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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0화 (50/95)
  • 두 번째 신혼 50화

    사실 무영이 뒤로 뭘 하든 세인과는 상관없었다. 그러니 무영의 위험성에 대해 깊게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세인의 생존방식이었다.

    필요한 만큼 적당히 오픈하고, 도움 되는 만큼만 이용하는 관계.

    세인이 입을 열었다.

    “문제가 있다면,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호텔 주인이 바뀐단 소식이 꽤 퍼진 거로 아는데. 부총지배인님께선 그걸 듣고도 감이 안 와?”

    이한이 비딱한 투로 물었다.

    세인은 문득 명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호텔 대표 바뀐다던데? 자기 들은 것 좀 있어?’

    뜬소문이 아니었던 걸까?

    세인이 제 마음 편해지고자 생각하길 미뤘던 문제가 다시 떠올랐단 건, 신빙성 있는 소문이란 소리였다.

    “대표님이 호텔 처분하신다고 하던가요?”

    “처분당하는 건 이무영 쪽이야. 그러니 휩쓸리지 말고 발 빼. 더러운 거 튈 거야.”

    세인은 알력 다툼이란 걸 오래도록 멀리서 지켜봐 왔다. 그럴 때마다 무영은 승리해 왔다. 이번에도 그럴 터다.

    “초기 투자자가 전부 조직의 일원들이에요. 그중엔 지금 대기업 임원이 되신 분도 있고요. 싸움이 나는 거야 당연해요.”

    이한이 손을 뻗자, 세인이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무영이 무슨 마음으로 추근대는 줄도 모르고, 순진하게. 이러니 관여를 안 해?”

    무영이 흑심을 품었단 걸 꼭 세인만 몰랐던 것처럼 이한이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울컥했다.

    “얼마나 더 험한 꼴을 봐야 말 들을래.”

    그리고 날카롭게 변한 이한의 눈매가, 말투가 못내 서운했다.

    “대표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세상 사람이 다 서이한 씨 같은 줄 알아요?”

    “이젠 그 새끼 편도 들고?”

    “설사 대표님이 날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돌려 말하니까 아직도 꽃밭 같고 그래?”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이무영 뒤 구린 거 설명해 봐야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럼 뭘 어떻게 할까.”

    이한이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그 새끼 피해. 진짜 돌아버리기 전에.”

    말을 마친 이한이 그녀의 뺨을 쥐어 살살 문질렀다.

    “더는 참아주기 힘들어.”

    그러다 입술 언저리를 손끝으로 긁었다.

    “인내가 바닥이지.”

    이한의 날카로움이 어느새 고독함으로 변해 있었다.

    쓸쓸한 미소를 마주한 순간에 세인의 심장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자유를 주고 싶단 이한은 또 다른 말로 세인을 속박하려 하고 있었다.

    “나 말라 죽게 둘 거 아니면, 말 좀 들어.”

    그런데 그게 왜 편안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세인에게 돌아갈 집이 생긴 것처럼, 기댈 벽이 생긴 것처럼 그녀는 여느 때보다 마음이 놓였다.

    사실은 이한이 말하는 자유를 가지고 싶었고, 그가 당기는 품 안에 속박되고 싶었다.

    나는 다시 서이한을 좋아하는구나.

    아니, 다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전부터 쭉 나는 그를…….

    세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잊은 적이 없었구나.

    나뭇잎에 맺힌 이슬처럼 아슬아슬 진동하던 의혹이 툭, 흘러내렸다.

    “그럼, 6년 전에 왜 그렇게 떠났는데?”

    이한의 동공이 짧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배에 올라탄 것처럼 세인은 인내라는 중심을 잃어버리고 물었다.

    “날 잊은 적 없다던 사람이 그렇게 버리고 가선, 연락도 없이……. 왜?”

    세인이 커다란 눈에 이한을 똑바로 담으며 물었다.

    6년 전, 소꿉놀이 같던 연애 끝에 결혼이 결정되자 급속도로 식어가던 이한의 모습이 생생했다.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했던 세인과 다르게 이한은 결혼을 철저히 비즈니스로 대응했다.

    이한은 차가워져만 갔고, 급기야 세인의 연락을 피했다.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이한 덕에, 세인 혼자 결혼 준비를 해야 했다.

    육체적, 심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예비 남편의 행방을 묻는 업체 직원들의 질문은 번번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엔 안타깝다는 듯 동정하던 시선들을 마주하며 세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거짓 웃음을 흘려야 했다.

    이한이 입을 연 건 한참 뒤였다.

    “너를 떼어내야 했어. 내 의지라면 의지지만, 마음이 떠난 건 절대 아니었고.”

    이한이 미소 지었다. 꼭 아픈 사람처럼 보여서 세인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왜 당신이 버림받은 표정인데.

    왜 당신도 아팠던 것처럼 바라보는 건데.

    세인은 입술을 꾹 닫아보았지만, 눈물을 참지 못했다.

    소리 없이 뚝뚝 흘러나오는 눈물을 이한이 손끝으로 닦아주었다.

    부질없는 자존심, 내세워 봐야 허물어질 방어막이란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이 더 편해져 버렸다.

    “이렇게 말해 놓고 또 버릴 거잖아. 또 나만 두고 갈 거면서…….”

    세인이 눈을 감으며 미간을 좁혔다. 눈물이 서럽게 흘러내렸다.

    “안 가. 네가 밀어내도 못 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눈을 뜨자, 안개 낀 시야에 이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형체가 흐린 그가 또다시 사라질 환영처럼 느껴졌다.

    “정세인을 떠나 있는 동안 내가 가장 후회한 게 뭔 줄 알아? 같잖은 죄책감 벗어버리겠다고 경영 전선에 뛰어든 것.”

