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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7화 (57/95)
  • 두 번째 신혼 57화

    경호원에게 안긴 세인은 송 기사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으로 밀어 넣어졌다. 조수석에는 민성도 있었다.

    “윤 비서님.”

    목소리를 떠는 세인이 눈물 바람인 걸 발견한 민성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사모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지금, 당장……! 이한 씨한테 얼른, 가줘요.”

    세인이 겨우겨우 말을 토해내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세인을 데려온 경호원이 그녀의 바람을 차단하듯 끼어들어 말했다.

    “사모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는 지시입니다.”

    경호원과 송 기사, 그리고 민성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세인을 배제한 채 나누는 신호에 그녀는 애가 탔다.

    “얼른 가야 해요. 이럴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전무님은 괜찮을 겁니다.”

    민성이 말하자, 송 기사가 핸들에 손을 올렸다.

    “일단 출발하겠습니다.”

    “그냥 가면 안 돼요! 이한 씨가……!”

    이윽고 차 문이 닫히고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전무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이무영 쪽을 걱정해야 되겠죠.”

    다급한 세인의 마음을 다독이듯 민성이 담담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전무님께서 사모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시는 거 아시죠.”

    “그러니까요. 제발……. 두 사람, 싸우고 있다고요.”

    “전무님이 이무영을 이만큼 참아준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민성은 이한의 승리를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하나 세인이 듣기에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이, 이무영 그 사람, 주먹으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몸싸움이라도 일면 이한보단 주먹이 강한 무영이 유리할 터였다. 이한과 경호원 한 명이 같이 있긴 했지만 그것으론 안심할 수 없었다.

    “호텔 안에 이 대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윤 비서님, 기사님! 제발…… 제발, 차 좀 돌려줘요.”

    급한 마음에 세인이 앞좌석을 두드리며 멀어지는 더블나인을 눈에 담았다.

    “유명한 거로 치면 전무님이 몇 수 위일 겁니다.”

    농담할 기분이 아닌데 민성은 이 사태를 가벼이 여기는 듯 태연히 말했다.

    “또 칼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해요? 도와주지 않을 거면 겨, 경찰을 부르겠어요.”

    “아뇨.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전무님은 정말 괜찮을 겁니다.”

    “그럼 저 혼자라도 갈 거예요.”

    세인이 뒷문 잠금을 해제하며 협박하듯 말하자, 민성의 고개가 뒷좌석을 향했다.

    “사모님!”

    “그쪽으로 사람이라도 더 불러줘요. 안 그러면 저도 못 가요.”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었지만, 그녀는 의지는 확고하게 전달되었다.

    “제가 안전한 곳으로 가지 않으면, 윤 비서님도 곤란하시잖아요. 저 여기서 뛰어내릴까요?”

    “하아…….”

    민성이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 쉰 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곧장 민성이 누군가에게 통화를 연결했다. 경호 인력을 더블나인 지하로 보내란 말을 하는 그를 보고서야 아주 조금 안도했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조직의 행동대장 출신인 이무영.

    그가 사람 하나를 죽이는 데 시간이 1분도 안 걸린다며, 누군가 웃으며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인은 산속으로 사라진 더블나인의 흔적으로 눈으로 좇다가 이내 놓쳤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뺨과 턱을 타고 세인의 주먹 위로 떨어졌다.

    처음엔 놀라서, 그다음엔 안도감. 그 후엔 이한이 걱정되어 눈물이 났다.

    “사모님, 그러다 탈 나십니다.”

    민성이 손수건을 건네오는 바람에 세인은 눈물을 닦으며 심호흡했다. 이렇게 울어서 좋을 건 없다는 걸 세인도 알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바람 좀 쐬시겠어요?”

    세인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 가 달라고 요구했다. 이성을 되찾자 이한의 뜻대로 안전한 곳으로 향하는 게 도움이 된단 걸 깨달은 거다.

    “이한 씨 괜찮겠죠? 정말 아무 일 없겠죠?”

    “네.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전무님 신변에 문제 생기면 모가지 잘릴 인원이 수십은 됩니다.”

    “전에는 칼에 찔렸잖아요.”

    “아, 그건 전무님이 일부러 맞으신 거고.”

    “……네?”

    “……걱정하실 필요 없단 겁니다.”

    일부러 칼을 맞아? 세인의 눈썹이 더욱 심각하게 구겨졌다.

    “흠흠, 사모님 최대한 침착해지세요. 앞으로도 크고 작은 사고는 감수하셔야 합니다. 마음 단단히 드십시오.”

    사뭇 냉철하게 들려오는 민성의 말이 나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그래, 이젠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일을 대비해야 할 때였다.

    세인은 가만히 차창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무영과 이한은 아마 좋은 식으로 결론짓지 못할 터다.

    조금 전, 무영을 보는 이한의 눈빛에 경멸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세인이 처음 보는 싸늘한 표정은 무영을 물어 죽일 듯 살기등등했다.

    원만하게 해결되진 않겠지. 세인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다.

    무영이 혜인과 제일의 일을 함묵한 것, 눈감아주는 대가로 더블나인에 자신을 묶어둔 것.

    또한 혜인을 이용해 자신을 중국으로 데려가려던 것.

    모두 세인은 모르게 진행된 일들이었다. 불쾌감을 넘어서 증오심이 피어올랐다.

    무영이 힘으로 억압하려 했을 땐, 그간의 정과 의리가 깨끗하게 증발했다.

    “개새끼.”

    세인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민성이 들었는지, 그가 헛기침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희 전무님께서 조금 그런 새끼시긴 하시지만, 그래도 사모님껜 진심이십니다.”

