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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2화 (52/95)
  • 두 번째 신혼 52화

    민성과 관련 수하들을 한자리에 모아 더블나인의 존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더 귀가가 늦어졌다.

    새벽 4시. 이한은 발소리를 죽이며 대리석 바닥을 지났다.

    우당탕. 순간 큰 소리가 났다.

    그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어디 갔…… 었어요?”

    그곳엔 세인이 서 있었다. 또다시 맨발로, 얇은 옷만 입은 채로.

    “일이 있어서 나갔는데, 벌써 깼어?”

    이한이 걸음을 좁히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세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숨통이 조여오는 듯했다. 이한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놓곤 세인 앞에 섰다.

    “전화도, 안 받고…… 또 나만, 갑자기…… 무슨 일…….”

    세인이 더듬더듬 말하다가 흘러나온 눈물을 빠르게 손등으로 훔쳤다.

    핸드폰을 재킷에 넣어두고 확인하지 않은 대가치곤 참혹했다. 이한은 자책하며 턱 근육에 힘을 주었다.

    지쳐 잠든 탓에 조금 더 오래 잘 줄 알았는데, 세인이 이토록 빨리 깰 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이한의 잘못이었다.

    잠에서 깨어 자신을 찾아다녔을 세인을 눈에 그리자 애틋하고 마음이 아렸다.

    “별일 아니었어. 혼자 무서웠어?”

    “그게 아니라……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냐고요.”

    세인이 입술을 씹으며 빨개진 눈으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전에도 이렇게 사람 걱정시키더니…….”

    “하…….”

    이한이 한숨 비슷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인이 이럴 때마다 얼마나 많은 감정이 뒤섞이는지 몰랐다.

    죄의식, 기대, 기쁨, 안도 등이 휘몰아쳐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왔으면 됐어요.”

    세인이 토라진 듯 휙 돌아서 먼저 침실로 향했다.

    이한이 따라가려 하자, 그녀가 움찔 놀라며 소리쳤다.

    “지, 지금 따라오지 말아요. 저쪽에서 씨, 씻든가 그래요.”

    “나 없는 데서 울면 못 쓰는데. 이왕 울 거면 내 앞에서 해야지.”

    “아니거든요. 나도 욕실 쓰려고 그래요. 저기로 가요.”

    세인이 손을 쭉 뻗어 저으며 거실 쪽 욕실을 가리켰다.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은 죄가 있는 이한은 한발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세인에게서 내쳐진 이한은 임무를 수행하듯 순식간에 샤워를 마쳤다.

    가벼운 트레이닝 바지와 라운드 셔츠를 입고 침실로 향하자, 세인이 팔짱을 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상처에 물 들어간 건 아니죠?”

    “볼래?”

    세인의 눈썹이 살짝 들렸으나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됐고 얼른 누워요.”

    “적극적이네. 그런데 어쩌지, 준비물이 없는데.”

    이한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잠시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던 세인의 귀가 붉어졌다.

    “차, 착각이 심하시네요.”

    웅얼거리는 세인이 눈물 날 만큼 예뻤다.

    그래, 이한은 이 순간을 절실히 기다려 왔다.

    “안 누워요?”

    이한은 서둘러 자리에 누웠다.

    세인이 침대 위에서 바스락거리며 조명을 조절하는 움직임만으로 정신이 흐려졌으나 이한은 욕심을 다잡았다.

    샤워 중에 거대해진 녀석을 가라앉히느라 꽤 힘들었는데, 다시금 시련이 찾아온 거다.

    이한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 웃었다. 세인과 함께라면 말라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인이 손을 뻗어 침실 등 스위치를 달칵거렸다.

    “밝기 어때요? 너무 밝은가?”

    “좋아. 이 정돈 돼야 정세인 얼굴이 보이지.”

    그의 가슴 위로 세인의 하얀 손이 올라왔다. 이한은 숨을 들이켰다가 조심히 내뱉었다.

    “오늘은 내가 재워줄게요.”

    “하…….”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건전하게, 잠만 자는 거예요.”

    “이상한 생각이 뭔지 모르겠네.”

