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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3화 (43/95)
  • 두 번째 신혼 43화

    이한은 담배를 물었으나, 냄새가 날까 싶어 불을 붙이진 않았다. 습관을 고치려 필터를 물었을 뿐이었다.

    -강현준의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어떻게 됐어.”

    어제 사고 직후, 현준은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무력으로 잡아둘 수도 있었으나, 감시를 붙여 놔두었다.

    이미 함정에 빠진 쥐를 재차 발라먹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현준이 돌아간 뒤 정확히 30분 후, 강현준의 부친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성의 핸드폰으로.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 강 부사장은 당장 이한을 만나길 요청했다.

    그러나 치료를 핑계로 면담을 거절했다.

    강 부사장 속이, 속이 아닐 터였다.

    -전무님이 원하시는 대로 뭐든 하겠다고 합니다. 대신 사건 영상이 있다면 파기해 주길 바라는 눈치입니다.

    “형사 처벌을 피하겠다는 소리네.”

    -네. 대신 배상은 요구하는 대로 하겠답니다.

    “그딴 것도 아들이라고 싸고도는 모양이지.”

    -애정은 있어 보였습니다.

    “애정은 무슨.”

    -전무님 원하시는 대로 강현준을 처벌하겠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건 피하고 싶단 얘기였다. 그러니 이한의 본가 쪽으론 연락을 취하지 않은 거겠지.

    이대로 덮길 원하는 강 부사장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제 아들과 달리 목숨 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 아는 거다.

    이한도 멀리 돌아갈 생각 없었다.

    “강현준, 임지윤 같이 묶어서 영영 안 보이게 치우라고 전해. 입조심 시키고.”

    -네. 그럼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사모님께서 강현준 쪽으로 연락을 취하신 것 같습니다.

    “언제.”

    느긋했던 이한의 등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어젯밤 세인은 이한을 침대에 눕혀놓고 분주히 왔다 갔다 했다. 그사이 연락을 취한 건가.

    -어제저녁쯤이요. 사모님께서 직접 얘기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강현준이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나 봅니다.

    “보나 마나 질질 짜고 있겠지. 애새끼처럼.”

    -강 부사장이 전무님이 어려우면, 사모님께라도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이한의 한숨이 짙어졌다. 연기가 나지 않는 담배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세인이랑 만나게 하지 마.”

    -네. 그럼 오늘 회의는 미루겠습니다.

    “저녁에 화상 회의로 진행하지.”

    말을 마친 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거실 쪽에서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흰자위가 빨갛게 번진 세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편한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의 그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이한 씨, 어디 갔었어요?”

    그녀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이한의 세상이 다채롭게 변했다. 오로지 그녀만 보이기 시작하는 마법은 풀린 적이 없었다.

    이한은 세인의 맨발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은 테라스 의자 위로 아무렇게 던져졌다.

    “잠시 통화하느라. 푹 잤어?”

    “말도 안 하고, 어딜…… 간, 줄 알았잖아요…….”

    더듬더듬 말한 세인이 눈가를 비볐다. 졸린 건지, 우는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아 이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울어?”

    “아니거든요.”

    이한은 뻣뻣해지는 뒷덜미를 느끼며 그녀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내가 뭘 잘못했나.”

    “…….”

    “그래도 슬리퍼는 신고 다녀야지.”

    깨끗하게 단장을 마친 집이지만, 세인의 맨발을 보자 이한은 마음이 달그락거렸다.

    티끌 하나라도 세인에게 해가 될까 싶은 조바심이었다.

    슬리퍼를 벗은 이한은 바로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추었다. 세인의 발에 슬리퍼를 끼워주고 나서도 안심이 안 되었다.

    “남성용이니까 이따 꼭 갈아 신어. 벗겨지면 넘어져.”

    “일어나 보니까 없어서…….”

    이한이 고개를 들어 세인을 마주 보았다.

    세인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순식간에 한가득 넘실댔다.

    “갑자기 많이 아파져서 병원에 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전화도 안 받고 집도 넓어서…… 안 보이고…… 그래서.”

    세인은 작은 목소리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걱정한 건가. 내가 없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한은 눈치 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설레기도, 가슴이 아리기도 했다.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예요?”

    세인이 어딘가로 던져 버린 핸드폰의 행방을 찾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통화 중에 다른 전화가 들어오는 걸 알았으나, 일 때문에 걸려온 전화인 줄 알고 무시했다.

    세인의 전화인 줄 알았다면 당연히 그쪽이 우선이었을 거다.

    “미안해.”

    이한의 말에 세인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에 시름이 가득 얹어진 듯했다.

    “나 때문에 울기까지 하고, 정세인 다 컸네.”

    “누가 운다고 그래요. 졸려서. 하품이 나서…….”

    세인이 웅얼거리며 눈가를 비볐다. 저만 아는 세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이한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세인의 눈물이 마음 아프면서도 제게 몰두한 세인을 보고 있자니 기뻤다.

    이리도 혼재된 감정은 이한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약간 붕 뜬 세인의 머리칼이 귀여워서, 당장에라도 품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싶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마음이 아프고, 설레고. 그에겐 온통 세인뿐이었다.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한이 중얼거렸다.

