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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8화 (48/95)

두 번째 신혼 48화

세인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대답을 기다리자, 혜인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말해 준 거야.”

그녀가 살짝 곁눈질해 등 뒤의 세인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전에 그림 얘길 하다가 네 안부를 물었더니, 말씀해 주시더라.”

“그걸 왜 언니한테 말씀하신 거야?”

“왜?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니?”

세인은 입술을 질끈 물며 터져 나오는 울분을 삼켰다. 그러자 혜인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이혼해. 세인아.”

세인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언니가 우겨서 될 일이 아니잖아.”

“왜 아니야? 내가 싫다는데?”

“……뭐?”

세인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얼룩지자, 별안간 혜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난 그 남자 싫어. 서이한이 싫어. 내가 싫다니까?”

혜인이 싫은 건 모두 배제해야 했던 지난날이 스쳤다.

앞으로도 세인의 의견이 반영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사실이 오늘처럼 끔찍했던 날은 없었다.

“세인이 너도 창피한 거 잠깐이야. 불륜이니 뭐니, 입방아 찧어도 소문은 금세 들어갈 거야.”

“불륜……?”

재차 들려오는 불륜이라는 단어가 활화산처럼 부글거렸다.

“너도 알잖아? 힘 있고 돈 있으면 찍소리 못 해. 그동안 네가 들었던 소문, 서이한이 네 방어막 못 해줘서 생긴 일 아니야? 그러니 그거 해줄 수 있는 남자로 만나자는 거야.”

“정말 대단하다…….”

세인이 실소하듯 말하자, 혜인이 얼굴을 붉히며 비명을 질렀다.

“나만 나쁜 년이니? 내가 나쁜 거야?”

“난 언니,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세인의 힘 빠진 목소리에 피곤이 누적되어 있었다.

“너 예전부터 이무영 대표랑 만나고 있었단 스캔들 흘릴 거야. 그러니까 넌 이혼 준비해. 위자료쯤이야 이 대표님이 내주실 거고…….”

세인이 숨을 덜컥 들이켰다.

세인의 상식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혜인의 입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걸 참으며 눈에 힘을 주고 세인이 버텨내듯 말했다.

“언니, 정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넌 나야.”

혜인이 당연한 투로 말하자, 구멍 난 세인의 심장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움직일 수 없는 내 대신이잖아, 세인아. 아니야?”

혜인이 등을 떨며 물어왔다.

“나 대신, 걷고 뛰고…… 세인이 네가 그래야 하잖아. 그런데 왜 내가 싫다는 남자랑 결혼 생활을 해? 네 인생, 네 마음대로 살 자격 없는 주제에.”

혜인의 젖은 목소리가 좁은 욕실을 웅웅, 흔들어댔다.

세인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아프게 쏟아지는 숨을 정돈하려 애썼다.

눈앞이 뿌예지는 걸 참으며 밀려든 참담함과 맞서 싸워야 했다.

“어이구, 아가씨 몸이 차가워졌어요.”

눈치를 보던 간병인 이모님이 혜인의 몸을 살피는 척하며 중재에 나섰다.

“아가씨, 일단 들어가셔 얘기하셔요. 네?”

세인은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간병인 이모님을 향해 겨우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이모님도 계시는데 실례했어요.”

“아휴, 그런 말씀 마셔요. 그럼 따뜻한 물부터 뿌릴게요, 아가씨.”

간병인 이모님이 고집스레 난간을 쥐고 있는 혜인의 몸을 정성껏 씻겼다.

세인도 간병인 이모님과 합을 맞춰 혜인을 재빨리 닦이고 옷을 입히느라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어디 가?”

병실을 나가려던 세인에게로 혜인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죽 가져올게.”

아직 진정이 덜 되어 보이는 혜인에게 짤막하게 대꾸한 세인은 젖은 옷부터 갈아입었다.

손끝이 무뎌져서 번번이 손이 어긋났다.

그 와중에 혜인이 먹을 죽을 가지러 차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없었다.

그래, 혜인의 말대로 세인은 죄인이었다. 혜인의 손발이 되어야 했다.

그래도 이혼은…….

이혼만큼은…….

이제야 겨우 이한의 진심이 조금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조금 행복해져도 될까, 싶었다.

그런데 벌써 끝이라고?

우습게도 혜인이 떼를 쓴다면 은희는 정말 이혼 절차를 위해 힘을 쓸 것이었다.

홍춘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은희는 무조건 혜인의 편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 살아가는 게 사치 같아졌다.

누군가 죽어라 등 떠미는데 눈치 없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기분.

멍하니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세인은, 핸드폰을 두고 온 게 생각나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혜인은 등을 돌리고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히 걸어가던 세인은 순간 혜인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눈빛으로 화들짝 놀라는 혜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응, 끊어요. 나중에 전화할게.”

혜인이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핸드폰을 이불 속으로 꾹 숨기는 혜인의 행동이 이상했다.

요즘 들어 종종 그랬다. 핸드폰을 늘 손에 닿는 곳에 두더니 요즘엔 베개 밑에 두었다.

