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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4화 (54/95)
  • 두 번째 신혼 54화

    커다란 기계가 위협적으로 작동하는 검사실로 혜인이 홀로 들어갔다.

    보호자는 밖에서 대기하란 소리가 오늘처럼 반가웠던 때가 없었다.

    세인은 병원 복도 벤치에 앉아 등을 기댔다.

    손에서 이한의 온기가 사라지자 쓰나미처럼 걱정이 밀려들었다.

    행복 뒤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은 세인을 씁쓸하게 했다.

    전이라면 당연했을 일상이 메말라 보이는 건, 이한이 열어준 세상이 따뜻하고 기분 좋기 때문이겠지.

    위가 아파왔다.

    지이잉.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시야를 낮추고 소리의 진원을 찾았다.

    혜인이 걸치고 있던 카디건 안주머니에서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누구지?”

    부모님인가 싶어 핸드폰 액정을 살폈으나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잘못 걸린 건가…….”

    전화가 뚝 끊겨 핸드폰을 다시금 카디건 안으로 넣으려던 때였다.

    11자리 숫자가 낯익단 생각이 스쳤다.

    수백 명의 회원 정보를 달달 외우다시피 하는 세인에게 전화번호를 외우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번호는…….”

    무언갈 깨달은 세인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톡톡, 누군가의 이름을 입력하자 같은 번호가 나왔다.

    이 번호의 주인은 세인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혜인과는 별다른 접점이 없는 남자였다.

    “무슨 일로 연락한 거지?”

    세인은 기묘한 느낌에 실례란 걸 알면서도 혜인의 핸드폰 패턴을 풀어 통화 내역을 살폈다.

    그와 혜인이 하루에 3번 정도 통화를 나눈 흔적이 있었다.

    이어 메시지 함을 훑던 세인의 손이 하얗게 질려갔다.

    “어째서, 어째서…….”

    한동안 메시지 함을 살피던 세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다시 메시지 함을 살폈다가 허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랑을 속삭이고 내일을 약속하는 문자 내용, 잠자리를 암시하는 은밀한 언어는 영락없이 연인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그러나 문제는…….

    “어째서 언니가…….”

    혜인이 대화를 나눈 남자가 유부남이란 기막힌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세인이 잘 아는 남자였다.

    대체 언제부터?

    새까맣게 몰랐던 현실을 마주한 세인은 머리가 잘 회전하지 않아서 공연히 눈만 깜빡였다.

    혜인이 평범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 당연히 그녀의 사랑을 응원했을 터였다. 혜인의 행복한 미래를 빌어주었을 거다.

    하지만.

    “가정이 있잖아…… 그 사람은…….”

    세인이 괴로운 혼잣말을 던지며 깊은 탄식을 삼켜냈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충격을 미뤄두고 이 사태를 잠재울 뾰족할 방안부터 연구해야 했다.

    혜인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하는 게 최선이겠지.

    남자와 혜인이 나눈 마지막 메시지를 떠올렸다.

    [전에 말했듯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해.]

    [언제까지 기다려요?]

    [금방이야. 애처럼 굴지 마.]

    [보고 싶어요.]

    [나도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설마 이 메시지 때문에 오늘 아침, 혜인이 병실 물건을 집어 던진 걸까?

    그렇다면 남자의 존재가 혜인에게 깊게 관련되어 있단 소리였다.

    혜인을 추궁하다가 그녀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세인은 한 가정을 박살 낸 혜인을 두둔하는 자신에 놀라 순간 토기가 치밀었다.

    이번엔 세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흙처럼 내려앉은 어두운 생각을 떨쳐내고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부총아.

    이한이 몇 번이나 조심하라고 하던 이무영 대표.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호텔 언제 들어오냐. 따로 할 말이 있는데.

    “한두 시간 걸릴 거예요.”

    -그래. 혜인이는?

    “검사 중이에요. 언니는…… 왜요?”

    -아니. 뭐 잘 있나 궁금해서 그러지. 그럼 알았다. 들어오면 보자. 지하에서 술이나 마시련다.

