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51화 (51/95)

두 번째 신혼 51화

상처 회복은 빨랐다. 본래 이한은 엎치락뒤치락하는 몸싸움을 선호하지 않았다.

현준에게 몸을 내준 건, 이한으로서도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현준을 빠르게 떼어내고 싶어 벌인 짓이었다.

제 살과 피를 내어준 결과 두 연놈을 동시에 외국으로 보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사이, 지윤이 고소장을 날린 건 조금 의외였다.

꼭 누군가의 사주라도 받은 것처럼, 지윤은 그녀답지 않게 머리를 굴려대고 있었다.

추잡하고 악독한 방법이 꼭…….

설마.

정혜인과 임지윤.

관련 고리가 있던 건가.

정혜인의 낯을 떠올리는 것조차 치가 떨렸다. 증오스러웠다.

이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한이 찾은 곳은 더블나인의 지하실이었다. 설비실의 뒷문을 통과한 뒤 안쪽의 기계실의 문을 열었다.

칙칙한 조명이 길을 알리듯 쭉 나열되어 있었다. 교도소 복도처럼 섬뜩한 공간을 이한은 표정 없이 걸었다.

몇 번이나 커브를 돌자, 무거운 철문이 드러났다.

이한이 11자리의 긴 비밀번호를 누르자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이한을 위아래로 훑은 남직원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필시 못 보던 얼굴이란 기색이다.

이한이 손가락에 끼운 얇은 명함 한 장 내밀자, 그의 눈이 커졌다.

이한이 건넨 건 J의 명함이었다.

보통은 이한의 수족인 민성이 사용하지만, 더는 수면 아래에서 도사릴 필요가 없기에 직접 가지고 행차한 길이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직원이 깍듯이 허리를 접으며 이한을 안으로 안내했다.

메케한 연기가 자욱한 공간을 둘러본 이한은 이곳을 잘 아는 사람처럼 가장 가운데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엔 더블나인의 끈 떨어진 주인, 이무영이 앉아 있었다.

“뭐 해요. 왔으면 앉으시지.”

이한을 알아보곤 놀란 눈치였지만 말투는 심상했다.

이한이 맞은편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우스장은 어딜 가시고 대표가 직접 출근 도장을 찍습니까.”

“그쪽에선 이런 걸 겸업이라고 하던데. 아닌가?”

“보통은 뒷돈을 불린다거나, 스스로 목줄을 채운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한이 고저 없이 대꾸했다.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테이블 위로 엄습하자,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패를 돌리고 있는 테이블이 여러 개. 서류와 장부가 쌓인 긴 목조 책상. 각서나 계약서로 보이는 서류.

이한이 태연히 주변을 눈에 담았다.

“도통 겁을 안 먹으셔. 우리 서 전무님께서 영 도련님은 아닌가 봅니다?”

무영의 말을 흘려들으며 이한은 제게 담배를 가져오는 직원을 눈짓으로 가볍게 물렸다.

이한의 앞으로 무영이 술을 가득 따라 내밀며 말했다.

“임 본부장네 일은 뭐 우짜둥둥. 내가 고맙습니다?”

건방진 새끼.

이한이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대표가 고마워할 일은 아닌데.”

“우리 귀한 직원이 다칠 뻔했는데, 해결해 주셨으니 당연히 인사해야죠.”

“우리 귀한 직원.”

이한이 느긋하게 무영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무영이 비식거리며 대꾸했다.

“예. 우리 직원입니다, 정세인 그거.”

“…….”

“정세인이도 얼굴 기억 안 나는 남편보다는, 더블나인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을걸요?”

“우리 세인이가 직접 한 말도 아닌데 넘겨짚진 말아야지.”

이한이 주변을 둘러보며 평이하게 대꾸하자, 무영이 조금 더 본색을 드러냈다.

“결혼하자마자 팽하더니만, 오랜만에 나타나선 왜 이 지랄이실까? 간만에 세인이 얼굴 보니까, 아래라도 땡겨? 그래서 남편 행세라도 해보시게?”

무영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이한이 천천히 굴리던 눈동자로 무영을 직시했다.

“네가 뭘 해보고 싶은 건 아니고?

“뭐?”

무영의 입가가 뒤틀렸다.

이한이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독한 술이 목 뒤로 넘어갔다.

이한이 물기에 젖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그 더러운 손을 어디까지 뻗으려나 두고 보려니까 비위가 상해.”

“히야, 지랄도 고상하셔라.”

혀를 찬 무영 역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을 쓱 닦아내는 무영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이한은 느긋하게 어깨를 펴고 다리를 겹쳐 올렸다. 그러자 무영이 이한의 어깨 부근을 눈짓하며 비아냥댔다.

“칼자국 아물지도 않았을 텐데, 조심성이 없으십니다. 서 전무님.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선 입을 함부로 놀려, 놀리길.”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는데, 대표인 무영의 귀에 닿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던 듯했다.

하나 무영이 안다고 해서 이한이 위축될 이유는 없었다.

무영이 핸드폰을 꺼내 이한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로 내려앉은 이한의 눈빛이 순식간에 짙어졌다.

