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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9화 (49/95)
  • 두 번째 신혼 49화

    이한이 그녀보다 먼저 이쪽을 주시하고 터라 어렵지 않게 시선을 얽을 수 있었다.

    “무엇을.”

    “임지윤, 강현준. 유학 가기로 했대요. 이한 씨가 한 거죠?”

    “벌써 들었나. 혹시 잘난 대표가 말해 줬어?”

    “그게 중요해요? 내 일에 더는 관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

    “제발 그냥 둬요. 뭐 멋대로, 시키지도 않는데 자꾸 내 삶에 끼어들어서 사람 초라하게 만들지 말고요.”

    세인의 앞으로 이한이 한쪽 무릎을 접어 앉았다. 차갑게 식어 바들바들 떨려오던 두 손을 이한이 가만히 쥐었다.

    “무슨 일 있었지.”

    “당신이, 나한테 말도 없이…… 마음대로…….”

    “너 거짓말 되게 못해. 알아?”

    “…….”

    “마음대로 해서 미안한데, 무슨 일 있었는지 먼저 말해 봐. 그것부터 듣자.”

    그에게 마음이 가는 만큼,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누가 보아도 눈부신 서이한과 동등한 선상에 선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아픔을 공유해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이한의 태도에 세인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세인은 한없이 약해진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미소를 쥐어짰다.

    “사생활 없는 게 부부라면 되게 별로 같아요.”

    “네가 지금보다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자유를 말하는 이한의 손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세인은 맞잡은 손을 놓기가 싫어졌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여유롭게. 사랑받으면서 살 생각 없나?”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 마음을 읽은 듯 이한이 말했다.

    “넌 그냥 받으면 돼. 아주 쉬운 일이지.”

    이한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려오는 건 세인이 기댈 곳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혜인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것에, 그녀를 달랠 방법을 생각하는 일이 오늘따라 너무도 지쳤다.

    “나한텐 사는 것도 어려워요.”

    “착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고, 좋은 일만 하지 않아도 돼.”

    “…….”

    “나한텐 자유로운 정세인이 착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마음의 짐을 좀 버려 봐.”

    착하고 좋은 동생. 애초에 그런 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최악의 죗값을 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였다.

    세인은 자신의 손등에 뺨을 붙이고 가만히 올려다보는 이한을 보며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다.

    이한이 다시금 개입했다.

    또 선을 넘어왔고 세인이 고수하려던 간격을 좁혀 버렸다.

    이한에게 약점을 보일 때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이한에게 잘나 보이고 싶은 얄팍한 허세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와 반대로, 이한은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정말, 그렇게 내가 좋아요?”

    “말이라고.”

    “그런데 난 내가 별로예요.”

    세인이 슬프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 앞에 서면 너무 초라해.

    “내 안목은 그렇지 않다는데.”

    “그럼 서이한 씨 안목도 별로인가 봐요.”

    “그럴 리가 있나. 이래 봬도 좋은 것만 알아보도록 훈련된 눈이야.”

    이한이 일어서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맞잡고 걷자는 표현에 세인의 심경이 더욱 착잡해졌다.

    상황은 점점 불행해져만 가는데, 이한과 함께 있으면 행복 같기도 했다.

    그래서 선뜻 발을 들이기 무서웠다.

    지금 누리는 행복이 더 불행해지는 길로 인도하는 표지판일 것만 같았다.

    아직도 재고 따지다니. 세인은 여전히 자신의 살길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한이 손에 깍지를 껴 꽉 잡았다. 여린 살점에 와 닿는 단단한 촉감이 구멍 난 세인의 가슴을 빠듯하게 달구었다.

    “집으로 갈 거니까 병원 쪽으론 눈길도 주지 마.”

    이한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세인은 그 뒤를 주춤주춤 뒤따랐다. 조금 느린 걸음인데도 그는 타박하지 않고 천천히 맞춰주었다.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그를 뒤따랐다.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이한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마음이 점차 커져만 갔다.

    하지만 이한에게 위로받을수록 슬퍼졌다.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신이 더욱 잘 보였으니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자 아까는 흐렸던 별이 조금은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결국, 불행인지 행복인지 알 수 없는 길로 빠져들고 말 거라면 행복이라고 믿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세인은 무엇이 적혔는지 알 수 없는 카드를 받은 기분이었다.

    “식사는.”

    “그 질문 너무 식상해요. 설마 오늘도 도시락 챙겨왔어요?”

    “도시락은 없지만, 너 하나 배불리 먹일 순 있지. 집으로 가면 맛있는 식사가 있을 거야.”

    세인은 그제야 죽을 꺼내 가야 한단 사실이 상기됐다.

    여전히 이한에게 끌리고 행복이라고 믿고 싶어도, 오랜 세월 죄책감에 시달린 몸은 그렇지 못했다.

    “이만 병실에 들어가 봐야 해요.”

    이한이 픽 웃으며 멈춰 섰다. 그가 세인의 어깨를 끌어당기려는 걸 세인이 옆으로 피했다.

    살짝 올라갔다 내려온 눈썹과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입꼬리가 콩콩 뛰는 세인의 가슴을 간질였다.

    “언니 먹을 죽이 차에 있어서 가 봐야 해요.”

    “사람을 시켜.”

    보온통을 대신 전달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긴 했다.

    하지만 직접 먹여주지 않으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을 터다.

    그 증거로 혜인의 살이 쭉쭉 빠져가고 있었다.

    “내가 직접 챙겨야 하는 일이에요. 이한 씨는 먼저 돌아가요.”

    “안 돼.”