누구와 통화했는지 물어보면 되었지만, 욕실에서의 일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챙긴 세인은 혜인의 가슴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혜인에 대한 껄끄러움과 의혹이 산더미처럼 불어나서일까.

그녀의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밖으로 나서려는 세인의 등 뒤로 혜인의 말이 들려왔다.

“너도 서이한 싫잖아. 이혼하면 잘된 일 아니니?”

“다녀와서 얘기해.”

“너 버리고 간 남자가 뭐가 좋아서? 너 정말 등신이야. 이 대표님 너 좋아해. 알면서 모르는 척 그만하지 그러니?”

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도 다 알고 있었잖아. 다 알면서 이 대표님 호의 받아먹은 거 아니야?”

세인의 호흡이 가빠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아서, 혜인의 말을 등진 채, 병실을 빠져나와야 했다.

철없다는 말로 치부하기엔 혜인은 도가 지나쳤다.

그러나 결국 혜인의 행동은 세인의 잘못으로부터 기인한 거였다.

애초부터, 혜인이 세인 때문에 다치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

터벅터벅, 텅 빈 복도를 걸었다.

벤치가 있는 공터로 나온 후에야 세인은 아까부터 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단 걸 인지했다.

전화의 발신자는 무영이었다. 세인은 모래알이 가슬가슬 굴러다니는 기분으로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대표인 그의 전화를 재깍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가 한탄스러웠다.

“예. 대표님.”

-바쁘냐?

혜인에게 그런 소릴 들어서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무영의 거친 말투가 부담스럽게 느껴져 세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본부장 말이야. 그거 해결할 것도 없더라.

“네? 어째서요?”

-뭐든 딸내미 잘못이라고, 먼저 머리 숙여왔어. 조만간 유학 보낸다더라.

“유학이요?”

-그래. 강현준이랑 세트로 묶어서 보낼 작정 같던데. 이거 뭐냐?

“잘된 일, 같은데요.”

세인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미소 지으며 벤치에 걸터앉았다.

-하, 뒤가 구려. 이런 기분 딱 질색이야. 뭐가 더 있는데…….

욕설을 덧붙인 무영이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피우는 듯했다.

순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이한이 생각났다.

그가 매끈하게 물고 있다가 손으로 옮겨간 담배. 그가 태우는 담배에선 산뜻한 솔향이 날 것 같은 착각은 콩깍지가 씌기 시작했단 신호였다.

때를 가리지 않고 이한이 떠오르는 것조차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왜 말이 없냐.

“아뇨. 그럼 이번 일은…….”

-어. 강등이고 뭐고 고소는 없었던 거로.

“아, 혹시 언니한테도 임지윤 씨 일, 말씀하셨어요?”

-그래, 오전에.

혜인의 말과 같았으나, 어딘가 찜찜한 건 해소되지 않았다.

세인이 대답이 없자 이상했는지 무영이 물어왔다.

-왜, 내가 실수한 거냐?

“언니가 알고 있길래 궁금해서요.”

-너보다 혜인이랑 더 연락을 자주 하지 않냐. 그러니 소식이 그쪽으로도 빨리 들어가지.

“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 부총, 사직서 쓴단 소린 못 하겠네?

세인은 돌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서, 곧장 그러겠단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더블나인이란 거대한 집합체가 또 다른 멍에처럼 세인을 억누르고 있었다.

“언니가 기다려요. 병실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래. 내일 출근하면 한번 올라와.

“네.”

세인을 고발한 두 직원의 처분도 결정해야 하니, 무영과 이야기를 나누긴 해야 했다.

통화를 끊고 나자 밤하늘이 유난히 깊어 보였다.

대기에 가려진 희미한 별이 꼭 세인 자신 같았다. 태어나 제대로 빛나지 못하는 어정쩡한 존재.

“대표님이 날 좋아한다고?”

글쎄.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영이 나쁜 쪽으로 추근댄 적도 없을뿐더러, 그런 의미로 플러팅한 적도 없었다.

“정말?”

혼잣말을 웅얼대며 기억을 더듬어보자,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혜인은 무영을 갖다 붙여서 불륜이란 거짓말을 지어내고 이한을 욕보이려 하고 있었다.

소름 돋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이 말들이 전부 혜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마음 아프고 괴로웠다.

벤치 위의 가로등이 정전되듯 핏, 수명을 잃었다. 불빛마저 그녀를 돕지 않는 날이었다.

세인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형체가 세인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서이한.

그가 거침없고 우아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푸른 장미처럼 고고한 남자가 세인의 앞에 섰다.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얼굴이네. 누구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청승 떨고 있어.”

적재적소에 나타나 세인을 위로하는 그는 따뜻한 빛 같기도 하고 시원한 바람 같기도 했다.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자, 아릿한 심장이 더욱 조여왔다.

“아픈 사람이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집에서 바쁜 아내 기다리는 일이 더 힘들지.”

이한이 변죽 좋게 대꾸하자, 세인의 눈앞이 흐려졌다.

“왜 그랬어요?”

세인이 어둑한 공기에서 그의 눈동자를 찾아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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