜨거움만 있고 다스릴 줄 모르는 치기.

    세인을 지키고자 한발 뒤로 물러나길 택했던 6년 전의 이한과 그는 어딘가 닮아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마음이 앞선 애정에선 이한이 선배였다.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자 세인이 입원한 병원의 몸체가 보였다. 네온으로 번쩍이는 병원 이름이 이렇게까지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로비에 미끄러지듯 차를 세웠다. 핸들을 놓은 이한이 운전석에서 빠져나왔다.

    이한에게 인사한 송 기사가 서둘러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이한은 뒤이어 달려오는 민성을 향해 물었다.

    “세인이는.”

    “검사실로 옮겨졌습니다.”

    “무슨 검사. 다른 게 남았나?”

    “죄송합니다. 잠시 전화를 확인하고 온 사이에 쓰러지셨습니다. 그 때문에 추가 검사를 하신다고…….”

    재깍 보고를 하지 않은 건 고의가 아닐 터다. 민성의 양쪽 뺨이 홀쭉해져 있었다.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을 걸 알지만 용납은 못 했다.

    이한이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누가 지키고 있어.”

    “경호 팀장이 지킵니다. 검사실까지는 들어가질 못했습니다.”

    여성 경호원을 배치해야겠단 계산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 쪽이지? 앞장서.”

    이한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이자, 민성이 거의 뛰다시피 앞서갔다.

    두 사람이 VIP 병동의 응급 센터에 발을 들였다.

    초음파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 팀장이 이한을 보곤 고개를 숙였다.

    이한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까.”

    “네. 심은희 씨와 함께 들어가신 지 20분 정도 됐습니다.”

    “20분. 기네.”

    이한이 의아하게 고개를 꺾으며 초음파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지체 없이 이한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를 맞이한 건 텅 빈 검사실이었다.

    “…….”

    이한이 주변을 빠르게 살피곤 반대편으로 열리는 문의 위치까지 확인을 마쳤다.

    저리로 나간 건가? 왜?

    “감시를 피했나 본데.”

    뒤따라 들어와 사태를 파악한 민성이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들고 다급히 물었다.

    “정세인 환자 어디 있습니까?”

    “정세인 환자분이요? 아, 그분이라면…… 조금 전에 병실로 올라가셨는데요?”

    이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가 VIP 병동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어서 비상구를 열어젖혔다.

    세인이 쓰러졌단 연락에 근처의 큰 병원으로 데려가랬더니, 은희가 끼어들어 세인을 이곳에 입원시켰다.

    간발의 차로 이한이 늦었다.

    무영의 일만 아니었으면 이상한 낌새를 조금 더 빨리 눈치챘을 터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오른 이한이 거칠게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불 꺼진 병실에는 아주 미약하게 세인의 향만이 남아 있었다.

    “정세인.”

    병실 안엔 아무도 없었다.

    “세인아.”

    이한이 피식 웃으며 병실을 가로질렀다. 다른 검사실로 옮기진 않았을 거다.

    추가 검사라는 거짓말을 갖다 붙이며 시간을 번 건, 세인을 다른 데로 빼돌리기 위함이었을 터다.

    민성이 급히 세인에게 전화를 연결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한이 욕실을 뒤지는 사이, 민성이 발을 동동 구르며 이번에는 은희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역시 허탕이었다.

    “정혜인 씨 병실도 비었습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타난 경호 팀장이 고했다. 그사이 혜인의 병실을 확인하고 온 영리함을 칭찬해 마땅했으나,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정세인, 찾아와.”

    이한의 목소리가 텅 빈 병실에서 울려 퍼졌다. 그가 넥타이를 거칠게 내리며 입술을 일자로 굳혔다.

    ***

    희미한 기억이 꿈결 속에서 조각난 채 부유했다.

    스물두 살의 세인이 핸드폰을 쥐고 끙끙 앓고 있다.

    세인은 닳을 만큼 들여다본 메시지 함을 또다시 읽으며 전전긍긍했다.

    [어디에요?]

    [바빠요?]

    [제문에서 선물 상자를 보내셨는데, 온통 비싼 것뿐이에요.]

    [오빠.]

    이한 오빠.

    메시지 함을 종료한 세인은 초조하게 핸드폰을 쥐곤 입술을 씹었다.

    앳된 세인의 얼굴은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답지 않게 어둡고 초조했다.

    연락이 뜸하다 싶었는데, 이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이한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긴 신호음에 지쳐 세인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연결음이 끊기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 여보세요?”

