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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3화 (53/95)
  • 두 번째 신혼 53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던 세인은 멈칫했다. 문 바로 앞에 이한이 서 있었다.

    “뭐예요?”

    “착실하게 지키고 있었지.”

    “굳이……?”

    “굳이 뭘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랑이라던데.”

    이한이 믿기지 않는 소릴 하며 세인의 손에 들린 수건을 가져갔다. 그러곤 세인을 이끌어 화장대 의자에 앉혔다.

    위이잉. 뜨거운 바람이 세인의 머리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이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드라이어를 들고 어설프게 머리를 헤집는 그를 보자 황당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세인은 사자 갈기처럼 풍성해지는 머리칼을 보다 못해 손을 뻗어 드라이어를 가로챘다.

    “이만 줘요.”

    “아직 덜 말랐어.”

    “더 말리면 다시 감아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저 말리는 데 몰두했던 이한이 그제야 붕 떠버린 세인의 머릿결을 발견하고서 물러섰다.

    “꼭 그거 같네, 마리모.”

    “어이가 없네요.”

    “당분간 휴가계라도 써. 곧 특검 꾸려질 거야. 조사 대상에 더블나인도 포함이고.”

    이한이 그녀의 머리칼 끝을 매만지다 말고 현실로 돌아와 말했다.

    “특검이요?”

    단순 조사가 아닌, 대대적인 숙청을 하겠단 포부가 느껴지는 단어에 세인이 놀라 되물었다.

    하나 그래봤자 으레 하는 겉핥기식 청소일 터다. 빠져나갈 사람은 전부 빠져나가겠지.

    “괜히 시달릴지 몰라. 휴가계 내고 어디 멀리 가 있을까? 소환하는 건 막을 테니까.”

    머리를 빗질하던 세인이 거울에 비친 그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퇴사 생각해 보려고요.”

    “진심이야?”

    이한의 눈매가 좁아졌다.

    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일부러 부산스레 화장품을 찍어 발랐다.

    이한의 뜻을 따르는 게 겸연쩍달까. 어쨌든 마음은 그를 향해 종을 울렸고 벗어날 길도, 방법도 몰랐다.

    그러니 마음이 울리는 대로 한 번 가볼 생각이었다.

    상처만 남게 되더라도 지금의 이한이 너무 달콤해서 그를 놓을 수가 없을 테니.

    이한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화장품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챙겨 바르는 게 많지 않아서 그마저도 금세 끝났다.

    “갑자기 심경이 변한 이유는.”

    “그만둔다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마냥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한은 생각보다 기쁜 내색이 아니었다. 그는 우려하는 표정으로 세인을 직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숨기지 마.”

    “그런 거 없어요.”

    “고소장 받은 건, 그게 아무 일도 아니야?”

    고소장? 세인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선 이한을 보며 물었다.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요?”

    지윤이 고소한 일은 아직 새어 나가지 않았을 텐데…….

    더군다나 손쉽게 해결되어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일이었다.

    “또 뒷조사한 거예요?”

    세인의 눈가가 뾰족해졌다.

    이한이 손을 뻗어 찡그린 세인의 콧대를 어루만지고 이어 눈가를 쓸었다.

    세인은 손을 꾹 말아 쥐면서도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하면, 안 될까?”

    “그걸 말이라고…… 읏.”

    순식간에 화장대 위로 세인의 몸이 올라갔다. 이한이 세인을 안아 옮긴 것이다.

    세인이 중심을 잃는다 싶을 때, 이한이 그녀의 허리를 당기며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짧은 바지를 입은 탓에 허벅지 안쪽으로 슈트 하의가 마찰했다.

    “순 수작만 부리고…….”

    “정세인.”

    “왜요.”

    “다 버리고 나한테 오면 돼. 쉽지 않아?”

    다 버리고.

    그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혜인에 대한 죄책감, 가족에 대한 속죄.

    그런 것들을 떨치고 이한과의 행복만 생각하라는 말이 어찌 달콤하지 않을까.

    그러나 세인은 그 이기적인 행복 속으로 이한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한이 언제나, 6년 전 그때처럼 고결하고 고귀하게 머물러 주길 바랐다.

    그래야 이한과의 관계가 더 기울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이 덜 초라해질 것 같았다.

    “이한 씨는 늘 욕심이 과하시네요.”

    “너에 한해서 끝도 없는 편이지.”

    “확실하게 말해 둘게요. 나는 혜인 언니를 평생 놓지 못할 거예요.”

    마른침을 삼키는 세인의 목 안쪽이 아릿했다.

    “정세인, 그 사고로 널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용서 못 하지.”

    “내가, 나를 용서 못 해요.”

    “너 그때 고작 네 살이었어. 그 어린 게 뭘 알아. 네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말이나 제대로 했어?”

    “지금의 난 스물여덟이잖아요.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을 책임질 나이에요.”

    단단한 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것처럼 이견이 좁혀지질 않았다.

    6년 전의 이한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혜인을 조금 질투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불편하고 무거웠다.

    “미안해.”

    “이한 씨가 왜요?”

    “널 두고 가는 게 아니었어. 네가 이렇게까지 바보인 줄 알았다면.”

    이한이 시큰한 숨을 토해냈다.

    “네 곁에 남았겠지. 넌 강한 줄 알았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등신처럼.”

    세인은 누군가 심장을 자근자근 밟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이한이 뻔뻔하게 구는 것보다 미안하다 사과하는 게 더 괴롭다는 걸 방금 깨달았다.

    “이한 씨, 나 여기가 아파요.”

    세인이 지끈거리는 심장을 엄지로 꾹 눌렀다.

    “왜 자꾸 여기가 아픈지 모르겠어요.”