    “서이한 씨 아직 환자예요. 눈 감아요.”

    이한이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 세인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좀 집중해요.”

    앙증맞은 재촉에도 이한은 잠드는 것보다 세인을 빤히 바라보길 택했다.

    세인도 포기했는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불면증, 치료는 받고 있어요?”

    “효과가 별로 없어서 귀국하곤 약만 가끔 먹지.”

    이한이 팔을 뻗어 애매하게 누운 세인을 끌어당겨 팔베개해 주었다.

    팔뚝에 닿는 따끈한 체온이 그의 심장까지 스몄다.

    “앞으론 내가 전화 안 받으면 윤 비서나 송 기사, 김 팀장. 누구든 전화해. 되도록 받을 거지만 혹시 모르니까.”

    “싫어요.”

    “화났네.”

    “그런 거 구질구질하지 않나요. 의부증도 아니고.”

    “네가 진짜 구질구질한 게 뭔지 몰라서 그래.”

    이한이 턱을 내려 세인을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금 시험에 들었다.

    “그래, 내가 참을게. 참아야지.”

    이한이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세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전엔 얼굴만 봐도, 아니, 목소리만 들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이젠 더한 걸 하고 싶었다.

    툭툭. 이한의 가슴을 밀어낸 세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몸에 무리만 안 가면…….”

    “안 가면.”

    “키스 정돈…….”

    웅얼거리는 입술에, 더는 참지 못하고 이한은 턱을 틀어 그녀의 입술을 찾아 겹쳤다.

    “흐음…….”

    놀라 몸을 굳힌 세인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조금씩 핥아 올렸다. 경직된 몸이 노곤해진 틈을 타서 욕심껏 저를 욱여넣었다.

    부드럽게 파고들다가 강하게 긁었고 도망치지 말라 휘감아 흠빨았다. 이한의 입안에서 진한 탄식이 메아리쳤다.

    이한이 그녀의 위로 몸을 겹치고 본격적으로 입을 맞췄다. 세인이 몸을 열어 골반을 지그시 누르는 이한을 허락했다.

    이한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손을 찔러 넣은 세인이 그의 뺨을 감쌌다.

    설탕을 발라놓은 것처럼 그녀의 몸이 달콤하게 감겨들었다.

    그러나 이한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고 이마를 찌푸렸다.

    달게 물러진 입술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옆으로 누워 세인을 품 안에 넣었다.

    “욕심이 많아서 큰일이야.”

    “……다친 데 많이 아파요?”

    “별로. 괜찮아.”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키스 더 해요.”

    그다음 이어지는 말이 이한을 완전히 흔들어놓았다.

    “……준비물은 꼭 필요한 거겠죠?”

    “너, 진짜. 하…….”

    다만 세인이 보인 틈을 파고들 만큼 이한은 그녀에게 저열하게 굴지 못했다.

    밀어붙이면 수용해 줄 만큼 세인은 착해 빠졌고, 그런 그녀의 심성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했다.

    뭘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래서 지난날의 자신이 싫어질 만큼.

    잠시나마 혼자 집을 헤매었을 세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시큰할 만큼 세인을 사랑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도망가고 싶어질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정세인을 이렇게 저렇게, 내 마음대로 예뻐하고 싶어.”

    “……이렇게, 저렇게?”

    “네가 울 때까지, 놔달라고 애원할 만큼 충분히 안고 싶지.”

    “…….”

    “하지만 네가 준비됐을 때 얘기야. 지금은 소중하게 품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니까 자꾸 시험하지 마.”

    순간 긴장했던 세인이 작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자 아직은 참아야 할 때란 게 확실해졌다.

    “마음 변하기 전에 자.”

    그러니까 이보다 미쳐 버리기 전에 세인의 마음이 자신과 같아지길. 이한은 그런 바람을 품었다.

    ***

    새벽 7시.

    간병인 이모님의 전화로 세인은 잠에서 깼다.

    혜인이 깼다는 전화일 성싶었다.

    몸을 일으키던 세인은 옆자리에 누운 이한을 보곤 통화 연결을 거절했다.