이곳의 조도보다 더 캄캄해진 이한의 눈동자를 관찰하며 무영이 크게 웃었다.

그러다 돌연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때. 환장하게 잘 나왔지?”

핸드폰 액정에 찍힌 사진은 현준과 세인의 모습이었다.

밀착한 두 남녀는 호텔 객실 안에 있었고, 현준은 흐트러진 가운 차림이었다.

언뜻 보면 오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며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진이었다.

세인의 옷차림으로 미뤄 더블나인에서 짐을 빼던 날처럼 보였다.

이한이 칼에 찔린 그날.

이걸 이 각도에서 찍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임지윤 짓인가?”

“이걸 디밀면서 고소장을 같이 날린 년이야. 화가 나더라고.”

이한이 느긋하게 그의 말을 잠자코 듣자, 무영이 고소 건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어느덧 무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짧아졌다.

민성을 통해 들었다곤 하나, 여전한 불쾌함이 이한에게로 밀려들었다.

무영이 히죽거렸다.

“나라면 이런 짓 안 당하게 할 텐데 말이야.”

“무슨 개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허수아비 같은 남편에 온갖 소문. 우리 부총이 얼마나 외롭겠냐고.”

“그래서.”

“그동안 정세인 지킨 건 나야.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 아니라.”

보호가 아니라 이기적인 관심이었겠지.

우스웠다. 세상 물정이라면 이한도 질리도록 잘 알았다.

그 세상 이치를 깨닫기 위해 세인을 오랫동안 홀로 둬야 했다.

피와 살을 내어주고 얻은 진리를 어찌 새겨 넣지 않았을까.

이한은 가만히 무영을 노려보았다.

유치한 싸움은 현준의 선에서 끝낼 작정이었기에 최대한 이성적으로 머리를 식혔다.

아니, 이한은 정말 화가 나면 되레 머리가 차분해지는 편이었다.

이한이 입을 열었다.

“더블나인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단 소리가 있던데. 업종 변경이라도 할 셈인가?”

“그건 그쪽이 상관할 바 아니고. 세인이나 놔줘.”

“누구를, 뭘 해?”

“사모님 소리는 못 들어도 평생 형수님 소리는 듣게 해줄 수 있으니까.”

무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들먹거렸다.

꼬챙이로 쑤셔도 시원찮을 건방진 새끼에겐 매가 약이었다. 이한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더블나인, 간당간당하게 흑자를 남기는 구조였는데, 수익 상승률이 해를 거듭할수록 급등하고 있지. 눈에 보이는 게 이 정돈데 숨은 돈은 어련할까. 전부 어디서 흘러들었을까.”

“뭐, X발. 깡패 새끼한테 돈 어디서 났냐고 묻고 싶은 거냐?”

“호텔업이 아니라 밀수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약쟁이 새끼라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불법 도박 업체 대표?”

“왜. 우리 도련님 배가 아파?”

“그래. 네가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이한이 빙그레 웃었다. 째깍째깍. 어디선가 초침이 커다랗게 울리고 있었다.

어둡고 차가운 공간. 이곳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놀이는 법망을 피한 범죄 행위였다.

“하지만 그딴 더러운 짓거리를 하면서, 우리 세인이한테 손을 뻗으려는 건 용납이 안 돼.”

세상이 더러워도 세인만은 오염되지 않아야 했다.

“하이고, 무섭다. 무서워.”

무영이 전혀 겁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낄낄 웃었다.

인맥이야 많을 거다. 정보를 팔아넘기는 놈이니.

하지만 무영이 음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면, 이한은 높은 곳까지 손이 닿았다.

한낱 깡패는 제문을 무시할 주제가 못 됐다.

그동안 무영을 눈감아준 건, 그가 세인의 보호자로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이한이 돌아왔으니 무영은 비켜줘야 할 시간인 거고.

이한이 커프스를 젖혀 시간을 확인했다.

“세인이한테 똥물 안 튀기게 단속 잘하고 딱딱한 머리 잘 굴려봐. 뭐가 오래오래 사는 길일지.”

“이야. 배운 게 많은 것들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겁을 주나?”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러운 사업을 정돈하고 조용히 사라지란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다.

경고 아닌 통보였다. 추락하며 감히 세인에게 손을 내밀 생각하지 말라는.

“뭐, 알았고. 내 집안에서 장사했으면 이제 자릿값을 내야지, 서 전무.”

이한이 미끈하게 웃었다.

이한이 J로서 이곳에서 활동했다는 걸 무영도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개입하지 못한 건, 어쨌거나 무영이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한단 뜻이었다. 제문가의 구심점이 될 이한과 무턱대고 충돌할 수 없는 것이다.

허세는.

돌아서려던 이한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팔을 뻗어 무영의 핸드폰을 잡았다.

쾅!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무영의 귀를 스친 핸드폰이 벽에 처박혔다.

산산조각이 난 핸드폰이 바닥 어딘가로 흩어져 버렸다. 무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값이 좀 됐나?”

이딴 사진을 보여서 화를 돋우는 방식은 재미없었다.

이한이 싸늘하게 돌아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