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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6화 (46/95)
  • 두 번째 신혼 46화

    더블나인의 필드 한가운데.

    드라이버 헤드에 빗맞은 골프공이 떼구르르, 힘없이 휘어졌다.

    에잇, 거친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직원에게 골프채를 거칠게 떠맡겼다.

    배가 남산만 한 사내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가 급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내가! 어? 누군지 알아? 너! 알아, 몰라!”

    남자의 두툼한 손가락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세인의 안면이었다.

    큰일이 났단 보고에 달려와 보니, 오늘도 평화롭게 진상 하나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회원님.”

    세인이 한껏 미안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면목 없단 티를 팍팍 내줘야 화난 마음이 수그러드는 법이다.

    “누굴, 어? 거지로 아나.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내가 돈을 안 줄까 싶어?”

    남자는 회원권 결제 연체 이력이 있어 더블나인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방문 고객을 문전박대 할 수 없으니 체크인을 허가한 건데, 결국 골프장에서 이 사달이 났다.

    “게임에 참여하겠단 말이야. 게임! 어? 모르면 대표 불러와!”

    “회원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불법 도박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부대시설 안에 카지노가 포함되어 있으니 언제라도 이용해 주십시오.”

    세인이 매뉴얼대로 단정히 대꾸했다.

    “누굴 바보로 알아? 어? 호텔 지하에 땅굴 파놓고 돈 쓸어 담는 거 모르는 사람이 있냔 말이야!”

    “오빠, 그만해.”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족히 남자의 딸뻘은 되어 보이는 여자가 나서서 그의 팔을 잡고 만류했다.

    “뭘 그만해. 이것들이 사람 살살 약 올리면서 말이야. 뒤에서 쑥덕거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쾅.

    남자가 분을 못 이겨 야외용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바람에 물잔과 음료가 튕겨 바닥으로 엎어졌다.

    “꺅!”

    여자의 신상 원피스에 생과일주스가 튀는 대참사가 일어났으나, 남자는 이미 눈이 반쯤 돈 상태였다.

    씩씩거리며 보스턴 백의 배를 죽 가른 남자가 그 안에서 돈뭉치를 꺼냈다. 세인은 살포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감정을 감추었다.

    재빨리 음료를 뒤집어쓴 여성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침착하게 말했다.

    “고객님, 이만 쉬실 수 있게 객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이게 누굴 뒷방에 가두려고! 어?”

    남자가 지폐를 하늘에 뿌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미치광이처럼 발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세인은 남자가 제풀에 지칠 때까지 멀거니 서 있다가, 소동이 잠잠해질 때쯤 특급 코스 마사지 패키지를 선물한 뒤에야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진땀을 빼고 나자 오전이 쏜살같이 지나가 있었다.

    세인은 점심도 거른 채, 사무실로 이동했다. 걷는 동안엔 서류를 들고 나타난 지민에게 간단한 보고를 받았다.

    “지배인님, 말씀하신 지정 컨시어지 교체를 원하는 고객 명단입니다.”

    세인은 걸어가는 동안 서류를 펼쳐 사유를 살폈다. 컨시어지의 서비스가 형편없었다면 큰 문제였다.

    “그리고 당일 워크인 가격이 변동됐습니다. 전의 해피 아워 개편안에 대해서도 정리된 항목 있습니다.”

    세인이 죽죽 활자를 읽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고맙게도 엘리베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서류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끝마쳐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런데요, 지배인님.”

    “말하세요.”

    “저희 호텔에 정말 그거 있어요?”

    세인에게 바짝 붙어 선 지민이 속삭이듯 물었다.

    “그거라니요?”

    “하우스 말이에요. 저희가 모르는 곳에 있다던데요?”

    세인이 실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었다.

    “글쎄요. 저는 모르겠는걸요.”

    암암리에 열렸다가 닫혔다 하는 공간을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르는 척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관여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오늘처럼 무식하게 초대받길 원하는 손님이 있을 땐 얘기가 달랐지만.

    무영을 통해 남자 손님에게 이용 루트를 전달하는 게 나으려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보단 모양새가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법적인 일에 동조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마침 무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세인은 서류를 정리해 들곤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네. 대표님.”

    -부총아, 잠깐 사무실로 와라. 빨리.

    제법 심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인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

    “네.”

    세인은 지민을 먼저 보내고, 대표실로 올라갔다. 무영의 사무실에서 알싸한 계피 향이 번져왔다.

    “부르셨어요.”

    “어, 거기 앉아라.”

    고개 숙여 인사한 세인은 무영이 눈짓하는 자리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블랙커피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골프채를 내려놓은 무영이 세인의 오른쪽 상석에 착석하며 말했다.

    “조심 좀 하지 그랬냐.”

    “무슨 말씀이세요?”

    오전 일이 벌써 무영의 귀에 들어갔나,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무영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임지윤이 인사과에 너 고발했다.”

    “그게, 무슨…….”

    세인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현준을 신경 쓰느라 지윤이 어떻게 나올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발을 했다고요?”

    “경영관리부 최은정, 강나윤, 두 사람이 사내 괴롭힘 뭐 그딴 거로 널 고발했어.”

    “네?”

    “뭐겠냐. 두 사람을 돈으로 매수한 거지.”

    “임지윤 회원이 사주했단 말씀이에요?”

    세인이 옅게 웃었다. 유치하고 황당했다.

    “이렇게 될 건 예상 못 했냐?”

    “이런 걸 누가 예상을 하겠어요.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까요?”

    “인사과에 그 뭐냐, 성 의원 아들이 부장으로 있잖냐.”

    “네.”

    “걔가 또 강나윤이랑 애인 사이라네?”

