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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0화 (40/95)
  • 두 번째 신혼 40화

    현준의 바람기가 상당하단 건 더블나인을 찾는 또래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걸 지윤이 모를 리가.

    “이 호텔에서 만난 상대만 해도 손가락으로 못 셀 거예요.”

    “그럴 리가……. 더블나인에서는 정세인…… 정 지배인만 만난다고 했는데?”

    “누가 그래요? 강현준이?”

    “혜…… 아니야. 아니야.”

    지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설마 혜인을 말하려던 건가.

    혜인이 이렇게까지 지윤을 부추긴 걸까.

    세인은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불쾌한 추측을 미뤄두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직접 본 것만 해도 상당하죠.”

    현준이 여성과 함께 객실에 올라가는 걸 수도 없이 봤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현준 오빠가 이제 다 정리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랬어!”

    “강현준 친구들이야 한통속이니까. 입 맞추는 게 어렵겠어요?”

    “거,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려는 지윤의 손이 연신 헛나갔다.

    현준이 만난 이들의 대부분이 더블나인 고객이었다. 직접 이름을 거론한다면 지배인으로서 실수하는 거다.

    하지만 그녀들 또한 약혼한 남자와 어울리는 부류였다. 감싸줄 필요는 못 느꼈다.

    “지금 바로 이름을 적어주면 믿겠어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어가려는 수작인 거 모를 줄 알아?”

    세인이 한숨 쉬듯 말했다.

    “임지윤 씨, 왜 아까운 인생을 허비해요?”

    “……뭐?”

    “그딴 쓰레기 버려요. 남의 말에 휘둘리지도 말고요.”

    “네, 네가 뭔데…….”

    “이제 그만 우리 언니 옆에서 떨어져 주면 안 될까요.”

    세인은 혜인을 막을 자격이 없었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혜인의 원망이 조금은 덜 괴롭게 닿길 바랄 뿐이었다.

    “시, 시끄러워. 현준 오빠가 그럴 리 없어…….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지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비틀거렸다. 현준의 바람기에 새삼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문득 세인은 만약 이한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보았다.

    이한의 다갈색 눈동자가 타인을 향해 다정하게 빛난다면.

    잠시 떠올렸을 뿐인데, 불을 삼킨 듯이 가슴이 먹먹하게 막혀왔다.

    “전부 거짓말이야. 거짓말……!”

    이성을 잃은 지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배인님!”

    그 순간, 누군가 세인을 부르며 테라스 문을 통해 수영장으로 들어왔다.

    객실 입구에 남았던 그 남자 직원이었다. 지윤을 흘긋 바라본 그가 인사도 없이 세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지배인님,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직원의 호흡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어요?”

    “강현준 회원님이…… 아니, 서 전무님께서…….”

    직원이 머뭇거리다가 세인의 귓가에 와서 속삭였다.

    “두 분에게 사고가…… 카, 칼을 휘두르셨다고 합니다.”

    세인의 눈꺼풀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가 직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차근차근 말해 보세요.”

    “죄송합니다. 그게…….”

    “어서요.”

    “강현준 회원님이 서 전무님께 칼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누가 뭘…… 했다고요?”

    “피, 피가 많이 나서…… 처, 처치를. 우선 지배인님께 말씀드리라고…….”

    흥분해 버벅거리는 직원을 뒤로하고 세인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요.”

    여느 때보다 힘이 들어간 세인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희미하게 너울거렸다.

    세인은 조금 전까지 사투를 벌이던 지윤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점점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남겨진 지윤의 입매가 볼썽사납게 비틀렸다.

    ***

    30분 전, 현준은 갑작스레 등장한 지윤이란 복병에 혀를 차야 했다.

    범죄 현장을 들킨 것처럼 머리가 아파서 우선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지윤과 세인을 남겨둔 채 객실을 빠져나온 현준은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사색이 된 직원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야, 너. 안에 아무나 들이면 어떻게 해?”

    “죄, 죄송합니다.”

    지윤이 갑자기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세인을 구슬려 볼 수 있었는데.

    처음엔 경계하는 여자들도 마음을 편히 해주면 넘어오기 마련이다.

    적당한 농담을 던지고 취미를 주제로 이야기를 한다. 필요하면 금전, 그러니까 돈지랄을 해주면 백이면 백 현준에게 넘어왔다.

    법망과 도덕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여자를 낚는 낙으로 살던 현준에게 세인은 마지막 목표와도 같았다.

    마음에 든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일에 어려움 따위 없었는데…….

    세인으로 인해 현준의 자긍심에 금이 갔다. 더블나인의 유명인사 세인만이 현준이 넘지 못한 산이었다.

    친구들과 세인을 넘기느냐 마느냐로 내기까지 했다. 1억씩 10명이니 판돈이 벌써 10억이었다.

    현준이 승리하면 9억이 돌아왔다. 그 돈이면 며칠 전, 더블나인 카지노에서 진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오늘 세인이 신혼집으로 돌아간다는 정보를 접수한 뒤였다. 그러니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출퇴근을 멀리서 하게 되면 아무래도 접점이 더 줄어들 테니까.

    이한의 눈도 피해야 했으니, 평일 대낮인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제문의 황태자 서이한.

    서늘한 그의 눈빛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렸으나, 아무리 이한이라도 이 시간에 세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진 않을 터다.

    이제 막 귀국한 기업가에게 시간은 금이었다. 능력으로 환산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세인에게 물처럼 쓰고 다니진 않겠지.