    “네. 대표님.”

    전화를 내려놓고 눈두덩을 눌렀다.

    전화가 끊긴 줄 알았는데, 아직 통화가 연결된 상태로 무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검사 중이라는데. 그래서 형, 대체 정혜인이 어쩔 거냐?

    -별수 있어? 서이한이 갑자기 찾아와서 정리하라고 지랄 떠는데 어떻게 해? 우선은 그러는 척해야지.

    -형수는 어쩌고?

    -무영아, 나 이혼은 안 한다. 혜인이랑도 못 헤어지고.

    -쯧. 두 여자 챙기느라 허리 휘겠어.

    상대를 타박하는 무영의 목소리는 가볍기만 했다.

    -난 다음 주 중으로 먼저 중국으로 출국할 테니까, 너도 혜인이 올 때 정세인도 같이 오게 구슬려 놔.

    -그게 말이 쉽지.

    욕설이 붙은 무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영과 대화를 나눈 목소리는 세인도 익히 아는 남자의 것이었다.

    조금 전 혜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온 11자리 번호의 주인공과도 일치했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세인은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정혜인 씨 보호자님.”

    간호사의 부름에 세인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핸드폰을 봤을 땐 통화가 끊긴 후였다.

    “정혜인 씨 보호자님?”

    “……예.”

    세인이 핏기 없는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대체 어떤 표정으로 혜인을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혜인을 간병인 이모님께 떠맡기다시피 하고 호텔로 달려온 길.

    세인은 도통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탕비실 구석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별수 있어? 서이한이 갑자기 찾아와서 정리하라고 지랄 떠는데 어떻게 해? 우선은 그러는 척해야지.’

    분명 서이한이라고 했다.

    설마 그 남자에게 정리하란 압박을 넣었다는 걸까.

    그렇다면 이 모든 걸 이한도 알고 있었단 뜻과도 같았다.

    세인의 원망은 곧장 이한에게로 향했다.

    “왜 말을 안 해줘?”

    그러나 숨길 수밖에 없던 이한의 마음도 이해했다.

    세인의 상황이었어도 쉽게 말하지 못했을 터였다.

    당신의 형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단 말은 고민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터다.

    아니, 그래도 말해 주지.

    조금만 덜 초라하게 해주지.

    이한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아서 세인은 울적해졌다. 너무 창피했다.

    또 하나, 이 사실을 무영도 알고 있었다.

    직설적이고 표정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일을 덮어두었다?

    그것도 두 사람의 관계에 일조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한이 말했듯 무영을 믿어선 안 되는 걸까.

    출국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또 뭘까.

    세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호텔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 정신을 놓고 있었다.

    “저, 지배인님?”

    “네, 지민 씨.”

    “그거 마시려던 거 아니에요?”

    지민이 세인의 손을 가리켰다. 싱크대에 막 담아온 아이스 커피를 내리붓던 세인이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지민 씨.”

    “에이, 저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저라도 괜찮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지배인님 오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지민이 아주 조심스럽게 세인의 등을 어루만졌다. 지민에게까지 걱정을 끼칠 만큼 오늘 최악이었구나.

    “고마워요.”

    세인이 애써 웃자, 지민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제 거 드실래요?”

    생크림을 가득 얹은 커피를 내미는 지민이 귀여워서 세인은 결국 진심으로 웃어버렸다.

    해맑고 티 없는 지민이 참 예쁘면서도 대단했다. 세인이 가지지 못한 밝은 성격, 모난 데 없는 둥그럼이 오늘따라 부러웠다.

    “와. 지배인님 그렇게 웃으실 때마다 저 떨려요.”

    “그게 뭐예요.”

    “아니이, 너무 예쁘시니까……. 약간 남편분, 흠흠. 서이한 전무님이 부럽달까?”

    “그러지 마요. 그리고 지민 씨가 훨씬 예뻐요.”

    세인이 민망해하자 지민이 손사래를 치며 걸쭉한 추임새를 얹었다.

    “어휴. 제 주제를 제가 아는데요.”

