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55화 (55/95)
  • 두 번째 신혼 55화

    세인과의 통화를 종료한 이한은 가슴에 붕대를 감는 김 교수의 손을 저지했다.

    “이쯤 하죠.”

    “하지만 아직…….”

    “윤 비서, 이만 나가지.”

    이한이 소파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려 하자, 민성이 조금 곤란한 투로 말했다.

    “총장님과의 저녁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총장님께 오늘 식사는 가족과 단란하게 하시라 전하고. 첫째 아들이 반항기라며. 그럴 때일수록 부모의 관심이 필요한 법이라고도 덧붙여.”

    총장의 첫째 아들이 저지른 온갖 행패를 알고 있는 이한이 관계의 우위였기에, 아쉬울 건 없었다.

    “사모님께 가시겠단 소리를 이렇게 하십니까.”

    이한이 아예 일어나려 하자, 김 교수가 황급히 반창고를 갖다 붙여 환부 처치를 마무리했다.

    “이번엔 물 들어가지 않게 꼭 좀 조심해 주게. 계속 덧나면 입원 치료를 해야 할 테니.”

    주름이 자글자글한 김 교수는 이한이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주치의였다. 그러니 이한의 성미도 잘 알았다.

    “몸 하나는 애지중지하시는 도련님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쯧쯧.”

    김 교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이한은 셔츠 단추를 잠그며 빙긋 웃었다.

    “요즘 물 맞을 일이 좀 많아서 그럽니다.”

    “물 맞을 일? 수영장이라도 다니나? 이 몸으론 안 돼.”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고, 혹시 서 회장님이 묻거든 그렇게 둘러대시죠.”

    이한이 에둘러 말했다. 새벽 내내 열기가 가시질 않아 샤워기 밑에서 몸을 가라앉히는 게 일상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순 없으니.

    이한이 옷차림을 정돈하자 민성이 재킷을 내밀었다. 외출 준비가 마무리되는 동안 혀를 찬 김 교수가 먼저 자리를 떴다.

    “중국 건은 어떻게 됐어.”

    “전화 한 번이면, 외교부와 인터폴 협력해서 압수 수색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 총장님과 식사도 가시는 편이…….”

    이한이 재킷을 입고 나자 민성이 고개를 저으며 전무실 문을 열어 길을 냈다.

    이무영. 더러운 고리를 오늘, 끊어낼 터였다.

    ***

    이한과 통화를 마친 세인은 저쪽의 경호원을 향해 다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안으로는 개인 경호는 못 들어가니까 여기서 기다리시면 돼요. CCTV가 있으니, 정 걱정이면 경호실장님께 보여 달라고 하셔도 될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는 그녀 나름의 정보를 건넸다.

    “예.”

    세인은 딱딱한 표정으로 짧게 대꾸하는 듬직한 장정 둘을 뒤로하고 움직였다.

    곧장 바로 향하는 문을 밀었다. 양쪽으로 달린 묵직한 문이 거대한 홀로 세인을 안내했다.

    높은 천장을 어두운 공기가 가득 메웠다. 끝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공간인데도 개방감이 없었다.

    굵은 기둥과 장식품으로 테이블 사이를 막아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심찮게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곳곳에 달린 CCTV가 사고를 방지하는 관제탑 역할을 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세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 한 명 없는 홀 안을 꼼꼼히 훑었다. 손님은커녕,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영업일이 아닌가? 더블나인에 속한 편의 시설은 돌아가며 한 달에 한 번 휴장했다.

    오늘이 그날임을 주장하듯 고요한 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인이 제일 구석진 곳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무영을 찾은 건 한참 뒤였다.

    그가 앉은 테이블 위로 빈 병 하나와 이제 막 뚜껑을 연 두 번째 술, 과일과 얼음, 잔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무영의 맞은편에 술이 반쯤 남은 잔이 있는 걸 보아 상대가 있었던 듯했다.

    아마도 아까 통화할 때 함께 있던 혜인의 내연남일 터다.

