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45화
세인이 염려되는 마음을 더는 외면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잠은 잘 잤어요? 불면증이 심하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들어온 순간부터 서류를 내팽개치고 세인에게 모든 관심을 쏟은 이한이 피식 웃었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해.”
“다쳤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잘 자야 한다고요.”
“만성이 되어서 하루 이틀 못 잔다고 탈 나진 않아.”
“……혹시 나 때문에 침실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이한이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세인의 입안이 말라갔다.
이렇게 지긋이, 살피듯 이한이 바라볼 때면 쥐구멍을 찾고 싶기도 했고 투신하듯 다가오는 그를 품에 안고 싶기도 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 똑똑하지 못한 정세인.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깊어가는 밤 때문인지 감상적으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나 때문에 못 자는 거, 아닌 거죠?”
세인이 한 번 더 묻고 나서야 이한이 입을 열었다.
“화상 회의가 있었어. 지금 그 건에 대해 마무리 중이고. 금방 끝낼 거야.”
툭툭. 이한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리 와.”
“……왜요?”
“나 기다린 얼굴인데.”
“아니거든요.”
“내가 직접 가면, 제어가 안 될 것 같아. 이리 와줘.”
이한은 눈썹이 살짝 구겨진 채로 말을 이었다.
“입 맞추고 싶은데. 지금 일어나면, 널 침실까지 데려가게 될 거야.”
세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한이 불을 품은 것처럼 뜨거워질 때면, 그의 진심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얼른. 몰아세우기 싫으니까.”
업무 때문일까. 조금은 피곤한 투였다. 그게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이한이 다시금 세인을 재촉했다.
“정세인.”
“이번만이에요. 아프니까. 이번 한 번만 내가 봐주는 거라고요.”
“그래, 고마워.”
세인이 미적미적 몸을 움직였다. 대리석 바닥 위로 슬리퍼가 질질 끌렸다.
마치, 이한에게 다가가고 싶어 안달 나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그의 앞에 당도했다.
막상 책상 앞에 서자, 세인은 경계하는 소동물처럼 어깨를 웅크렸다.
“더 와야지.”
이한이 약간 잠긴 목소리로 재촉했다.
“요구가 많으시네요.”
“이왕 하는 김에, 좀 더 들어줘 봐.”
세인이 책상을 돌아가자, 그가 살짝 다리를 벌려 다리 사이로 세인을 들어서게 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안개처럼 뒤엉켰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자욱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이한을 마주 봐야 안심이 되고 그의 표정을, 온기를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다니.
세인은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진짜로 웃네.”
“웃겨서요.”
“그래, 내 꼴이 좀 그렇지?”
고개를 저은 세인이 손을 뻗어 목 끝까지 채운 이한의 셔츠 단추를 매만졌다.
“상처 확인해도 돼요?”
“붕대 푸는 건 안 돼. 아파서 소리 지를지도 모르거든.”
세인이 첫 번째 단추를 옆으로 밀어낼 때,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책임질 거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요.”
세인이 물으며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더 풀어냈다.
다행히 반창고 위로 피가 배거나 하진 않았다.
어떻게 꿰맨 건지 자세한 상태가 궁금했으나, 이한이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아파서 못 참는다더니 조심성 없는 손길이었다.
“그만 봐. 상처 난 곳 닳아.”
“괜찮은 거 맞아요?”
혜인의 병원에 간 탓에 이한이 상처를 드레싱할 때 함께 있지 못했다.
김 교수가 알아서 처지를 해주었겠지만 그래도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본가나 다른 가족들에게 부상을 알리진 않은 것 같으니, 이한 혼자 아픔을 감당하고 있을 거다.
갑자기 마음이 아렸다. 고군분투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고 외로운 일이었다.
“김 교수님이 뭐라던가요? 거짓말할 생각 말고 전부 말해요.”
“상처는 괜찮아. 다만.”
“다만?”
“애정과 관심을 받아야 빨리 낫는다던데.”
세인이 눈을 살짝 치뜨며 다시 물었다.
“가족분들에겐 알리지 않을 거예요?”
“가장 가까운 가족이 여기 있는데, 굳이 알릴 필요가 있어?”
이한이 세인의 손을 그러쥐었다. 반대 손으론 마른 허리를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세인은 중심을 잃고 그의 허벅지 위로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편하게 올라와 봐.”
“편하겠어요?”
눈을 질끈 감으며 세인이 투덜댔다. 이한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휙,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내 위로 앉아.”
낮고 짙은 목소리. 그러나 유혹적인 음성이 세인을 현혹했다.
“상처 누를 것 같으니까 막 당기지 말아요.”
결국 세인은 못 이기는 척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마주 앉았다.
쿵쿵쿵. 심장이 그녀의 귓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사실 세인은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온종일 이한 생각만 했다.
이한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모질게 말해 놓곤 정작,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질질 끌려가며 선을 지키지 못하는 건 되레 세인이었다.
이제 인정해야겠지.