    그러나 세인의 갈등을 차단하듯 이한이 손을 끌며 걷기 시작했다.

    “서이한 씨!”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누가 누굴 걱정해. 정혜인 걱정은 집어치우고 자신부터 챙겨.”

    전부터 생각했지만, 호칭을 생략한 정혜인이라는 무례한 단어가 이상하게 들리질 않았다.

    이한에게 못된 짓을 하라고 종용하는 혜인의 본성을 이미 알았기 때문일까.

    이한이 아무것도 모른 채 혜인을 살갑게 부른다면 그것도 불편하겠지.

    세인이 손목을 비틀어 빼려는 걸, 그가 다시 힘주어 당겼다. 얼결에 이한의 옆에 붙어 서자, 그가 이번엔 허리를 감싸 안았다.

    “타인은 네가 여유 될 때 돌아보는 거야. 그 나이 먹도록 그걸 몰라?”

    아까와 다르게 화난 말투였다. 세인은 이한을 노려보았으나 이한이 앞서는 탓에 더는 반항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핑계를 대며 그에게 끌려가는지도 몰랐다.

    “차는요?”

    “여기 있네.”

    이한이 눈짓한 건 세인의 차였다. 세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한 씨 차는 없어요?”

    “너랑 함께 돌아가려고 돌려보냈어. 그러니 정세인이 내빼면 내가 곤란하지.”

    당당히 말한 이한이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으로 향했다. 세인은 체념하듯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 분위기에 휩쓸려 골치 아픈 일은 뒤로 미루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시트를 조정하는 이한을 보며 세인이 말을 꺼냈다.

    “다쳤잖아요. 내가 운전할게요.”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운전대 잡으면 내가 불안해. 가는 동안 눈 좀 붙여.”

    이한이 손을 뻗어 세인의 안전벨트를 뽑아 달칵, 소리 나게 꼽았다.

    찰나 스쳤던 그의 손끝에 긴장한 건 세인뿐인 듯, 그는 아무렇지 않게 룸 미러를 조정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대로 간다고 간병인 이모님께라도 말을 전해야 했다.

    핸드폰에는 다행히 간병인 이모님의 메시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가씨께서 잠드셨어요.]

    [내일 찾아뵐게요. 잘 부탁드려요.]

    톡톡. 메시지를 작성하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라면 잠든 혜인의 얼굴이나마 보고 가겠지만, 지금은 내키질 않았다.

    “조금은 나쁜 사람이 되어도 되는 거겠죠.”

    세인이 중얼거리자, 이한이 나직하게 웃었다.

    “세상 안 무너져.”

    “…….”

    “내 세상은 정세인이야. 그러니까 네가 잘해야지.”

    세인은 귀가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말을 돌렸다.

    “정말 운전 괜찮겠어요?”

    맞지 않는 운전석에 앉은 그를 보자 마음이 편하긴커녕, 근심이 늘었다.

    “잘하던 것도 누가 보고 있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좀 자.”

    “어련하시겠어요.”

    중얼거린 세인이 그의 뜻대로 눈을 감았다. 그가 운전하는 차가 부드럽게 아스팔트를 달렸다.

    이한의 운전은 역시나 수준급이었다. 세인의 차가 큰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질주하고 있었다.

    다만 눈을 감았는데도, 신혼집이 가까워질수록 세인의 정신은 또렷해져만 갔다.

    좁은 공간에 이한과 단둘이 있단 생각에 긴장감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거다.

    신혼집의 차고로 들어가자 미등이 켜졌다. 모던한 차고 내부에 불이 들어오자 세인도 자는 척을 포기하고 눈을 떴다.

    서둘러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을 그만두는 게 어려우면, 이무영이라도 조심해 볼 생각은.”

    묵직한 목소리에 세인이 조수석 문을 한 뼘쯤 열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 대표님은 저한테 도움 많이 주신 분이에요.”

    세인이 호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운 이가 무영이었다.

    낯선 업무와 불편한 환경에 세인이 비교적 빠르게 녹아든 건 무영의 덕이 컸다.

    지금도 세인의 편의를 봐주고 있으며, 혜인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도 일조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세인은 혼자서 업무와 가족사에 끼어 우왕좌왕했을 터다.

    세인이 망설이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떻게 보일지 알아요. 하지만, 저한테 해를 끼칠 분은 아니에요.”

    조직에 가담한 무영이 어떻게 비칠지는 세인이 잘 알았다.

    하지만 청렴한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도덕적이리란 법은 없었다. 오랜 경험으로 무영은 무해하단 결론이 난 후였다.

    그러나 이런 세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한의 미소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못마땅한 티가 역력했다.

    “이무영이 도움을 왜 줬는지. 그건 생각 안 해 봤어?”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요. 그리고 언니랑도 이래저래 연관이 있고요.”

    세인이 이한의 서늘한 눈매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우리 가족과 인연이 깊단 것쯤은, 아는 줄 알았는데요.”

    “그래서.”

    “이한 씨 잘하잖아요. 사람 뒷조사하고 감시하는 거.”

    세인은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대답했다.

    혜인에게 그런 얘길 들어서인지, 무영을 위험 분자로 취급하는 이한의 태도가 편치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고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괜한 기우일 거다.

    여태 세인이 믿고 지켜온 무영과의 의리가 허상이었을까 두려워 이한에게 화풀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영마저 흑심을 품고 접근한 거라면, 앞으로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일까.

    하지만 이한이 무언가 아는 것처럼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조사를 했으니까, 이무영과 가까이 지내는 걸 말린다는 생각은 안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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