    “대표님, 저 왔습니다.”

    세인이 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무영은 소파 헤드에 팔을 걸치고 느긋하게 술잔을 꺾고 있었다.

    “대표님?”

    흰자위에 실핏줄이 번진 무영이 그제야 세인을 마주하고 입을 길게 늘어뜨려 웃었다.

    “어어. 우리 부총.”

    “벌써 취하셨어요?”

    “시비냐?”

    “오늘 휴장 같은데, 하필 여기서 드세요. 다른 데로 옮길까요?”

    세인은 적막한 공간에 불편함을 느끼며 말했다.

    “앉아. 조용해야 할 말도 하지. 한잔할 거냐?”

    “주말 아니면 안 마시는 거 아시잖아요.”

    세인은 맞은편에 앉으며 가방을 무릎 위로 올렸다.

    얼마 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사직서가 가방 안쪽에서 세인을 재촉하고 있었다.

    눈치를 봐서 사직서를 건넬 작정이었다.

    결심이 흔들릴 일은 없을 터였다. 혜인의 일과 끊이지 않는 모함, 소문. 피곤한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블나인의 일이 싫냐고 묻는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보람을 느낄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고소장까지 선동할 만큼 미움이 쌓인 혜인과의 관계를 정돈하려면, 사표를 내는 게 옳았다.

    혜인이 이번 한 번으로 멈출 거란 생각은 안 했다.

    다른 식으로 계속 뒤에서 사람을 부려 세인을 괴롭힌다면, 애꿎은 피해자가 생길지 몰랐다.

    차라리 혜인에게 직접적으로 미움을 받는 게 나았다.

    또한, 대표가 바뀐다는 소문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것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VIP를 밀접하게 서비스할 때마다 들은 이야기가 제법 됐다.

    대표가 바뀌면 더블나인의 판도도 바뀌겠지.

    조직원의 누군가가 빈자리를 꿰찬 뒤엔, 세인은 새로운 상사를 받아들이기 위해 피곤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는 사실, 쉬고 싶은지도 몰랐다.

    “중국에 선환이를 아주 보내놨어.”

    무영이 대뜸 말을 꺼냈다.

    이선환은 무영의 오른팔이자 실질적인 그의 비서였다.

    “이 실장님 요새 얼굴 뵌 지 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중국에 계셨나요?”

    “거기에 더블나인을 모체로 삼은 리조트를 올릴 거야. 사업 계획은 다 되었고 공사 날도 나왔어. 앞으로 2년. 2년이면 돼.”

    2년이란 짧은 시간을 들여 거대한 성을 짓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인부를 부리겠지. 그만큼 이 사업에 적극적이란 뜻일 터다.

    “그러는 동안 하이난에도 자리를 알아볼 거고, 다음엔 거기에 세울 거야.”

    “사업 확장을 하시는 건가요?”

    “그래. 이번 공사 들어가면 오픈 준비 시작이다. 할 일이 많아.”

    “그래서 대표직을 내려놓으시는 거군요. 중국으로 가시려고요.”

    그런 거라면 좌천이나 해임이 아닌, 승진과도 같을 터다.

    초기 투자자들이 이윤을 조각조각 갈라 먹는 구조인 더블나인보단, 독식할 수 있는 중국 리조트가 무영에게 이득일 터다.

    “그래. 부총아, 너도 가자.”

    “네?”

    “뭘 그렇게 놀라. 자리 이동하는데 아끼는 직원 데리고 가는 게 특이한 것도 아니고.”

    “대표님, 그렇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내가 가는데 네가 안 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모르겠다. 만약 이한이 귀국하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이동해서 새 궁전을 짓는 데 인생을 할애했을까.

    그게 혜인이 뜻이라면 기꺼이 그랬을 터다.

    “혜인이도 안다. 같이 가기로 했어. 문제없잖아.”

    무영은 아무렇지 않게 세인보다 먼저 혜인과 상의했단 말을 하고 있었다.

