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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2화 (42/95)
  • 두 번째 신혼 42화

    세인이 미팅 룸으로 달려갔을 땐, 엉망이 된 현장만이 남아 있었다.

    현준이나 이한은 보이질 않았다.

    미팅 룸을 가득 채운 죽음의 향을 마주한 세인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점점이 뿌려진 붉은 흔적들을 보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던 세인이 벽을 짚으며 흐려진 시야를 밝히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지배인님, 괜찮으십니까?”

    “……문 닫아요.”

    뒤따라 들어온 직원이 한달음에 달려와 세인의 팔을 부축했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세요.”

    “네, 지배인님.”

    “내가 연락할 때까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세요. 서 전무님은 어디 있나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현준은요?”

    “그게, 저도 서 전무님 비서란 분에게 연락을 받은 거라…….”

    민성이 호텔 직원 전화번호까지 어째서 꿰고 있는지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침 걸려온 민성의 전화 때문에 세인은 심호흡했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세인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화를 받았다.

    “네. 윤 비서님.”

    -사모님, 여기 의료실입니다.

    “이한 씨 거기 있나요?”

    -네. 직접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차분히 말한 세인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지체하지 않고 의료실로 향했다.

    “하아…….”

    발을 빨리했으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의료실로 향하는 길이 만 리 길은 되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많이 다치진 않았을 거야.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으니 위험한 상태는 아닐 거다.

    세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꾸만 무너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의료실 앞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민성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성은 결혼식 준비 중, 이한을 대신해 종종 세인을 찾아오곤 했다. 그 후로도 이한 측에서 결정한 사안에 대해 통보하는 역할을 해왔다.

    민성을 볼 때면 낙담하는 마음이 컸는데, 이 순간만큼은 그가 눈물 나게 반가웠다.

    “윤 비서님.”

    세인이 부르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민성이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 숙였다.

    의료실 문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는 모양이, 직접 들어가 보란 뜻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는지라, 세인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은 얼어붙은 것처럼 감각 없는 손으로 의료실 문을 열었다.

    의료실 안에서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피 묻은 거즈를 가득 들고 움직이던 김 의원이 먼저 세인을 발견했다.

    “지배인님 오셨습니까. 전무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커튼이 쳐진 베드를 눈짓한 그가 수도를 틀어 손을 씻었다. 핏물이 씻겨 내려가는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었다.

    세인의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이한 씨는 어때요?”

    “자상이 꽤 깊어서 서른 바늘 정도 꿰맸습니다.”

    김 의원이 왼쪽 쇄골 아래를 툭툭 두드렸다.

    “위험한 부위는 아니었는데 출혈이 심해서 애 좀 먹었습니다.”

    출혈이란 단어에 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제가 예쁘게 꿰맸으니 걱정 놓으세요. 상처는 좀 남겠지만 크게 흉측하진 않을 겁니다.”

    “그럼 위험하진 않은 건가요?”

    “예. 하지만 오늘은 열이 날 수 있으니 주치의를 부르셔서 자택에서 편히 요양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물론 입원하시는 편이 가장 좋지만…….”

    손을 닦은 그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무님께서 거절하시네요.”

    세인은 주저앉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생명이 위독하지 않다는 말을 직접 듣고 나서야 안도감이 번진 거다. 막혀 있던 피가 역류하듯 전신에 힘이 풀렸다.

    “하…….”

    안심하고 나자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선 이한이 원망스러워졌다.

    “나쁜 자식.”

    “그거, 나야?”

    커튼이 걷히는 소리가 났다. 헤드에 기대앉은 이한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이한은 상체를 전부 탈의한 채였다. 그의 어깨를 중심으로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저게, 괜찮은…… 거예요?”

    세인이 따지듯 김 의원을 보며 물었다. 그가 멋쩍게 허허 웃었다.

    “사람이 칼에 찔렸는데 이만하길 다행이지요.”

    세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득 찬 울분 때문인지 목 안쪽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자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아파. 그러니까 이리 와.”

    “나 때문에 이런 거죠? 강현준이 나 때문에…… 당신을, 그런 거죠?”

    현준이 이한을 해칠 만한 동기는 세인뿐이었다.

    아까 일로 앙심을 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때 객실 밖으로 나가는 현준을 말렸다면 이한이 다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세인은 먹구름 같은 죄책감에 휩싸여, 차마 이한에게 더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슬쩍 기울인 이한은 눈썹을 좁히며 부정했다.

    “그런 건 아니고. 정세인.”

    이한이 링거 줄이 매달린 손을 내밀어 세인을 재차 불렀다.

    “강현준…… 지금 어디 있어요?”

    “어디든 지옥이겠지.”

    서늘하게 웃으며 이한이 답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사람이 칼을 맞아놓고 어쩜 이렇게…….”

    어쩜 이렇게 태연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차라리 원망하고 화를 내주지.

    세인은 자꾸만 울컥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려 호흡을 정돈했다.

    이성을 되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목 놓아 울 것만 같았다.

    “강현준부터 만나봐야겠어요.”

    “아니, 나부터 봐야지.”

    “나 때문에 서이한 씨가 큰일 날 뻔한 거잖아요. 그러니 내가…….”

    “나 죽을 뻔했어, 세인아.”

    세인은 핏물이 밴 붕대를 바라보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칼끝이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갔더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발밑이 쑥 꺼지는 기분이었다.

