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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8화 (58/95)
  • 두 번째 신혼 58화

    세인이 은희를 흘긋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사태를 은희가 알아 좋을 건 없었기에 조심스러웠다.

    “이한 씨는 괜찮아요? 어떻게 됐어요?”

    -마무리됐어. 지금 병원으로 출발할 테니 얌전히, 침대에 딱 붙어 있어.

    “어차피 움직일 힘도 없어요. 이한 씨, 안 다친 거…… 맞죠?”

    -그래.

    “……전화 안 받을 줄 알았어요.”

    세인이 속삭이듯 말을 더했다.

    -받겠다고 했잖아. 어려우면 윤 비서라도 연락이 닿을 거라고.

    “응.”

    -약속 지켜야지.

    “응.”

    세인이 조그맣게 대답한 뒤 흘깃 은희를 바라봤다. 그녀는 세인이 전화로 무어라 숙덕이는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사건이 어떻게 해결됐는지, 무영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했으나 은희가 있는 곳에서 물을 수는 없었다.

    “자세한 건 이따 얘기해요.”

    -바로 병원 옮길 거야. 쉬고 있으면 내가 가서 처리하지.

    “네?”

    -그런 데서 제대로 요양이나 하겠어?

    이한은 웃고 있었으나, 그 말뜻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낫자마자 혜인을 돌보게 할 심산인 은희의 속내를 파악한 것이다.

    “와서 얘기해요.”

    이한에겐 왜 이런 추태만 내보이는지 모르겠다.

    바닥까지 뒤집어 깐 정세인의 내면을 이한에게 전부 발각당하고 있었다.

    창피하고 괴로운 한편, 이한이 실망하지 않아주어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니.

    “바보.”

    -보고 싶단 소리로 들려.

    세인이 눈을 내리감았다.

    “조심히 와요. 보고…… 싶어요.”

    -빨리, 가지.

    이한의 마지막 말이 여운처럼 세인의 가슴에 머물렀다.

    전화를 끊고 세인은 잠시 누웠다.

    사실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친 상태였다. 일어나면 현기증이 일 것 같아서 간신히 정신만 붙잡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은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혜인이 간병인 이모님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여위어 위태로워 보이는 혜인은 약자가 분명했다.

    그러나 전처럼 그녀가 안타까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언니.”

    “너 괜찮니?”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혜인이 뒤를 눈짓해 간병인 이모님에게 말했다.

    “둘이 얘기할게요, 이모.”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하려나. 세인은 그녀가 꺼낼 이야기를 어림짐작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그럼 커피 한잔하고 있을게요.”

    간병인 이모님이 병실을 나서자, 혜인이 전동 휠체어를 작동해 세인의 침대로 향했다.

    전이라면 달려가듯 혜인을 맞이했겠지만, 세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힘도, 마음도 없다고 봐야 했다.

    혜인도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다만 세인의 예상대로 직구를 날렸다.

    “너 이 대표 만났지?”

    “소식이 참 빠르네.”

    세인이 씁쓸하게 웃자 혜인의 입술이 매끈하게 올라섰다. 이미 무슨 얘길 나눴는지 대강은 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 대표가 뭐라고 하든?

    “그것까지는 못 들은 거야?”

    “이 대표가 너 좋다고 하지? 네 마음은 어떤데?”

    “내 마음? 언닌 정말 그게 궁금해?”

    “뭐?”

    세인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혜인이 헛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언니 마음대로 될 거라 생각하면서, 내 의견을 왜 묻는지 모르겠어.”

    세인의 차분한 말에 혜인이 발끈했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결국 중국에 가잔 소리를 할 거잖아.”

    세인이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정곡이라도 찔린 듯 혜인이 눈가를 찌푸렸다.

    “너 어차피 서 전무랑 오래 못 가. 결혼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하는 거야. 이 결혼이 얼마나 갈 것 같아?”

    그러니 수준에 맞는 무영을 택하라는 가당찮은 조언일까.

    “세인아, 잘 모르겠으면 그냥 대표님이 하자는 대로 해. 응?”

    “중국에 가면?”

    “뭐?”

    “언니는 총지배인님, 아니, 강제일이랑 살림이라도 차리게?”

    세인의 빤한 눈빛을 마주한 혜인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거기까지 알고 있는 줄은 몰랐던 표정이었다.

    “누가…… 누가 말했니? 설마 이 대표야?”

    “정말이야? 언니, 강제일 그 사람이랑 만나?”

    “나는…….”

    “정말 불륜이야? 4년도 더 된 거 맞아?”

    거듭된 추궁에 사색이 된 혜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젖어 들었다.

    금세 한가득 고인 눈물은 혜인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렀다.

    “울지 말고 답해 줘. 정말 버젓이 가정이 있는 남자를 만난 거야? 그래?”

    “……그래.”

    혜인이 낮게 대답했다. 적어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는데, 혜인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다.

    마치 숨길 게 없다는 듯한 태도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게 뭐?”