    세인은 그저 혜인의 인형이란 걸 무영도 인정하고 있단 뜻이었다.

    “저 사실 오늘 사직서 내려고 했어요.”

    무영의 두꺼운 손이 술잔을 꽉 쥐는 게 보였다. 산등성이 같은 핏줄이 시퍼렇게 융기했다.

    “사직서?”

    “네.”

    “부총아, 원래는 국내 지점을 늘리려고 했다. 그런데 투자가 안 들어와. 확답 받아놓은 인사들도 발을 다 빼버려서 중국으로 눈 돌린 거다.”

    “그렇군요.”

    세인은 이제 저와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너는 정말 이 일에 뜻이 없냐? 평생 정혜인 뒷바라지나 하면서 살게? 중국 따라가면 즉시 총지배인 자리 줄 건데?”

    “죄송합니다. 조금 쉬고 싶어요.”

    “서이한 때문이겠지. 그 자식이 그만두라던? 하이난은 네 이름으로 세울 계획인 건 알고 하는 소리냐?”

    “대표님, 그게 무슨…….”

    “그 새끼랑 이혼해라.”

    이혼이란 단어가 또다시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세인의 눈가에 그늘이 뒤덮였다.

    “너 결혼 힘들어했잖냐. 서이한 들어왔다고 해서 일일이 맞춰줄 필요 있어? 합의 이혼이 힘들면 변호사를 선임하든, 위자료를 내든. 내가 해결해 주면 되잖아.”

    “…….”

    “중국에 혜인이 병원이랑 의료진도 전부 알아놨어. 굳이 네 손으로 혜인이 돌볼 필요 없게 전문가들로 의료팀 꾸려놨다고.”

    그러니까 혜인과 함께 중국으로 가되, 그녀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일에 열중해 보란 유혹이었다.

    세인은 차갑게 굳은 손으로 물을 따라 마셨다. 갈증이 해소되긴커녕,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고 생각하는지 무영도 술을 마시며 세인이 대답하길 기다렸다.

    “이거 흔한 기회 아니다.”

    얼마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이건 그냥 아끼는 직원에 대한 호의인가요?”

    “뭐?”

    혜인이 말했던, 무영이 자신을 좋아한단 말.

    그게 이제 좀 실감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특혜를 준다는 건 역시, 세인에게 바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단 소리였다.

    세인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무영의 부리부리한 눈가가 구겨진 채였다.

    “대표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 그래서 저한테 같이 가자고 하시고 이혼하라고 하는 거예요?”

    “하, 이거 직구네.”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세인이 가방 입구에 손을 넣어 사직서를 꽉 쥐었다.

    “맞으면. 그 새끼랑 이혼하고 나랑 살 거냐?”

    확답과도 같은 말에 심장이 주저앉았다.

    결국, 그런 거였구나.

    “……사직서 낸다는 마음, 되돌릴 생각 없습니다.”

    “누가 놔준다던?”

    “그리고 이혼할 생각도 없고요. 대표님한테 제 마음은 의리, 우정입니다. 다른 마음 품…….”

    쨍그랑!

    무영이 던진 유리잔이 바닥에 흩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서이한 그 새끼가 그렇게 대단해?”

    “대표님.”

    세인이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지 못하고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무영은 폭발 직전의 화산 같았다. 눈에 화가 가득 깃들었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무영은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엎어버릴 것처럼 씩씩댔다.

    세인은 그의 곰 같은 덩치가 이제야 위험하게 여겨졌다.

    “서이한에게 묶여 있나, 나한테 묶여 있나 어차피 같은 거 아니냐? 그래서 기껏 구제해 주겠다잖아!”

    그러니 무영이 베푸는 은혜를 잔말 말고 받아들이란, 이기적인 배려였다.

    “저는 이한 씨에게 묶여 있는 게 아니에요.”

    “하, 그럼 뭔데? 첫사랑? 우리 부총 그렇게 안 봤는데 감상적인 데가 있어.”

    “……이제 그 사람한테 기대보려 해요.”

    세인이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사직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