    미간을 좁힌 그가 세인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달래줘야겠네.”

    장난스러운 말이었는데,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어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변태.”

    세인이 작게 속삭이자 이한이 쓰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품 가득 세인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그가 더 아파하는 것 같았다. 이한의 머릿결을 쓸어보고 싶은 충동에 세인은 잠시 갈등했다.

    괜히 그를 만져서 어젯밤처럼 참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욕심을 거뒀다.

    대신 그녀는 아까부터 몇 번이나 울리고 있는 이한의 핸드폰을 눈으로 찾으며 그를 살짝 밀어냈다.

    “전화 계속 와요. 얼른 받아요.”

    “아직 어디가 아픈지 못 봤잖아. 우리 세인이 어디가 아프다고? 여기?”

    이한이 웃음을 머금고 묻는 터라, 세인은 긴장을 풀고 조금 세게 그를 밀어냈다.

    화장대에서 뛰어내리려 하자, 이한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세인을 인형처럼 가뿐하게 들어서 내렸다.

    “너무 가벼워서 큰일이야.”

    “옷 갈아입을 거예요. 따라 들어올 생각 말아요. 문 앞 대기도 금지.”

    제법 앙칼지게 말을 남긴 세인은 드레스룸 문을 닫았다.

    심장이 아프면서도 간질간질, 그리고 쿵쾅거리고 있었다.

    세인은 핸드폰을 찾아 간병인 이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전화 왔던 게 마음에 걸렸던 터다.

    신호음이 얼마 울리지 않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이제 일어나셨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원망이 섞여 나왔다.

    “네, 이모님. 무슨 일 있어요?”

    -어휴. 말도 마셔요. 아가씨께서 갑자기 깨셔서는 물건을 죄 집어 던지셨어요.

    “다친 데는요?”

    -다행히 다치신 데는 없는데…… 식사도 마다하시고 한참을 소리 지르시더니 겨우 다시 잠드셨어요.

    “죄송해요. 조금만 더 부탁드릴게요. 금방 갈게요.”

    조금 전 반차를 내겠다고 말해 놓았으니, 호텔엔 천천히 들어가도 문제없을 터였다.

    -네. 알겠습니다.

    간병인 이모님껜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높은 연봉과 보너스, 때마다 드리는 값비싼 선물로는 충당할 수 없이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었다.

    세인은 옅은 네이비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뒤로 넘겼다.

    출근도 해야 하니, 단정한 차림을 택한 거다.

    드레스룸 밖으로 나가자, 이한도 슈트를 전부 갖춰 입은 상태였다. 짙어진 향수 냄새가 오감을 자극했다.

    세인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우물댔다.

    “문 앞에 있지 말라고 했잖아요.”

    “몇 걸음 떨어져 있던 거 안 보이나.”

    이한이 뻔뻔하게 대답하며 시계를 살폈다.

    딱딱한 남자의 손목에서 빛이 나는 값비싼 시계. 그에겐 흘러가는 1초가 금보다 귀할 터였다.

    그래도 상처 입은 몸으로 일터에 나가는 건 가혹해 보였다.

    “출근하는 거예요? 그……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 지켜야 할 밥그릇이 많으니 애써봐야지.”

    이한의 고충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짊어진 무게가 과중해 보였다.

    “아프면 바로 김 교수님 연락해요. 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아요?”

    “같이 놀아줄 거 아니면 꼬시지 마.”

    그럴 수는 없었기에 세인도 그쯤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한과 함께 현관을 나섰다. 차고로 향하려던 세인의 손을 깍지 껴 이한이 이끌었다.

    “가는 길이야. 같이 타고 가.”

    대문을 나선 세인은 문이 활짝 열린 세단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무래도 저 차에 타는 건 부담스러웠다.

    송 기사와 윤 비서가 함께 타는 차였다.

    “그냥 내 차 탈게요. 다른 분들 계시잖아요.”

    “다른 분들을 내쫓으면 돼?”

    “아뇨. 그건 아닌데…… 아!”

    성큼 다가와 세인을 안아 든 이한이 수고로움을 자처했다.

    허리를 수그려 커다란 몸을 구긴 뒤 세인을 차에 태웠다.

    도주로를 차단하듯 그가 안전벨트를 달칵, 채웠다.

    “사모님, 안녕하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민성이 넉살 좋게 인사했고, 세인이 조그맣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이한은 아무렇지 않게 세인의 손을 잡곤 한 손으로 용케 서류를 넘겼다.

    병원이 가까워지자 서류에 박혀 있던 이한의 시선이 세인을 향했다.

    “이 대표 조심하고, 최대한 빠르게 퇴근해.”

    이한이 재차 무영을 경계하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게요.”

    “웬일로 고분고분하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그럼 허락한 김에 하나 더. 네 곁에 사람 좀 붙일게.”

    “사람이요?”

    “뒷조사나 뒷공작은 싫어하는 것 같으니 앞에서 지켜야지.”

    “그래서 사람을 붙이겠다고요?”

    “모두 실력 좋은 경호원이야. 잔심부름이나 사람 하나 없애는 것쯤은 손쉽게 해줄 거야.”

    이한이 하도 당당해서 헛숨이 흘렀다.

    사람을 없앤다는 말이 이토록 쉬운 건지 처음 알았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 세인아.”

    “그러는 이한 씨가 제일 위험해 보이는 건 알아요?”

    이한이 웃었다. 그의 너른 가슴이 보기 좋게 들썩였다.

    차창 밖으로 병원의 커다란 몸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기사님.”

    “그래그래. 잘 다녀와. 땡땡이치고 싶으면 꼭 연락하고.”

    세인은 진득하게 달라붙은 이한의 손을 떨쳐낸 후에 겨우겨우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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