    세인이 그런 지민이 마냥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럼 지민 씨, 먼저 퇴근해요. 난 대표님 뵙고 퇴근할게요.”

    “네.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민이 퇴근이란 소리에 가벼운 걸음으로 탕비실을 지나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세인도 손을 씻고 나섰다.

    대표실로 들어가기 전, 이한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려던 때였다. 무영의 비서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배인님, 오셨어요?”

    “아, 김 비서님.”

    “대표님 자리에 안 계시는데……. 혹시 따로 연락 안 하고 오셨어요?”

    그제야 무영이 지하에 있겠단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지하라면 무영이 자주 가는 바를 얘기하는 거였다.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그럼.”

    웃는 얼굴로 인사를 마친 세인은 차가운 손을 움켜쥔 채, 지하로 향했다.

    지하 바의 입구. 금색 사자 얼굴과 커다란 어항. 누구의 취향인지 공간은 고리타분하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세인은 로비 소파에 자리가 빈 것을 확인하고 잠시 앉았다. 멀리서 따라오는 두 명의 경호원을 애써 모른 척했다.

    세인이 경호를 받는 건 태어나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6년 전,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당시 이한은 마음이 떠난 그를 대신하듯 경호원 두 명을 세인에게 붙여주었다.

    그들은 세인의 차를 뒤쫓았고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다. 뷰티 숍까지 따라올 만큼 열렬했었다.

    감시 차원의 경호라고 생각했다.

    제문의 사람이 되기 위해선 그들의 규격 안에 들어가야 하니, 세인이 일탈하지 못하도록 보는 눈을 심어둔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자 그것도 이한의 보호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한은 자신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저 다루기 좋은 아내를 얻어두고 떠난 게 아니라면, 뭔가 세인이 알지 못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한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

    세인은 습관처럼 한숨을 내쉰 뒤에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은 이는 이한이었다.

    -네. 여보.

    뻔뻔한 그의 목소리에 단숨에 긴장감이 흐려진다. 굳은 어깨가 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뭐야. 나 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호텔에서 썩어가니 그럴 기분이 안 들지.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상처를 다시 꿰매는 중인데.

    “상처를 꿰매요? 왜요?”

    세인의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상처가 덧난 걸까?

    -너무 아프네. 정세인이 키스해 주면 금방 나을 것도 같고.

    이한이 전혀 아픈 것 같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이구나. 도무지 이 남자를 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못 나가요.”

    -매정하네, 우리 여보.

    “그 여…… 여보 소리 좀 안 하면 안 될까요.”

    -그래, 자기.

    세인은 다른 의미로 두통을 느꼈다. 그러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결국 이한이 곁에 있는 한 행복은 그녀 곁에 머물 터였다.

    돌아갈 집이 있었고 그곳엔 이한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풍랑이 힘겨워도 비는 결국 그칠 테고, 그 시간을 이한이 함께해 줄 터다.

    지붕이 되어줄 남자가 있기에 좌절만 남은 건 아니었다.

    “이한 씨.”

    -말해.

    “나를, 사랑해요?”

    -세인아.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치 그의 애정을 함축해 놓은 것처럼 단정한 울림은 깊고 진했다.

    “그럼 나를, 도와줄 수 있어요?”

    -당연한 걸 묻지 마.

    “…….”

    -내가 널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 봐.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갖다 써도 좋고. 네가 원하면 뭐든 못 할까.

    “그럼 앞으로는 비밀 만들지 말아요.”

    -……지금, 어디야. 누구 만나?

    눈치 빠른 남자였다. 그러니 세인이 몰랐던 것들을 혼자 알고 단속하고, 그녀를 안전지대로 밀어놓았던 걸지도 몰랐다.

    “이 대표 만나서 사직서 낼 거예요.”

    세인이 힘주어 말했다.

    세인의 각오가 전해졌을까.

    -좋은 선택이긴 한데, 단둘이 만나지는 말고.

    “응. 사람들 많은 곳이에요.”

    세인은 경호원 둘과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무영이 갑자기 돌변해서 목을 조르진 않을 터다.

    세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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