    이한이 곤히 자고 있었다. 몸을 세인 쪽으로 돌린 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겨우 잠들었을 이한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통화를 거절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6년 전처럼 혜인과 이한을 저울질하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욕심이 많았다. 착한 동생 역할과 이한,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잠든 이한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으면 겁나고, 보고 있으면 좋았다.

    “망했어.”

    세인이 중얼거리다가 이한의 눈을 가린 앞머리를 살짝 들추었다. 잘생긴 이마가 눈치 없이 사람 속을 간질였다.

    간병인 이모님께 따로 메시지가 오지 않는 거로 보아, 급한 일은 아닌 듯싶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늘 바빴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군갈 바라보자,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한의 팔 하나가 여전히 세인의 목 아래에 깔려 있었다. 높은 베개를 벤 탓에 무게는 많이 실리지 않았으나 한 자세로 오래도록 있었으니 불편할 터였다.

    그러나 굳이 이한의 자세를 고쳐주고 싶진 않았다.

    깰까 봐서. 이 온기가 식어버릴까 봐서.

    다시금 깜빡 잠들었던 세인이 일어났을 땐,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 또…….

    “또 없는 거야?”

    황망하게 중얼거린 세인이 이불을 걷고 일어났을 때였다.

    살짝 열렸던 침실 문을 밀며 이한이 들어섰다.

    슬랙스에 셔츠, 간단한 차림인데도 지금이라도 브리핑을 할 것처럼 단정하게 보였다.

    그의 넓고 각진 어깨를 졸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이한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는 것도 좋지만, 뭘 좀 먹어야지. 비실비실한 것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눈 뜨자마자 시비 걸어요?”

    “세인아.”

    난데없이 이름을 부른 탓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고개를 숙여 머리에 쪽쪽 뽀뽀하곤 아랫입술까지 알차게 빨아먹은 그가 세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그녀를 달랑 들어 올렸다.

    “어…….”

    하는 사이에 이한에게 안겨 식탁 의자에 앉혀졌다.

    어디선가 가져온 곰 얼굴 쿠션을 세인의 무릎에 얹어주곤 이한이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귀한 것만 만질 것 같은 가지런한 손가락이 수저를 이용해 밥을 한술 크게 뜬 뒤 반찬까지 알차게 올렸다.

    아침으론 조금 부담스러워 보이는 고기반찬이 세인의 입을 향해 돌진했다.

    “자, 아.”

    “왜, 왜 이러는 거예요?”

    “비실비실한 것도 죄야.”

    “아침부터 속 부담스러워요.”

    “나도 네가 부러질까 봐 부담스러워서. 아 해. 아니면 씹어줘?”

    정말 그럴 사람이었다. 세인은 기가 막힌 얼굴로 입을 작게 벌렸다.

    “아.”

    그러나 숟가락이 오다 말고 돌아갔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세인의 앞으로 그가 물컵을 내밀었다.

    “물부터 마셔야겠다. 흘리면 핥을 거니까 유념하고.”

    “그러길 바라는 거 아니고요?”

    “뭐가 싫겠어.”

    눈가를 접으며 웃는 이한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세인은 아주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러나 착실하게, 그가 먹여주는 음식물을 천천히 섭취했다.

    밥그릇을 전부 비운 뒤 세인이 더는 못 먹겠다고 고개를 젓자, 그제야 이한이 포기하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이제 씻을까.”

    볼우물을 보이며 웃는 이한이 슬며시 두려워져서 세인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혹시 같이 씻자는 그런 건 아니겠죠?”

    “예쁜데 똑똑하기까지 하고.”

    세인은 헛소리를 시작하는 이한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칭찬은 됐습니다.”

    “말투가 영 못 쓰겠어. 우리 세인이 예전엔 오빠, 오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날조하는 경향이 있으시네요.”

    세인이 뾰족하게 대답하며 뒤돌아 걸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예전엔 이렇게 장난도 곧잘 하고, 투닥거리며 행복했었는데.

    이제 조금 관계의 본모습을 찾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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