    “언니, 미쳤어?”

    세인의 목소리 끝이 흔들리자, 혜인 또한 음성을 높였다.

    “그 사람뿐이야. 나 그 사람 아니면 죽었어! 내가 죽기라도 바라니?”

    “그래도 어떻게 그래. 어떻게…….”

    “다른 사람을 몰라도 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네가 뭔데! 내 인생을 망쳐놓고! 뻔뻔하게! 네가 뭘 아는데!”

    혜인이 재차 소리 지른 뒤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세인은 할 말을 잃고, 씩씩대는 혜인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도 혜인을 되돌릴 수 없단 걸 깨달은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소리니……?”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은희의 목소리에 혜인과 세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은희의 발치에 종이 가방이 떨어져 있었다.

    “어, 엄마…….”

    혜인이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그녀밖에 모르는 모친을 불렀고, 은희가 두 딸을 번갈아 살폈다.

    “정혜인, 똑바로 말해. 이게 무슨 소리니. 세인이 말이 사실이야?”

    혜인이 입술을 씹으며 대답을 회피하자, 은희의 추궁이 세인에게 닿았다.

    “사실이냐고 묻잖니!”

    세인은 고개를 끄덕여 이 참담한 현실을 알렸다.

    세인이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은희가 나서서 정리하는 게 나았다. 적어도 은희에겐 그럴 자격이 있을 테니.

    쫘악!

    그러나 돌연 날아든 매서운 손찌검은 우습게 혜인이 아닌, 세인에게 떨어졌다.

    “읏!”

    침대에 겨우 기대어 앉아 있던 세인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링거 줄이 당겨지며 손목에 따끔한 통증까지 더해졌다.

    엎어지다시피 한 세인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언니를, 어떻게 돌봤기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거니.”

    은희의 독한 말이 들려오고 나서야 세인은 이 또한 자신의 잘못이 되었단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이것도 내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 걸까.

    세인은 모두 개소리라며 제 편을 들어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른 웃음이 흘렀다.

    “이것도 제 잘못인가요.”

    세인의 목소리는 그녀 스스로 놀랄 만큼 차분했다. 차갑고 어두웠다.

    “뭐?”

    “언니가 유부남이랑 내연 관계인 것도 제 잘못이냐고 여쭸어요.”

    세인은 베드를 짚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구겨진 담요 주름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그래.”

    은희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 뾰족한 말이 세인을 마구마구 할퀴었다.

    그런데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답습된 상처였기 때문일까.

    세인이 살짝 고개를 들어 흐릿한 시야에 은희를 담으며 말했다.

    “제가 언니 뜻대로 이한 씨와 이혼하고 이 대표랑 만나면 될까요? 그럼 제 죄가 가벼워질까요?”

    “뭐?”

    “언니가 그걸 바라요. 제가 그렇게 언니의 불륜을 도우면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니. 혜인아, 정말이니? 정말 네가 그러자고 했어?”

    “엄마, 나는…….”

    혜인이 울고 있었다.

    “정세인, 정혜인!”

    은희가 우아함을 잊고 소리쳤다.

    그래, 은희도 놀랐겠지. 그녀라고 딸의 불륜 소리에 태연할 수 없을 터였다.

    “이걸 누가 또 아니?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이마를 짚은 은희가 한층 독해진 투로 물어왔다. 누가 됐든 입막음을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엄마, 서 전무가 알아……. 그래서 나를 협박했어.”

    잠자코 있던 혜인이 띄엄띄엄 말했다. 세인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세인이 곁에서 떨어지래. 그렇지 않으면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흐윽.”

    혜인이 울음을 터뜨렸고 은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비밀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세인이 조용히 묻자 혜인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은희가 질렸단 표정으로 세인을 표독스럽게 노려봤을 때였다.

    연신 흐느끼던 혜인이 갑작스레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를 발견한 은희가 당장에 그리로 달려갔다.

    “혜인아!”

    몸이 약한 혜인은 충격이나 스트레스에 약했다. 그래서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은희의 외침에도 혜인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혜인을 받쳐 든 은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거기 누구 없어!”

    간병인 이모님이 들어왔다. 벨을 누르고 의료진이 호출되었다.

    그리고 베드 위에 무너진 세인 또한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외롭게.

    하지만 곧 와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

    어둠보다 짙은 색의 세단이 도로를 질주했다.

    계기판과 시간을 확인하는 눈은 주저함이 없었다.

    전화로 세인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어서 그녀를 품에 안아야 이 갈증이, 괴로움이 해소될 것 같았다.

    세인을 혼자 둔 게 마음에 걸렸다.

    민성과 송 기사를 함께 보냈으나, 세인을 살뜰히 살피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은희가 함께 있단 소리에 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대놓고 세인에게 해코지하겠냐마는, 그보다 더한 상처를 주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러니 그런 짓을 벌였지.

    그런 거짓말을…….

    “X발.”

    운전대를 잡은 이한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불길하고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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