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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4화 (44/95)
  • 두 번째 신혼 44화

    이한이 가라앉은 투로 세인을 향해 말했다.

    “네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았어. 윤 비서도 함께 있었고. 그리고 겨우 너를 만났는데 편히 죽을 수 있었겠어?”

    “서른 바늘이나 꿰맬 만큼 다쳤어요. 이게 위험하지 않은 거면 대체 뭐가 위험한 거예요?”

    이한이라고 해서 세인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한 또한 자신의 잘못으로 형 재한을 떠나보냈으니.

    그래서 세인이 죄책감을 내려놓지 못하는 걸 이해했다.

    6년 전, 이한은 최선을 다하는 세인을 통해 자신의 죗값을 치러낼 방법을 깨달았다.

    형 재한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대신 이루는 것. 서재한이 바랐던 삶을 살아가는 것.

    이한은 그렇게 자신이 속죄할 길을 찾아냈다.

    노력과 최선은 세인이 안겨준 해답이었다. 그것이 지금껏 이한을 살게 했다.

    그러나 세인에겐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할 의무도, 명분도 없었다. 애초에 죄책감은 세인의 몫이 아니었으니.

    세인이 고작 강현준이란 쓰레기에게 감정 소모할 이유가 없는 거다.

    정혜인의 근본적인 문제가 세인의 탓이 아니란 것.

    며칠 전 알게 된 그 진실을, 아마 세인에겐 말할 수 없겠지.

    그녀가 이 이상 아프길 바라진 않으니까.

    그래서 이한은 세인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정세인, 나한테 미안하면 그만큼만 당당해져 봐.”

    “그러니까 강현준을 만나게 해줘요.”

    눈물에 젖은 세인의 눈가가 꼭 별빛같이 반짝였다. 맑고 투명한 세인의 심성은 누구보다 상처받기 쉬울 터였다.

    “너 때문에 사는 날 봐봐. 네 덕에 내가 살아가는데, 책임감이 안 느껴져?”

    이한이 손을 뻗어 세인의 눈가와 뺨을 문질렀다. 따뜻한 촉감이 이한의 가슴까지 스며들었다.

    살아 있는 정세인. 눈앞의 정세인. 만질 수 있는 세인.

    그것만으로도 이한의 삶은 의미가 있었다.

    “멋대로 날 살려놨으면, 정세인도 잘 살아야지. 너 하나 보고 사는 사람 가슴 문드러지게 하지 말고.”

    이한은 세인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제 가슴을 쿵, 내려치게 했다.

    “네가 여기에 칼을 꽂아도 난, 기꺼워.”

    서투른 방식으로 그녀를 상처를 입힐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이한은 이제 멈출 방법을 몰랐다.

    “더는 강현준의 일에 관련되지 마. 여기까지가 내 허용선이야.”

    “……아뇨. 이건 내가 해결할 일이에요. 이한 씨는 내 쪽으로 피해 보상을 청구해 줘요.”

    “계속 고집부릴 거지.”

    “선배 일, 아직 용서한 거 아니에요.”

    “선배? 아, 유주석.”

    “……앞으로는 내 일에 허락 없이 관여하지 말아주세요.”

    세인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가짜 미소를 지었다.

    이한이 시큰한 숨을 토해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느긋한 그의 동작엔 난감함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

    세인은 이한을 뒤로하고, 짐 정리 또한 미룬 채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이사를 핑계로 이틀이나 병원을 찾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인은 부랴부랴 혜인을 찾아가 기분이 저조해진 그녀를 달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혜인이 잠든 뒤에야 잠시 호텔에 들렀다가 귀가할 수 있었다.

    “하…….”

    오늘도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호텔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세인은 욱신대는 위를 문지르곤 신호에 맞춰 정차했던 차를 출발시켰다.

    현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은 이번에도 맥없이 끊겼다.

    강현준과 연락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 중이었다.

    조금 전 민성에게 전화가 왔다. 현준의 일은 전무님 선에서 해결하게 됐으니 사모님은 걱정 놓으라는 말이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고, 손을 뗄 수 있을까.

    그러나 애꿎은 민성에게 열을 낼 순 없어, 고분고분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하지…….”

    이한이라면 선처 없이 현준을 처리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 때문에 이한이 다쳤으니까.

    또 사람을 다치게 했다.

    혜인의 때처럼 이한에게 해를 끼쳤단 점이, 세인을 괴롭게 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해를 입는 것.

    그건 생각보다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마음이 가벼워지기 위해서라도 이 일을 꼭 직접 해결하고 싶었다.

    이기적이라고 한들, 그래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핸들을 쥔 세인의 마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돌연 걸려온 은희의 전화가 세인의 상심을 저 멀리 밀어냈다.

    “네, 엄마.”

    -혜인이는 좀 어떠니?

    은희는 바빠서 오늘 병원으로 오지 못했다. 은희가 혜인의 상태를 묻는 건 매일 있는 일이었다.

    “저녁을 많이 남겼어요. 요즘 식사량이 줄었고요.”

    -혜인이 병원 밥 싫어하잖니.

    “본가에서 여사님 반찬을 가져오곤 있는데, 영 입맛이 없나 봐요.”

    -너 잘하는 거 있지 않아? 호박찜. 그거 혜인이 잘 먹었잖아.

    “……내일 저녁에 병원으로 가져갈게요.”

    시간을 확인하며 세인이 답했다. 음식을 만들려면 근무시간을 이용해야 했지만, 어떻게든 짬을 내면 됐다.