    귀가 먹먹하고 마음이 아렸다. 어디선가 네 잘못이라며 고함이 들려오는 듯했다.

    “……미안해요.”

    말라 버린 입을 연 세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자신으로 인해 또다시 누군가 다치는 것만큼 끔찍한 건 없었다.

    “이리 오라니까.”

    이한이 팔을 흔들며 세인을 나긋하게 불렀다.

    “정세인.”

    “말해줘요. 강현준 지금 어디 있나요?”

    “호텔에 없어.”

    “어디로. 집으로요? 그걸 그냥 뒀어요?”

    이한이 웃음을 거둔 채, 세인을 향해 말했다.

    “네 옆에서 기껏 떼어놨더니, 그 자식이랑 다시 얽히겠다고?”

    “흠흠.”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사이로 김 의원의 헛기침 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지배인님. 전무님께선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다른 건 나중으로 미루시고 우선 편하게 쉬도록 해주십시오.”

    “……아.”

    세인은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러나 강현준이 어딘가로 내뺄까 봐 걱정되는 마음은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통증이 심해. 나 아파.”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들썩이는 이한을 보고 나서야 세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포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이한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그럼 병원은 안 가 봐도 돼요? 아무래도 호텔은 불편할 테고요.”

    “응. 우리 집으로 가.”

    이한이 언제 눈썹을 찌푸렸냐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의 볼우물에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럼 나가서 귀가 준비를 할게요.”

    “그러지 말고 옆에 있어주면 좋겠는데. 나머지는 윤 비서가 할 거야.”

    “아뇨. 내가 할게요.”

    차를 부르고 미팅 룸 뒷수습을 해야 했다.

    “가지 말고, 옆에 있어.”

    “우린 부부잖아요. 내가 챙기고 싶어요.”

    세인은 처음으로 부부라는 허울 좋은 카테고리가 쓸 만하다 여겼다.

    철컹.

    하지만 등부터 감겨오는 갑작스러운 체온에 세인은 의료실 한가운데 우뚝 멈춰서야 했다.

    이한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나직하게 한숨 쉬었다.

    “고집 그만 부리면 안 될까.”

    통증이 심하다던 이한은 아무렇지 않게 다친 팔로 세인을 꽉 끌어안았다.

    반대 팔에 달려 있던 링거 줄은 뽑혀 저쪽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였다.

    “가지 마. 옆에 있어.”

    세인은 결국 뒤돌아서 그를 마주 안았다. 아프지 않도록 조심히 끌어안으며 눈물을 참았다.

    ***

    다음 날 아침, 이한은 신혼집 부부 침실에서 기상했다.

    그는 기분이 상당히 괜찮은 상태였다. 열이 나는지 감시하겠다며, 밤새 딱 붙어 떨어지지 않던 세인이 행복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꿰맨 곳이 쑤시듯 당겼으나, 이한은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인의 온기에 조금은 잠들 수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옆으로 웅크린 채 잠든 세인의 어깨 위로 조심히 이불을 덮고 침실을 나왔다.

    그는 거실로 천천히 걸어가며 어제저녁 보았던, 세인의 당찬 표정을 되새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 줘요.’

    말하지 않으면 당장 현준을 찾아갈 기세라서 이한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말다툼이 있었어. 그러다가 과도로 찔렸지.’

    ‘갑자기 그런 거예요?’

    ‘내가 도발하긴 했지.’

    사실대로 말할 수 없던 이한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더블나인에 칩 공급책으로 자리 잡았단 사실까진 말할 수 없던 터다.

    세인은 유주석의 일만 해도 기겁했다. 이 이상 도착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자제해야 했다.

    ‘이 일은 내가 해결할 거야. 정세인은 내 간호만 해주면 좋겠는데.’

    세인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나서기 전에 정리될 터였다.

    그걸 바라고 벌인 짓이기도 하고.

    내리쬔 햇살이 거실 바닥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거실의 풍경은 6년 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다만 세인의 방과 이한의 방이 하나로 합쳐지며 구조가 변했다.

    어제 신혼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이 없어졌단 걸 안 세인은 도깨비 집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황당해했다.

    ‘언제 공사했어요?’

    ‘살기 좋게 바꿔봤는데 어때. 마음에 들어?’

    ‘내 방이 없는데…….’

    ‘대신 우리 방이 생겼지. 이리 와.’

    이한은 아주 당당히 새로 단장한 부부 침실을 소개했다.

    이제부터 그녀에게 지낼 곳은 부부 침실임을 일러주자, 세인은 웃는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뻔뻔함이라면 이한은 자신 있었다.

    ‘부부인데, 한 방을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부부란 말은 참 용이했다. 그녀와 결혼한 건 더없이 잘한 일이었고.

    어쨌거나 이한은 환자였기에 아픈 티를 내며 세인을 붙들어두는 데 성공했다.

    회상을 마치고 거실을 스쳐 간 이한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그사이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와 있었다.

    대충 가운을 걸친 이한은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신혼인 거 알면서, 꼭두새벽부터 무례하네.”

    -새벽이라니요, 지금 10시입니다, 전무님.

    “우리 세인이가 안 깼으면 꼭두새벽이야.”

    테라스로 향한 그는 담배를 입술에 물곤 그대로 멈춰 섰다.

    신혼이라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으나, 신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두 번째 신혼인 거로 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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