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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7화 (47/95)
  • 두 번째 신혼 47화

    핸드폰 알림음이 울렸다.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세인은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꽃꽂이 사진이 화려했다.

    하얀색과 오렌지색의 튤립이 싱그러웠다. 그중에 푸른색 장미가 가장 눈에 띄었다.

    세인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 메시지를 작성하기 위해 키패드를 눌렀다.

    [제가 좋아하는 색이에요. 파란 장미 꽃말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들었어요. 매번 좋은 사진 감사해요.]

    평소라면 ‘예쁘네요, 감사합니다’로 끝났던 메시지가 조금 풍성해져 있었다.

    세인은 뒤에 웃음 표시를 덧붙일까 하다가 어른에게 예의가 아닌가 싶어 그만두었다.

    평소답지 않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곧장 답장이 왔다.

    [꽃바구니를 보내줄까?]

    문자에서 그녀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한과 닮은 분위기를 지닌 그녀는 사실 상대하기 조금 어려웠다.

    세인은 조금 망설이다가 거절하는 것도 민망해서 네, 하고 짧은 단어를 톡톡 눌러 전송했다.

    파란 장미는 이한 같았다.

    어두우면서도 차갑고, 시원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같은 사람.

    그런 그가 세인의 가슴 속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세인은 병실 앞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 고발까지 당한 마당에 혜인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까.

    정말 혜인이 지윤에게 고발과 협박을 종용했을까.

    이간질에 그치지 않고 지윤이 고발하고, 평사원으로 강등되도록 지시한 게 정말 혜인일까.

    그렇게 해서 혜인이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부총지배인이란 직함이 마음에 든다던 혜인이었다.

    그런데 왜 평사원으로 끌어내리고 싶어진 걸까.

    그저 내가 싫어서?

    지금의 세인으로서는 도무지 혜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속 시원히 묻지 못하는 처지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직접 물을 용기는 없었다.

    암만 머리를 굴려봐야 명쾌한 답은 안 나왔다.

    “왔어?”

    세인은 해맑은 미소를 띠며 반겨주는 혜인의 시선을 모로 피하며 겨우 웃었다.

    “응. 몸은 좀 어때?”

    “항상 같지. 무기력해. 어지럽고.”

    “이모님, 언니 밥은 좀 먹었어요?”

    세인이 가습기를 조절하는 간병인 이모님에게 질문했다.

    “에휴. 말도 마셔요.”

    힘없이 고개를 젓는 그녀의 태도를 보아, 혜인은 오늘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듯했다.

    세인은 껄끄러움을 떨치려 노력하며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밖으로 나와 베드로 향하자, 혜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좀 씻고 싶어. 아침에도 대충 씻었단 말이야.”

    간병인 이모님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 기력이 없으셔서 세안도 겨우 했어요.”

    “이모님, 따뜻한 물 좀 받아주시겠어요?”

    “네. 금방 준비할게요.”

    개인 욕실을 향해 간병인 이모님이 사라졌다.

    그리고 분주하게 병실을 정돈하던 세인은 제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혜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무슨 할 말 있어?”

    “그냥. 병원에 갇혀 있으니까 살맛이 안 나. 차라리 어디 공기 좋은 데가 낫겠어.”

    혜인이 나가고 싶다는 듯 창문을 바라보았다.

    “오늘 산책은 했어?”

    “내가 강아지도 아니고, 요 앞에 나간다고 흥이 나겠니?”

    혜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병원이 아닌, 완전한 외부로 나가고 싶단 완곡한 표현인 것을 세인이 어떻게 모를까.

    그러나 세인은 부쩍 살이 빠져 버린 혜인이 걱정이었다. 고소 건과 별개로 혜인이 진심으로 걱정됐다.

    “바깥바람 오래 맞았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떻게 해.”

    “얘는. 내가 무슨 중병 환자니?”

    혜인이 투덜댔다.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라 과도한 활동은 금물이었다.

    재활 커리큘럼에 속한 운동 치료와 작업 치료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버거울 거다.

    “언니 여기 와서 2㎏이나 빠졌잖아.”

    “입맛이 없는 걸 어떻게 하니.”

    “내 정신 좀 봐. 전복죽 만들어 왔는데, 깜빡하고 차에 두고 왔어. 씻고 가져올게. 그거라도 먹어보자.”

    세인이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혜인의 자세를 바꿔주려 옆으로 눕히곤 머리 위치를 다시 잡아주었다.

    혜인이 숨을 약간 가쁘게 내쉬며, 고작 이 정도에도 힘겨움을 내비쳤다.

    그래, 혜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꾸몄든, 세인은 그걸 탓할 자격이 없었다.

    혜인의 잘잘못을 가리고 처벌할 뻔뻔한 염치 따위, 가져선 안 되었다.

    모든 건 세인의 탓이었다. 어떤 것이든 감수해야 했다.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힘이 빠져버린 걸까.

    세인은 이를 악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아냈다.

    그리고 혜인의 목욕을 도우며 빼빼 마른 그녀의 다리를 눈에 깊게 새겼다.

    혜인의 환부는 세인의 멍에였다.

    영원히 내려놓을 수 없는 죄의 추.

    머리를 감은 뒤, 혜인이 잠시 뜨거운 물에서 몸의 피로를 풀고 있을 때였다. 혜인이 입을 열었다.

    “서 전무 말이야.”

    멍하니 거품을 문지르고 있던 세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

    “여자 소문 안 좋더라.”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야?”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외모 밝힌다며?”

    세인이 콧등을 찡그리며 말을 아꼈다.

