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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1화 (41/95)
  • 두 번째 신혼 41화

    민성은 현준 앞으로 인주까지 밀어주었다.

    “오늘까지 변제가 불가능하실 것 같으면 거기에 지장 하나만 찍으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새 계약서를 작성하는 거죠.”

    하는 짓이 꼭 조직폭력배와 진배없어 보여 현준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하, 당신들 깡패야?”

    “네가 우리 세인이한테 했던 짓만큼 더럽진 않을 건데.”

    이한이 테이블 툭툭 두드리며 말을 더했다.

    “사면을 바라나?”

    “뭐?”

    “그럼 세인이 앞에서 무릎 꿇고 기어.”

    “미쳤어, 진짜?”

    “봐서 이자 정돈 탕감해 줄지 말지, 고려하지.”

    현준의 안색이 차츰 노래졌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풀면서도 이한의 앞에서 함부로 나불대지 못하는 건 결국 생존 본능이었다.

    서이한은 맹수 중의 우두머리 같은 남자였다. 자신은 이 바닥 서열에선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현준은 살갗에 닿는 소름을 무시하며 이죽댔다.

    “이거, 변호사를 선임해야겠는데요?”

    현준이 한 줌 남은 자존심을 발휘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덫에 빠졌단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늘 겁박하는 쪽이었던 현준은 이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 크게 델 거다. 저 서류에 지장을 찍는 순간 집안의 수치가 될 것도 명명했다.

    그렇다고 세인의 앞에 무릎을 꿇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돈 못 갚는다고 한 적 없습니다. 자꾸 협박하시면 저도 변호사를…….”

    “협박?”

    이한의 동공이 어둠처럼 캄캄해져 있었다.

    달그락. 얼음이 녹아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긴장한 바람에 보지 못했는데 미팅 룸 테이블 위에 술잔이 세팅되어 있었다.

    대체 뭘 하는 방인지 벽 한쪽에는 골프채와 야구 배트, 도끼, 그리고 기다란 일본도가 장식품으로 자리했다.

    서늘한 인상의 이한은 희한하게 이런 광경과도 잘 어울렸다. 오히려 그의 비서가 엘리트 같은 분위기였고, 이한은…….

    숨통이 졸리는 것 같아진 현준은 가지처럼 뻗어가는 생각을 멈추고 대항했다.

    “이게 협박 아니면 뭡니까?”

    “자기에겐 관대하고 타인에겐 야박한 너 같은 새끼들을 다루려면, 나도 긴장해야지.”

    전혀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이한이 웃었다.

    “무릎 꿇을 생각 없으면 가봐. 자정까지 8시간이야. 꼬랑지에 불붙은 것처럼 뛰어야지 않겠나?”

    이한이 시계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비서나 사무실로 연락을 취해 볼 생각이었다.

    혼이야 나겠지만, 어떻게든 구해 주실 거다.

    여태껏 현준이 사고를 칠 때마다 뒤처리해 주었으니.

    돈을 갚은 뒤엔 더러운 똥 한 번 밟았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더블나인을 뜨면 된다.

    정세인 앞에 다시는 얼씬대지 않으면 되겠지.

    모양이 좀 빠지겠지만, 당분간은 이한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그때, 이한을 물 먹일 방도를 차차 찾아보면 됐다.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이한이 술병을 쥐었다.

    현준은 그 모습을 보고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예전 기억 때문이었다.

    “그, 그거로 치게요?”

    “강문수 이오 전자 부사장.”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이한은 천천히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아버지는 왜…….”

    “곧 구조 조정이지. 이번 주주총회 결과에 따라 경영권이 넘어갈 텐데.”

    현준은 잘 모르는 내용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뿐더러, 회사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형이 내 이름으로 이오 전자 지분을 꽤 모아놨더군.”

    “……뭐?”

    “그걸 어떻게 쓸지 아직 결정 못 했는데, 부사장 해임안을 밀어붙여 볼까 싶어지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길게 말 안 해. 강현준, 수일 내로 한국에서 떠나.”

    귀국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나가라니. 이제 현준도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받아야 했다.

    현준의 고뇌를 읽은 듯 이한이 말을 덧붙였다.

    “강문수 부사장과 나란히 침몰하길 바라는 거면 더 버텨봐도 좋고.”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라는 듯 이한이 웃음을 머금으며 잔을 입술에 붙였다.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가 꼭 왕관을 쓴 제왕처럼 당당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이한이 정말 어렵지 않게 부친의 일을 훼방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존심이 상한 채 그를 노려보던 현준이 몸을 휙 돌렸다.

    X발. 살아오며 이런 치욕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쾅.

    미팅 룸을 나와 문을 세게 닫은 현준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제 어쩌지.

    아버지에게 무슨 핑계를 대며 한국을 뜨겠다고 한단 말인가.