    작정하고 몰아내겠단 걸까. 그러나 세인에겐 그다지 겁나지 않는 협박이었다.

    증거 없는 고발일 터인 데다, 부총지배인 직급은 위협받는 자리도 아니었다.

    더블나인 별관을 세인의 부친 홍춘이 올렸단 말이 있었으니 세인의 위치는 꽤 견고한 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맞붙어 싸우는 게 낫겠단 마음이 들었다.

    현준이 연락을 피해서 곤란했는데, 차라리 지윤이 이렇게 나와주니 속이 시원하달까.

    어떤 식으로 상대할지 골치 아프던 차에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지윤을 상대하며 꼬리를 자르려는 현준까지 엮어보는 게 나을 성싶었다.

    이조차 혜인의 사주일지도 모른다는 찜찜한 가설만 아니라면, 세인은 활짝 웃었을 터였다.

    “대표님, 저는 강나윤 씨 그리고 최은정 씨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이야기 나눈 적도 거의 없고요.”

    “알지, 알아.”

    “그런데 털어서 나올 게 있을까요?”

    “털어서 안 나오면 만드는 게 이 바닥이야. 부총아, 생각해 봐라. 말 지어내는 데 장사 있냐?”

    무영이 담배 연기를 짙게 흩뜨렸다.

    “클레임으로 안 되니까 내부 고발로 방향 틀겠다 이건데, 솔직히 이런 건 좀 짜증이 나네.”

    무영이 해결하기엔 귀찮고 유치한 종류의 일이었다.

    끼어들어 무력을 행사하자니 대표로서 민망해지고,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고발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하는 게 뭐라던가요?”

    설마 이것까지 혜인의 지시일까.

    과한 추측일지 모르지만, 세인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이상해진 혜인이 무언가 숨기는 것 같기도 했다.

    지윤을 섣불리 자극했다가 혜인의 이름을 말하기라도 하면, 또 다른 곤란함이 발생했다.

    자매간의 싸움이 호텔 내부까지 뒤흔들었단 소문은 피해야 했다.

    “부총지배인 정세인 직위 해제. 평사원으로 강등하라는 게 임지윤 쪽 조건이야. 그럼 조용히 묻어주겠다고 한단다.”

    무영이 내민 것은 두툼한 서류였다. 세인은 그걸 받아 읽었다.

    자필로 쓴 서류는 세인이 언제 어떻게 최은정과 강나윤을 괴롭혔는지 기가 막힐 만큼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전부 거짓이었다.

    “임지윤 이거 완전 또라이야. 강현준 때문에 눈이 돌았어, 그거.”

    무영은 아직 현준과 이한의 일을 모르는 듯했다.

    세인은 입막음에 성공했단 사실에 한편으로 안도했다.

    “차라리 강현준을 너 하던 대로, 어? 대충 맞춰주지 그랬냐. 그랬으면 지금까지 너한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도 않았을 건데.”

    “하던 대로라니요?”

    세인이 의문을 띠고 물었다.

    “됐고.”

    무영이 휘휘 손을 저으며 말을 끊었다. 그러나 세인은 찰나 그의 눈에 맺힌 경멸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대표님도 제가 몸으로, 손님들을 로비한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그걸 나쁘다 하냐?”

    “맞네요, 그렇게 생각한 거.”

    말끝이 떨려왔으나 세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화가 났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세인의 몸뚱이에 대해 함부로 떠들었다.

    세인은 이한과 결혼한,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표님, 저 결혼했어요.”

    “아, X발. 누가 뭐라고 했냐? 너 비난하는 게 아니라 아…….”

    무영이 두꺼운 손등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런 머리 아픈 상황에 영 면역이 없는 터다.

    그야 무력을 행사하고, 인맥을 이용해 일을 해결하는 게 쉬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엔 뭐가 최선인지 계산할 시간이 필요할 터다.

    “차라리 사직서를 낼게요.”

    “뭐?”

    무영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이 지윤의 머리에서 나온 일이라면 차라리 사직을 요구했을 거다.

    그런데 더블나인에 계속 남도록 하면서, 평사원으로 강등시키겠단 저의를 보면…….

    역시 혜인의 지시 같았다.

    꽉 말린 세인의 손이 차가워졌다.

    “부총아,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저 여기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요.”

    “됐다, 됐어.”

    무영이 손을 휘휘 저었다.

    “사직서 쓸게요.”

    무슨 용기에서인지 세인은 결심한 투로 말했다.

    세인이 굳이 더블나인에서 근무하지 않아도, 혜인은 손님으로서 머무를 수 있었다.

    물론 혜인의 반발이 심하겠지만, 입원 중인 혜인을 좀 더 살뜰하게 보살필 수도 있을 터다.

    혜인이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하는 것 또한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동안 비굴하게 도망쳤다면, 세인은 조금 맞서보고 싶어졌다.

    “피곤한 것 같은데 우선 가봐. 내가 임 본부장 만나볼 테니까 허튼 생각 말고.”

    “저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만약 이한이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돌아갈 곳이 없었더라면 이런 결정은 내리지 않았겠지.

    무언갈 말하려던 무영이 새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이런 거로 사직서만 내봐. 이혼하기 전까진 안 돼.”

    “이혼이요?”

    잘못 들었나 해서 세인이 되묻자, 무영이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임 본부장 접대하면서 달래보려니까, 너는 잠깐 이 일에서 잠깐 빠져 있어.”

    “대표님.”

    “내 생각이 짧았어. 이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내가 대표인데. 그래, 나가 봐.”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무영이 눈을 감아버렸다.

    세인은 무거운 한숨을 삼킨 채,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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