    “잘난 남자는 잘난 값을 하잖니. 눈 높은 건 그래, 그렇다 쳐. 그런데 여자 안 가린다는 건 좀 더럽다.”

    “다 헛소문이야.”

    “얘는. 다 그럴 만하니까 소문이 나는 거야.”

    “소문이 전부 아닌 거 언니도 알잖아.”

    “서 전무, 미국에서 살림까지 차렸다고 하던데?”

    세인은 시큰한 숨을 속으로 삼켰다.

    더블나인의 소문 대부분은 과장된 것이었다.

    비교적 정확한 주식 시장 얘기나 경제 정보에 비해, 가십은 늘 더럽고 추잡했다.

    이 바닥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혜인이 한쪽 눈을 가린 것처럼 소문을 맹신하는 게 섭섭했다. 또한 의아했다.

    “서 전무, 문란한 거 예전부터 유명했잖아. 형 죽고 나서 정신 차렸다더니, 순 거짓말인 거지. 제 버릇 개 주겠어?”

    “언니.”

    세인은 자신을 찌르는 모난 말보다 이한을 모욕하는 말에 더 울분이 솟아났다.

    왜 이한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대체 누가 이딴 말들을 옮기고 다니는지 화가 났다.

    혹시 전부 혜인이 지어낸 말들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이제 막 쌓아 올리기 시작한 이한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려는 혜인이 미워졌다.

    그럴 주제도 못 되면서 혜인이 원망스러웠다.

    아마도 이한의 진심을 믿게 됐기 때문이겠지.

    세인이 일렁이는 기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한 씨, 소문처럼 나쁜 사람 아니야. 여자 친구도 내가 처음이었고.”

    “편드니? 넌 그렇게 당해 놓고 편이 들고 싶어?”

    “적어도 선은 지키는 사람이란 뜻이야.”

    “모자라긴.”

    혜인이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갔다.

    “이러니까 너한테 서 전무가 과분하단 거야.”

    “뭐?”

    “너랑 격이 안 맞는 건 사실이잖니? 그러니까 엄마 아빠도 쩔쩔매는 거고. 엄마 아빠 그러는 거 솔직히 보기 힘들어.”

    혜인이 씩씩댔다.

    부모님이 이한을 어려워하는 건 정략결혼으로 그와 맺어졌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동등한 관계가 되기엔 제문 그룹이라는 산이 너무도 컸다.

    그리고 그런 점을 감수할 만큼 부모님은 이 결혼을 환영했다.

    혜인이 지금에 와서 반감을 드러낸다 한들, 의미는 없을 거란 뜻이었다.

    “알지? 난 이 결혼 처음부터 반대였어.”

    씁쓸하게 웃은 세인이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언니, 이제 나가자. 슬슬 물 차가워진다.”

    세인은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러지 않으면 혜인에게 화를 낼 것 같았다.

    “너 그러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이혼해.”

    순간 손끝에 힘이 풀렸다. 세인이 샤워기를 놓치며 덜컹, 큰 소리가 났다.

    공격당한 뱀처럼 샤워기가 널을 뛰며 사방에 물을 뿌렸다.

    “어머머! 두 분, 괜찮으세요?”

    곁에 있던 간병인 이모님이 달려와 뒤집힌 샤워기를 주워 들었으나, 세인은 멍하니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야? 이혼이라니……?”

    “내가 보기 힘들어서 그래. 남들 앞에서 쇼하면서까지 그 남자랑 살고 싶니? 세인아, 인생 길어.”

    “…….”

    “부모님은 내가 설득할게. 넌 마음 단단히 먹고 이혼 준비해. 아는 변호사 이미 말해 놨어.”

    기막힌 일이었다. 세인도 모르게 세인의 이혼 변호사가 선임되었으니.

    “넌 언니 말대로 해.”

    “……이한 씨도 그렇고 아무리 언니라도 부모님 설득 못 해. 이 결혼이 어떤 건지, 언니도 알잖아.”

    “내가 재활 잘 받겠다고 하면, 엄마는 두 팔 벌려 환영할걸? 그럼 엄마한테 쩔쩔매는 아빠 설득하는 건 시간문제야.”

    재활과 이혼.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저울에 매달려 세인의 머리를 쿵쿵 찧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혼이라니…….”

    세인이 말을 더듬으며 이마를 짚었다.

    혜인이 전부터 이한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어린애처럼 떼를 부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문 그룹과 세이지오 자산.

    거미줄처럼 얽힌 이해관계가 단절된다면 불리한 건 당연히 세인의 친정 쪽이었다.

    또한 이한 측에서 고분고분 이혼해 줄 연유가 없었다.

    한참 부족한 처가를 맞이했는데 얼마 못 가 이혼한다면 이한의 꼴이 아주 우습게 될 터였다.

    세인이 차디찬 손으로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언니, 이혼도 명분이 있어야…….”

    “명분 만드는 게 뭐 어렵니? 어차피 너 곧 평사원 될 텐데. 그럼 볼 것도 없겠지. 거기에 스캔들 하나만 만들면 제문에서도 두 손 두 발 들지 않겠니?”

    “뭐……?”

    “불륜 스캔들 살짝 흘리면 금방이야.”

    세인은 폭탄 같은 말들 속에서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 부분을 지적했다.

    “평사원 된다는 얘긴 어떻게 알고 있어?”

    세인이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낭패감 서린 표정을 한 혜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수챗구멍 속으로 거품이 섞인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을 전부 비운 뒤에 몸을 헹구기 위해 간병인 이모님이 바짝 붙어 섰을 때, 세인은 다시금 물어야 했다.

    “언니가 그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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