    눈을 깜빡이자, 그가 한결 선명해졌다. 세인을 바라보며 이한이 간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후계자 따위 되지 말았어야 했어. 그 대가로 너를 잃을 줄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거야.”

    세인은 입을 꾹 닫고 흐느낌을 참아냈다.

    이한에게 형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이한의 말이 무겁게 스며들었다.

    누군가 심장을 두들기는 것만 같았다. 이한의 고통이 여실히 느껴졌기에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아요. 나 때문에…… 그러지 마요.”

    이한이 자신으로 인해 도리를 저버렸다면, 세인은 또다시 아프고 힘들었을 터다.

    세인은 서둘러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을 겨우겨우 털어낸 뒤에 이한을 직시하며 말했다.

    “약속해 줘요.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난 그거면 돼요.”

    세인이 힘겹게 말을 내뱉자, 이한이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가 뗐다.

    “미안해. 그땐 빨리 떠나는 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고, 조급했어. 너를 더 생각해야 했는데 같잖은 위선이었지.”

    “일 때문에 그렇게, 매몰차게 떠난 거예요?”

    “그래. 널 두고 떠나야 하니까. 냉정한 게 낫다고 생각했어.”

    “바보네. 서이한.”

    세인이 목소리를 떨며 힘없이 웃었다.

    그런 거였구나. 겨우 그런 거였어.

    허무했고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이한에게 섭섭하기도 했다.

    기다려 달라고 했다면 그랬을 텐데.

    “욕을 해도 좋고 미워해도 돼. 차라리 뺨을 칠까?”

    “내가 어떻게 욕을 해요. 6년 동안 나를 좋아해 준 사람한테.”

    그의 진심을 의심치 않겠다는 말이었다.

    이한을 허락하겠다는 동의와도 같은 말이었다. 눈치 빠른 이한이 말의 진의를 읽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이럴 땐 뜨거운 포옹 같은 거 하던데…… 안 해줄 거예요?”

    세인이 힘없이 묻자 이한이 짧게 욕설을 내뱉은 후 운전석을 벗어났다. 보닛을 돌아 열려 있던 조수석 문을 활짝 열어젖힌 그가 고개를 숙였다.

    세인이 반응할 새도 없었다. 팔을 뻗은 이한이 그녀를 안듯이 끌어내 부드럽게 일으켰다.

    커다란 품에 그녀를 파묻은 뒤, 세인의 머리칼 사이로 커다란 손을 찔러 넣곤 깊게 탄식했다.

    “다시는 허락받지 못할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를 거야.”

    세인은 이한의 온기에 취해 숨죽여 울었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 진심을 숨겨서 미안하고.”

    세인은 목에 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먹은 것 없이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몸이 힘없이 처졌다.

    “툭하면 쓰러지는 정세인.”

    “누가 쓰러졌다고…….”

    “너 쓰러졌단 보고만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

    지난 6년간 쓰러졌던 일을 말하는 거겠지.

    “스토킹을 그렇게 포장하지 말아요.”

    가뿐하게 세인을 안아 든 이한이 속삭였다.

    “더 울리면 내가 못 견뎌. 일단 좀 기대.”

    세인은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게 오해였다면 그가 자신을 버린 적 없단 뜻이었다.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지기 시작해졌다.

    “악당은 나한테 맡기고.”

    젖은 뺨에 이한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제 행복해야지.”

    ***

    세인이 잠든 것을 보고 나서야 이한은 침대를 떠났다.

    여태 믿어온 혜인과 무영의 실체가 상종 못 할 쓰레기란 걸 알면 세인은 더욱 무너지겠지.

    그래서 전부 밝힐 수가 없었다.

    세인을 지키고 싶었다.

    이한이 씁쓸하게 눈가를 짚었다.

    색이 짙은 양복을 갖춰 입고 대문을 나서자, 대형 세단이 그를 맞이했다.

    문밖에 나와 있던 송 기사와 민성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오셨습니까.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이한은 그들을 짧은 순간에 눈에 담으며 차에 올랐다.

    “다음부턴 차에서 기다리죠.”

    두 남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이윽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신혼집이 멀어져 갔으나 아직도 이한의 신경은 울다 지쳐 잠든 세인에게 닿아 있었다.

    함께 있고 싶으나 오늘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난번 말씀하신 정혜인 씨 자료, 지금 보시겠습니까?”

    “줘.”

    조수석으로 손을 내민 이한은 민성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송 기사를 의식한 민성은 다른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이한은 적막 속에서 서류를 읽었다.

    입양 서류. 3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사진과 입양 신청서, 그리고 담당 기관의 허가 도장.

    지난번 민성이 가져온 서류보다 더 내용이 충실해진 증거들을 살피고 있자니, 기분이 더러웠다.

    이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본인은 사실을 알고 있고?”

    “확실하진 않지만 모르는 눈치입니다.”

    “그래.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시키고.”

    “예. 입막음은 확실하게 했습니다.”

    전에도 결심했듯이 세인이 이 사실을 알아선 안 됐다. 알아서 득 볼 것 없는 진실이었다.

    세인을 상처입히는 건 뭐든 멀리 치워내야 옳았다.

    “누구를 감히.”

    이한이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으면 좋으련만, 세인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바빴다.

    한참을 달려 차가 멈춘 곳은 더블나인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이한은 따가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내릴 채비를 했다.

    “여기부턴 혼자 다녀오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민성이 그답지 않게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누굴 걱정해.”

    “전무님을 걱정한다기보단, 수습할 일이 늘어날 제 내일을 걱정하는 겁니다.”

    “꿰맨 데 붙지도 않았어. 여기서 더 다치면 우리 세인이 울겠지.”

    이한이 다친 어깨를 눈짓한 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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