    “네가 너무한 거야.”

    “……뭐라고요?”

    이한은 미소를 지었다가 무표정으로 돌변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채롭게 세인을 앓았다.

    그게 이상해 보였는지 세인이 손을 뻗어 이한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몸은 괜찮은 거예요?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다시 체온을 재볼까요?”

    “보다시피 건강해.”

    이한이 가운을 슬쩍 젖혀 주치의가 새로 붙여놓은 반창고를 보였다.

    피가 배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려 한 것인데, 세인의 표정이 더 나쁘게 일그러졌다.

    “사람이 왜 그래요?”

    “……어?”

    “물 닿지 않게 조심하란 말 못 들었어요?”

    “들었지.”

    “그런데 샤워하면 어떻게 해요.”

    세인의 뾰족한 눈이 이한의 젖은 머리칼과 가운 곳곳에 닿았다.

    아래로 내려가던 세인의 시선이 멈칫하더니 재빨리 상승했다. 귀여워라.

    아. 이한이 빙그레 웃었다.

    세인의 귀가 붉었다. 은은한 보디 워시 향이 두 사람 사이를 배회했다.

    “끄, 끈은 왜 풀고 다녀요?”

    “집인데 편해야지.”

    “이젠 조심해 줘요. 나도 함께 사니까…….”

    말을 마친 세인이 촉촉한 눈가를 다시금 훔쳤다. 이한은 다른 의미로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불붙으려는 심신을 달래려 의미 없이 웃었다.

    “그리고 당분간 담배는 태우지 말아요.”

    세인이 그의 손끝에 매달린 담배를 눈짓하며 말했다. 이한은 세인에게 불합격을 받은 담배를 부러뜨리며 흡족해했다.

    “참견이야?”

    “조언이에요.”

    “뭐든 감격이라서 그래.”

    주방을 향해 앞서가는가 싶던 세인이 뒤돌았다. 그러더니 콩콩 걸어와 이한의 흐트러진 가운 끈을 잡았다.

    “감기라도 들면 어떻게 해요? 가뜩이나 미열 있는 사람이…….”

    세인이 말끝을 흐리며 가운을 꼼꼼히 여몄다.

    “열이 더 나는 것 같아.”

    이한이 뻐근해지는 하체를 느끼며 말하자, 뭘 본 건지 세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가만히 있어요. 더 졸라 버리기 전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끈을 조여 꼼꼼하게 매듭지었다. 커다란 리본이 이한의 허리 한가운데 장식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씻고 싶으면 윤 비서님이나, 다른 사람 도움받는 게 좋겠어요.”

    샤워를 돕는 윤민성이라니. 이한은 상상만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그의 미소가 깊어졌다.

    “네가 도와주는 건 어때.”

    “내, 내가요?”

    “아내 두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거 이상하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세인이 입술을 우물대며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볼 건 실컷 본 것 같은데, 새삼 내 나체가 부끄러울 리도 없고.”

    “아, 안 봤거든요?”

    세인이 눈을 치뜨며 항변했다. 그녀의 목덜미가 노을처럼 붉었다.

    세인을 더 골리고 싶지만, 이한도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한이 덜 마른 머리칼을 약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강현준을 따로 만날 생각이야?”

    “네.”

    “내가 부탁해도 안 돼? 꼭 해야만 하겠어?”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에 고집이 단단하게 어려 있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직접 해결하게 해주세요. 강현준한테 죗값도 묻고, 반드시 보상도 받아낼 거예요.”

    “그걸 왜 너 혼자 하려는 거지.”

    이한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가뜩이나 다친 사람한테 이런 것까지 신경 쓰게 할 순 없잖아요.”

    “그래도 내가 해결하는 게 더 좋다고 한다면.”

    “나는…….”

    세인이 뜸을 들였다. 이한은 차분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게 끔찍하게 싫어요.”

    “알아.”

    그래서 이한의 마음이 아픈 거고, 한시라도 빨리 세인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이한 씨가 양보해 주면 안 돼요?”

    “그건 안 되겠는데.”

    “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도 안 돼요?”

    “강현준 대변인이라도 되나?”

    “뭐라고요?”

    “그렇게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사죄할 건 강현준이지, 네가 아니야.”

    “그럼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할까요? 내가…… 당신까지 죽일 뻔했는데…… 어떻게 미안해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세인이 정말 모르겠단 얼굴로, 말간 눈동자로 물어왔다.

    막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한의 가슴이 묵직하게 조여왔다.

    “정세인,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가 낮게 내뱉은 말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생명까지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운이 좋아서 이만한 거지…… 정말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다고요…….”

    세인이 쥐어짜듯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었단 걸 깨달은 이한은 조금 속으로 탄식했다.

    세인의 마음을 이해하나, 어제는 이한의 통제 아래 있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현준이 폭주해 주는 게 고마웠다고 말하면, 이 여린 여자는 상처를 받겠지.

    다치지 말았어야 했나.

    세인이 이렇게까지 자책할 줄 알았다면, 일을 이런 식으로 키우지 않았을 거다.

    지금껏 자신의 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는데, 세인의 일이 되니 판단이 흐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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