그에게 끌리는 마음은 불가항력이었다. 용암처럼 밀려드는 이한이 더는 밉지 않았다.
그런 것 같았다.
사실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이 미울 뿐.
“하…….”
“웬 한숨이야.”
“그런 게 있어요.”
세인은 허리를 들썩이며 간지러운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다.
그녀가 움직일수록 이한의 골반 깊숙한 곳으로 엉덩이가 빨려 들어갔다.
세인이 눈을 맞추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이한이 그녀의 뺨을 감싸 눈을 바로 보도록 했다.
거센 박동이 세인의 갈빗대를 두드리고 있었다.
“밥은 잘 먹었고?”
“식사 권장 홍보 대사라도 하는 거예요? 맨날 밥 얘기만 해.”
“그럼, 내 생각은 좀 했어?”
“네. 너무 밉더라고요.”
“나도 했어. 누가 머릿속을 떠나야 말이지.”
이한의 묵직한 목소리가 잔잔한 파동으로 다가와, 이내 해일처럼 세인을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정세인도 나밖에 없어야지.”
침묵이 공간을 에워쌌다. 세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난요, 그러질 못해요.”
혜인이 있으니까.
언제나 혜인이 첫 번째여야 했다. 그래서 조금 슬펐다.
세인은 내리깐 시선으로 붕대를 살피며 참담한 기분을 삼켰다.
이한도 사람인데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놀랐을까.
그러나 이한은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세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한 씨 다쳤단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세인 새가슴인 거 잘 알지.”
“칼을 맞았다고 하는데…… 크게 다친 건 아닌지…… 잘못되는 건 아닌지,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고요.”
“내가 먼저 죽는 일은 없어. 네가 재혼하는 꼴은 못 보거든.”
“지금 농담이 나와요?”
세인이 젖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세인아, 이게 농담으로 들려? 사별이든 이혼이든. 내 인생에 너와의 이별은 없어.”
단단한 눈빛이 흐물거리는 세인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었다.
만약 이한과 갈라선다면, 법적 책임, 집안의 입장, 서 회장과의 관계 등 복잡한 문제가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는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그를 잃기 싫었다.
이한이 다쳤단 소리를 들었을 때, 순수하게 그를 걱정했다. 이한에게로 달려가는 내내 무너질 것 같았던 이유.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다치는 게 싫단 그런 마음이야 물론 있었다,
다만 그보단 이한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6년 전, 병원복을 입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이한의 모습은 세인의 마음에 깊게 박혀 있었다.
이한이 다시는 병들지 않길. 자신을 버리고 떠났어도 훨훨 날아가길.
사실은 내내 기원했었다.
세인은 이 남자를, 서이한의 안녕을 지금껏 소망하고 있었던 거다.
툭, 세인의 뽀얀 뺨으로 맑은 눈물이 타고 흘렀다.
첫사랑, 전 남친, 미운 사람, 배신자, 남편.
세상의 모든 감정을 함축한 유일무이한 대상, 서이한.
세인은 이한의 셔츠를 쥐고 눈물을 터뜨렸다. 한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이한이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남은 경계심마저 무너져 버렸다.
“흐윽……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네가 울어서 마음이 아픈데, 나 때문에 운다고 생각하면 기뻐.”
뜨거운 감촉이 세인의 눈가에 닿았다. 이한이 입술로 말간 눈물이 닿은 살갗을 천천히 핥아 내렸다.
뺨으로, 턱으로. 그리고 입술로.
세인이 입술을 벌려 그를 허락하자, 이한은 거침없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뜨거운 것이 틈새를 가르고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빠듯한 이물감이 할딱이는 호흡을 갉아먹으며 혼미한 쾌락으로 이끌었다.
“흣…….”
힘겨워하는 세인의 등줄기를 어루만지며 그가 감미롭게 점막을 휘저었다. 세인은 떨리는 손으로 이한의 셔츠 깃을 꽉 쥐었다.
뜨겁게 마찰하던 입술이 잠시간 떨어진 자리, 차가운 공기가 닿자 세인은 부쩍 아쉬워졌다.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이한이 낮게 속삭였다.
“더한 걸 하고 싶어져.”
세인의 티셔츠 자락을 파고든 손이 허리 부근에서 멈추어 배회했다. 그녀는 뱃가죽이 납작해질 만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세인이 빨갛게 번진 눈을 하고서 이한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심한 운동을 하면 안 돼요.”
“환자라서 안 돼?”
이한이 볼우물을 보이며 웃는 순간 세인은 허탈하게 따라 웃고 말았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걸 알고 이한의 서재 문을 두드렸는지도 몰랐다.
날카롭게 요동하는 이한의 목울대를 세인이 만지자,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부드러운 살결을 처음으로 그에게 내어주었다.
세인은 티셔츠를 걷어 올린 채 사납게 얼굴을 파묻은 이한을 품으로 가득 끌어당겼다.
톡톡톡. 늦여름의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