    -그리고 서 전무 말이야. 식사 약속은 어떻게 한다니? 윤 비서가 확실한 답을 안 주는구나.

    “그게, 이번 주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게 바쁜 거야?

    이한이 칼에 찔렸단 사실을 쉽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라 세인은 얼버무렸다.

    “네. 저도 그렇고 이한 씨 정신없어요.”

    -서 전무가 그렇게 말하니? 아무리 그래도 네가 잘 구슬려야지. 처가 알기를 너무 우습게 아는 것도 문제야.

    은희의 연이은 타박이 오늘따라 피곤했다. 세인은 버릇처럼 띠고 있던 미소를 잃은 채, 핸들을 꽉 쥐었다.

    -조만간 자리 다시 마련해. 그게 도리다.

    “네.”

    -끊자.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사라지자, 전화 너머로 기계음만 남았다.

    블루투스 연결이 끊어지고 나자 공허함이 느껴졌다.

    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외로움이란 감정이 불쑥 고개를 쳐든 것이다.

    자꾸만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한 때문인 걸까.

    적막이 내려앉은 세상이 쓸쓸하게 여겨졌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세인은 현관을 들어갈 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이한은 약을 먹고 잠들었을까.

    아니면 불면증 때문에 쉽사리 숙면하지 못하고 있을까.

    혹시 몰라 넓은 집을 가로지르며 세인은 슬리퍼 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복도를 돌아 정원을 그림처럼 품은 거실로 들어섰을 때, 세인은 동작을 멈추었다.

    밝은 조명이 들어온 거실 한가운데에 이한이 있었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사라진 이한을 찾아냈을 때처럼 그는 정원을 향해 서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집안에서조차 그의 차림은 슈트였다. 재킷과 조끼가 생략된 차림이라곤 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모습이 집무실을 연상케 했다.

    “바로 매입할 겁니다. 내일 저녁 식사 전에 바이어 데려다 앉혀놔요.”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세인은 조금 먼 곳에서 이한의 음성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화상 회의에 진 본부장, 조 팀장, 서 부사장 얼굴 비치게 하고.”

    모두가 아는 이한의 모습이 이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세인은 제게만 보이는 이한의 다정함이 정말 특별하게 생각됐다.

    전화를 끊은 이한이 뒤로 돌아서다가 세인을 발견했다.

    그를 훔쳐본 걸 들킨 게 무안해서 세인은 싱긋 웃었다.

    “아직 안 잤어요?”

    “식사는.”

    식사 시간을 묻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아까 했어요.”

    대화가 끊기고 이한의 시선이 오래도록 세인에게 머물렀다.

    그러는 이한은 밥을 잘 챙겨 먹었는지, 약은 먹었고 주치의는 잘 만나보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한에게 허락 없이 깊게 관여하지 말라 엄포를 놓은 후였다. 이제 와서 살갑게 묻기엔 겸연쩍은 면이 있었다.

    다행히 이한의 안색은 괜찮았다.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터였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함을 미뤄둔 채 세인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서류와 파일, 태블릿 PC가 정돈된 모습으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한이 허리를 숙여 그것들을 챙겼다.

    “오른쪽 냉장고 두 번째 칸에 챙겨 먹어야 할 약이 있어. 앞으론 취침 전에 꼬박꼬박 챙겨.”

    “무슨 약이에요?”

    “위장에 좋은 거야. 핑계 댈 생각 말고 먹어.”

    위장이 안 좋은 건 어떻게 안 거지.

    은희조차, 혜인조차 모르는 걸 이한은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다.

    세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안 먹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건강식품 나도 좋아해요.”

    “푹 쉬어. 피곤해 보이네.”

    고개를 까닥이며 말을 마친 이한이 걸음을 옮겼다. 움직이는 방향이 서재 쪽인 걸 보니, 업무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만 쉬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한을 밀어낸 주제에 너무 제멋대로 구는 것 같아 차마 그러지 못했다.

    세인은 거실 등 스위치를 누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들어올 때까지 거실에서 기다린 걸까?

    에이, 아니겠지.

    씻고 침대에 누웠으나 세인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짙은 색상의 벽지 안에 박힌 별 조명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혹시 자신 때문에 이한이 잠들지 못하고 침실 밖을 서성이는 건 아닌지, 그런 근심 때문이었다.

    이 집의 침실은 하나뿐이었다. 게스트 룸조차 침대가 없었다.

    이한이 누울 곳이 마땅치 않아서 서재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아닐까.

    서재 문 앞에서 세인은 한참 망설였다. 노크하자니 방해할 듯싶었고, 그냥 들어가자니 무례한 짓 같았다.

    “하…….”

    생각이 너무 많은 거지.

    세인은 작게 노크 세 번을 했다.

    “들어와.”

    이한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자, 세인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돌렸다.

    모던한 책상을 앞에 둔 이한이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그 주변만 조명을 켜두어 상대적으로 주변이 어둑했다.

    “잠이 안 와?”

    서류를 살짝 내린 이한이 부드러운 투로 물었다.

    세인이 머뭇대다가 그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일이 많아 보이네요.”

    책상에 쌓인 서류와 파일, 커피 잔 등이 이한의 누적된 피곤함을 대변했다.

    “일이 없으면 서운할 정도지.”

    이한은 다른 사람의 일을 얘기하듯 덤덤한 태도였다. 주어진 업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한에게 세인은 자신을 투영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막중한 임무를 해결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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