    세인이 핸드폰 화면을 다시금 살펴, 통화가 연결된 걸 확인했다.

    “여보세요?”

    -이제.

    이른 아침이었으나 이한의 목소리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반가웠다.

    -전화하지 마, 세인아.

    “왜…… 왜 그러는 거예요?”

    이제 내가 싫어서?

    -몸 잘 챙기고.

    뚝. 제 할 말만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허망하게 눈을 깜빡이는 세인의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깜빡거릴수록 뺨이 빠르게 젖어갔다.

    실은 이한의 마음이 변한 걸 진즉 알고 있었다.

    결혼식 후 이한이 곧장 미국으로 떠난다는 얘기를 은희의 입에서 들었을 때부터 예감했다.

    더는 상처받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따끔따끔 통증을 유발했다.

    우습게도 아직 아파할 게 남아 있나 보다. 세인은 못난 얼굴을 감추려 이불로 파고들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세인은 자신의 결혼이 정략혼이 될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결혼이 첫사랑의 연장선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걱정하는 말은 왜 하는데. 나쁜 자식.”

    세인은 열이 오른 이마를 이불에 비비며 쌕쌕댔다.

    변심한 사람과 결혼하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눈이 떠지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

    땀에 흠뻑 젖은 채 세인은 잠에서 깼다.

    오랫동안 꿈을 꾼 것 같았다.

    희미한 기억으로 퍼즐이 맞춰진 꿈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쫓으면 쫓을수록 이한이 멀어져 가는 장면이 스토커처럼 따라붙어 세인을 괴롭히곤 했다.

    오랜만에 이한의 꿈을 꿨다.

    딱딱한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세인은 어두운 공간을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해가 비치지 않는 컴컴한 방이었다. 침대에서 겨우 일어난 세인은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아…….”

    침대 옆 협탁을 더듬다가 겨우 커튼을 찾아 옆으로 젖혔다.

    좌르륵, 두꺼운 커튼이 밀리자 길쭉한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빗줄기가 확인되었다.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을씨년스러웠다. 어두운 바깥을 확인하고 시계를 보니 오전 6시였다.

    어젯밤에 그렇게 쓰러졌으니 한참을 잔 것 같았다.

    세인 스스로 긴 잠을 자고 일어났다기엔 꺼림칙한 구석이 많았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깼고, 안정감보단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세인은 덜렁거리는 링거 줄을 빼버리곤 상처 난 팔뚝을 꾹 눌렀다.

    “별장?”

    조금 더 침착하게 주변을 살핀 뒤에야 이곳이 외갓집 별장이란 걸 기억해 냈다.

    마지막으로 왔던 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이곳 수영장에 혜인의 휠체어가 빠지는 사고가 난 후부터는 찾지 않았다.

    곧바로 이 별장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겼다고 했는데, 아니었을까.

    내부에서 세월의 흔적은 느껴졌으나 관리를 꾸준히 한 태가 났다.

    이곳이 시골 어디쯤이었는데…… 어디였더라.

    세인은 생각하길 미루고 방문을 밀고 밖으로 향했다. 우선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이한은 어디에 있는지. 무영과 은희, 혜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세인이 깨어난 곳은 2층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난간을 짚은 세인이 위축된 걸음으로 움직였다. 혹시 은희가 이곳으로 자신을 옮겨둔 거라면, 좋은 의도가 아닐 거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면제라도 쓴 건지 사지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자 남녀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인이 걸음을 옮길수록 두 사람의 음성이 뚜렷해졌다.

    “내일 바로 출국하는 거예요. 꼭.”

    “그래, 그 얘기만 벌써 몇 번째야.”

    “제일 씨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러지.”

    “집안에는 이미 장기 출장이라고 말해 뒀다니까. 무영이는 회복하면 중국으로 올 거야. 서 전무 눈 피해서.”

    “응. 세인이 일어나면 일찍 움직여요. 수면제를 넣으랬더니 독약을 탄 거야? 왜 이렇게 안 일어…… 어? 세인아.”

    식당 테이블에 앉아 제일과 이야기를 나누던 혜인이 세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일어났니? 이리 와.”

    혜인이 옆자리를 눈짓했다. 그 순간 세인은 제일과 눈이 마주쳤다.

    사늘하고 뱀 같은 눈이 세인을 훑고 지나갔다. 제일은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는 태연한 자태였다.

    그 자신이 역겹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일은 잔잔한 목소리로 세인을 향해 말했다.

    “서이한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말이야. 심 원장님 지시로 이리로 자리를 옮겼어.”

    그러니까, 세인을 감금했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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