    “……네?”

    “좀 봐주십시오. 수년간 사모님만 생각하시느라 나사가 빠진 거지, 어디 내놓으면 놀랍도록 완벽하신 분입니다.”

    이한을 편드는 건지 욕하는 건지 모를 민성의 말에 세인이 힘없이 웃었다.

    “전화가 오는 것 같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전화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민성이 말해 주고 나서야 세인은 제 곁에 가방이 고이 놓여 있단 걸 알게 됐다.

    혹시 이한일까 싶어서 급히 전화를 받았다.

    -넌 어째 날이 갈수록 전화 연결하기가 어렵구나.

    묘하게 날 선 부드러운 음률의 주인은 은희였다.

    “어, 엄마.”

    그래도 엄마라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혜인이가 또 식사를 걸렀단다. 너는 밥도 안 먹는 애를 두고 뭐 하는 거야. 퇴근 안 했니?

    하지만 은희가 전화한 목적은 역시나 혜인이었다.

    너는 어떻니. 별일 없니. 이 정도의 말을 기대하는 세인의 소박한 바람은 오늘도 이뤄지지 않았다.

    -왜 답이 없니?

    세인은 뜨거워지는 눈두덩을 제지하려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요.”

    -일? 호텔 일이야? 다른 사람 시키고 먼저 나오기 어려워? 혜인이가 계속 너만 찾아.

    “오늘은 아무래도 어렵겠어요. 대신 내일 일찍 갈게요.”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전화한 거 아니니.

    “죄송해요.”

    세인이 초라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중국은 또 무슨 얘기니? 너 혜인이랑 중국으로 간다며? 어쩌면 엄마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너희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위가 뒤틀릴 듯 아파졌다.

    “엄마, 저 사직서 냈어요. 그래서 중국 안 가요. 언니한테 그렇게 전해 주세요.”

    -뭐? 혜인이가 허락한 일이야? 혜인이는 너랑 중국 갈 생각이던데.

    “엄마, 저는…….”

    저는, 제 생각은 안 물어보세요?

    세인은 목에 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호흡이 잘되지 않은 터다. 들이켜진 숨이 내뱉어지질 않았다.

    끈적한 덩어리가 폐부를 막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위가 욱신거리며 누가 쥐어짜는 듯 격한 통증이 일었다.

    “흐읏…….”

    세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왜 이러지.

    그녀가 추스를 새도 없이 작은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차창에 기댄 머리가 주르륵 미끄러져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얘는, 왜 대답이 없니? 그렇게 바빠?

    “흡…….”

    “사모님!”

    민성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웅웅 메아리쳤다.

    “사모님! 정신 차려보세요! 차 좀 세워요!”

    세인의 눈꺼풀이 닫혔다. 차라리 편한, 암흑이었다.

    ***

    세인이 눈을 떴을 땐,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따가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시야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본능적으로 이한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이마를 찌푸린 은희를 보고 상심했으니.

    병실 창밖을 보아 한밤중인 것 같은데, 은희는 단아한 투피스 차림이었다.

    “일어났니?”

    “엄마…….”

    갈라진 목소리로 세인이 은희를 불렀다. 몸을 일으켜 등을 기대고 앉자 위통과 두통이 동시에 엄습했다.

    “과호흡에 위경련이라더구나.”

    병명을 전하는 은희는, 엄마보단 의사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약 챙겨 먹고, 일 좀 줄여야겠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윤 비서 목소리가 들려서 다시 전화했더니, 네가 쓰러졌다지 뭐니.”

    “윤 비서님 번호를 알고 계셨어요?”

    세인이 힘없이 대답했다.

    “윤 비서 통해서 간간이 보고받고 있으니 번호 정도는 안다.”

    보고?

    “내가 내 사위 어디서 뭐 하는지 정돈 알아야지. 코빼기도 안 비추는데 그렇게라도 소식을 알아야 어디 가서 할 말도 있지 않겠니.”

    세인은 마른 입술을 씹었다.

    은희가 무슨 말로 민성을 피곤하게 했을지, 감도 안 왔다.

    민성이 있는 그대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눈치 없는 비서는 아니란 게 그나마 다행일까.

    아마 민성이 적당한 선에서 무마한 게 이 정도겠지.

    그래도 남편의 수하에게 전화를 걸어 사위의 행방을 붙는 친정 엄마는 아무래도 버거운 존재였다.

    “윤 비서님은요?”

    “잠시 전화한다고 나갔어. 서 전무 바쁘니? 넌 왜 윤 비서랑 있던 거야. 대체 서 전무는 뭐 하길래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저 핸드폰 좀 주세요.”

    물잔을 내민 은희의 손을 거절하곤 세인이 말했다.

    병실 형태를 보아 이곳은 혜인이 입원한 대연 병원 같았다.

    가깝기론 은희가 병원장으로 있는 상영 병원이 더 가까웠을 텐데…….

    세인을 이리로 입원시킨 저의가 훤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혜인을 보살피라는 뜻일 터였다.

    전화를 받지 않을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이한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이게 누굴까. 픽픽 쓰러지는 정세인?

    “대뜸 시비예요?”

    목소리를 보아 이한은 무사했다. 하아, 안도감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몸 잘 챙기라고 했지.

    조금은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리다니.

    -몸은 좀 어때. 아픈 데는.

    무엇보다 이한은 세인의 몸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재깍 말해. 참지 말고. 내 얘기 듣고는 있나, 환자 정세인 씨?

    누구보다 세인을 위하는 사람이었다.

    세인을 최선으로 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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