    서이한에게 밉보였으니, 떠나야 한다고?

    “X발.”

    부친이 사건의 전말을 전부 알게 된다면, 아무리 현준이라도 쉽게 용서받지 못할 거다.

    부친은 특히 여자 문제에 민감했다. 또한 부친의 자리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진짜라면…….

    현준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위험에 처했을 때, 아버지는 그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라 하셨다.

    역전이란 건 약점을 잡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렇지.”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오른 현준이 야비하게 웃으며 다시 미팅 룸으로 돌아갔다.

    문을 세게 열어젖힌 현준은, 천천히 자신을 바라보는 두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런 덴 CCTV가 없을 텐데. 맞아요?”

    민성이 고개 끄덕였다.

    “예. 전무님이 머무는 곳은 녹화나 청취가 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합니다.”

    빠르게 걸어간 현준이 챙긴 건, 과일 옆에 놓인 과도였다.

    그가 손에 쥔 날렵한 과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이한 전무가 실은 빚쟁이다, 빚을 독촉하면서 빚진 이의 손가락을 벴다. 꽤 멋진 헤드라인이 되겠죠?”

    민성의 눈썹이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현준이 당당히 웃었다.

    “내가 당하고는 못 살아서 말이야.”

    이런 작은 칼을 다루는 것쯤은, 유학 생활을 지저분하게 지낸 현준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손가락이 무슨 죄야, 주인 새끼가 잘못이지.”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이한의 모습에, 덜컥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왜 무서워하지 않는 거지?

    창가에 서 있던 이한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과도를 쥔 현준의 손에 땀이 찼다.

    “가까이 오지 마.”

    놀란 현준이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향한 곳은 이한의 가슴이었다.

    하나 되레 겁박당하는 것처럼 현준은 바들바들 떨었다.

    “팔이라도 잡아줘?”

    “미, 미친 새끼가!”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으면 쓰나.”

    “……오, 오지 마.”

    “해봐. 봐줄 테니까.”

    이한이 고개를 까딱 기울여, 현준의 손가락을 눈짓했다.

    이한이 세게 나오는 건 현준의 계산에 없었다.

    “여태 이런 저열하고 졸렬한 방식으로 우리 세인이를 탐냈던 건가?”

    “오, 오지 말라고 했어!”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이한을 향해 현준이 소리쳤다.

    “강현준.”

    사정거리에 닿은 이한이 칼을 쥔 현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제 쪽으로 당겼다.

    “정 겁나면 헤드라인을 다시 쓰는 게 어때. 이오 전자 강문수 부사장의 차남, 살인 미수.”

    “뭐? 이 X발!”

    “자, 여기. 타깃을 바꿔봐.”

    “내가 못 찌를 것 같아? X발, X발…….”

    “아니, 찌를 것 같아서 그러지.”

    이한이 웃으며 손목을 좀 더 제 쪽으로 당기며 속살댔다.

    “찔러 봐. 당해 주겠다잖아. 응?”

    “미, 미친! 안 놔!”

    이한이 제 배를 대 주듯 팔을 좀 더 당겼다.

    “비, 비켜! X발!”

    헐겁게 잡은 이한의 악력에 경기라도 일으키듯 현준이 팔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이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한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헤드라인을 바꿀까? 이오 전자 강문수 부사장의 차남, 호텔에서 실족사.”

    “뭐, 뭐?”

    이한이 시원하게 열린 창문을 눈짓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현준은 소름이 턱밑까지 돋아났다.

    고층 창문은 열리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어째선지 이 방의 창문은 전부 개폐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우리 장인어른께서 사람 뒤처리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더군.”

    세인의 부친에 대해선 현준도 익히 잘 알았다. 대부업체로 몸을 불린 조직, 세평산. 그리고 지금은 세이지오 금융자산의 대표.

    정홍춘의 기업은 제문 그룹에서 떨어진 콩고물을 주워 먹고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들었다.

    현준의 부친 강문수도 직접 거론했을 정도로, 정홍춘은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데는 악귀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건 너도 싫지?”

    죽여 버리겠단 소리를, 이한은 이따위로 하고 있었다.

    현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다시. 현준아, 잘하자.”

    이한이 칼을 쥔 현준의 손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현준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한이 팔을 들어 현준의 한쪽 손목을 고정하려 했다.

    마치 제대로 찔러 보라는 듯이 현준의 팔을 확 당겼다.

    “으악!”

    이성을 잃고 놀란 현준 팔을 마구 휘둘렀다.

    얼마나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을까. 힘이 빠진 현준이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이윽고 현준이 칼을 떨어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한이 재킷을 벗어던지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 내가 안 그랬어!”

    이한의 붉게 물든 셔츠가 공포 영화처럼 섬뜩했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시간을 끌어.”

    이한이 차갑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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