    그래서 세인을 불러들인 건데, 일이 죄 틀어졌다. 현준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죄송하다고 하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재수 없어.”

    현준이 이죽거리며 고개 숙인 직원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지윤이란 폭탄이 꼭 눈앞의 직원 잘못처럼 느껴졌다.

    “야, 사람이 말하잖아.”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내 방에 함부로 사람을 들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회원님께서 아까 문을 열어두라고 하셔서…….”

    “아니, 그건, 정 지배인 들어오라고 할 때지. 머리가 안 돌아가?”

    “죄송합니다.”

    “X발, 머리가 안 돌아가니까 이딴 일이나 하지.”

    직원이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꼴을 보자니 열만 더 뻗쳤다.

    현준이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신호등.]

    더블나인 소속 경호원의 전화였다. 그는 현준의 끄나풀이자, 정보를 물어오는 전서구 역할이었다.

    “어, 말해.”

    남자의 전화를 받은 현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남자가 전달한 말이 현준에게 썩 도움 되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준은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직원을 공기처럼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 어디라고?”

    -우측 본관 중앙 미팅 룸 A01실입니다.

    “지금 간다고 전해라. 이상한 소문 안 나게 주변 잘 살피고.”

    -네.

    현준이 전화를 끊고 걸음을 빨리했다. 빚쟁이 새끼.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담배를 빼 물었다.

    “손님, 실내에서는 금연…….”

    “누가 태운다고 했어? 별게 진짜.”

    현준은 다가와 조언하려는 직원의 가슴을 거칠게 떠밀고 엘리베이터로 올라섰다.

    필터를 씹으며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지윤의 생일 파티가 있던 날이었을 거다.

    갑작스러운 이한의 등장으로 기분을 잡친 뒤, 기분을 환기하고 싶어서 더블나인 카지노를 찾았다.

    그날따라 게임이 잘됐다. 연달아 대승을 거둔 현준은 과감한 플레이를 감행했다.

    그리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칩을 모두 잃었다.

    환전한 팁을 전부 잃은 현준은 더블나인에서 암암리에 칩을 융통해 주는 남자와 거래를 하게 되었다.

    “아, X발.”

    이게 모두 지윤 때문이었다. 현준이 소홀하게 대하자, 그녀는 현준의 부친에게 그의 태도를 일러바쳤다.

    그 때문에 생활비가 거의 10분의 1로 삭감됐다. 돈만 있었어도 빚까진 안 지는 건데…….

    딱 품위 유지만 할 수 있는 돈을 쥐여 준 영감탱이 생각만 하면 울화통이 터졌다.

    “아, 씨. 왜 안 받아.”

    현준은 걸음을 옮기며 부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바쁜 시간인지 통 받질 않았다.

    신호등이 전해 준 미팅 룸으로 들어간 현준은 멈칫했다.

    창을 등지고 앉은 남자의 실루엣이 낯익었다.

    서이한?

    조금 전 세인을 불러낸 죄가 있는 현준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방 번호에 착오가 있던 게 분명했다.

    몹시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려서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방을 잘못 찾았나 봅니다. 그럼.”

    “잘 찾아온 것 같은데. J에게 진 빚 갚으러 온 거 아닌가?”

    이한의 목소리가 지하에 깔린 어둠처럼 스산했다.

    “……예?”

    “윤 비서, 강현준이 빌린 칩이 얼마지.”

    이한이 넌지시 묻자, 옆에 선 샌님 같은 남자가 대꾸했다.

    “예. 오늘까지 이자 포함 한화로 7억 4820만 원입니다.”

    “변제일은 오늘이고.”

    “예. 전무님. 오늘까지 변제하지 못하면 이자가 5프로 인상됩니다.”

    두 남자의 대화를 듣던 현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빚진 걸 서이한이 어떻게 알고 있어?

    현준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생각을 정돈했다. 분명 현준이 돈을 빌린 출처 J는 수년 전에 더블나인에 자리 잡은 인사였다.

    “제대로 받아내.”

    “네. 전무님.”

    J가 이무영의 측근인 줄로만 알았다. 현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꽁지로 불리는 역할이니, 당연히 조직과 관련 있는 인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X발…….”

    “돈은 가져왔나?”

    “J가 설마 당신이었어?”

    “빌려 갈 땐 푼돈이라면서 고개 빳빳하게 세우더니, 어째 푼돈도 없어 보이는 얼굴인데.”

    이한이 느긋하게 대답하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드렸다.

    “어째서, 여기에서……!”

    현준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어쩐지 돈을 빌리면서도 구린 느낌이 났다. 그게 이한의 돈인 줄 알았으면 깔끔하게 손을 뗐을 거다.

    “돈놀이에 관심 있는 건 아니야.”

    “뭐?”

    “우리 세인이 일하는 곳이니 신경 쓰는 거지.”

    “…….”

    현준은 뜨끈하게 올라오는 불안감을, 이를 사리물어 참아야 했다.

    “그래서 돈은?”

    느긋하게 묻는 이한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날카로웠다.

    “아직 오늘 안 지났습니다. 설마 떼먹겠어요?”

    “그래. 꼭 갚아. 내가 우리 세인이 얼굴도 못 봐가면서 아주 힘들게 번 돈이야.”

    이한이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라도 나서서 갚아야지.”

    부친을 졸라 빚을 탕감하려 한 계획까지 들킨 것 같아서 현준은 뜨끔했다.

    “강현준 씨, 오늘 자정까지 못 갚았을 때 일어날 일입니다. 여기, 계약서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기다렸다는 듯 민성이 다가와 현준의 앞으로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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