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39화 (39/95)
  • 두 번째 신혼 39화

    현준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세인이 힘껏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코웃음 치는 목소리가 세인의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지윤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임지윤, 그녀가 현준과 세인을 벌레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 흥미로운 듯한 시선으로.

    지윤은 핸드폰을 꺼내 재빠르게 현준과 마주 본 세인의 모습을 촬영했다.

    찰칵. 사진을 남긴 지윤이 비틀린 승리자처럼 웃었다.

    “혼자 보긴 아깝네요. 정 지배인님.”

    “지금 촬영하신 거예요?”

    세인이 당혹스럽게 물었다.

    “이걸 서 전무님이 보면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아, 내가 꼭 보여 드려야겠다.”

    “사진, 당장 지우세요.”

    “내가 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나도 준비를 할 거 아니에요.”

    증거라니. 함정을 파두고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지윤은 세인을 씹어 먹으려 하고 있었다.

    세인이 딱딱하게 웃었다. 억지로라도 웃지 않으면 정말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화가 일었다.

    세인은 모든 문제를 웬만하면 둥글게, 원만하게 해결하곤 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이 없는 세인이 호텔 지배인으로 허리를 굽히며 산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혜인을 생각하며 인내를 발휘해 왔는데, 오늘만큼은 쉽사리 참아지질 않았다.

    지윤이 도를 넘었기 때문인지 이한이 뭐든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을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강경한 대응을 해야겠단 판단이 들었다.

    “임지윤 씨, 불법 촬영, 협박, 허위사실 유포 모두 범죄예요. 사진 안 지우실 거면 저도 마땅히 대응하겠습니다.”

    “허위라니. 한 명은 알몸에 비치가운, 지배인이란 사람은 평상복 차림이에요.”

    지윤이 두 사람을 더럽다는 듯 훑어보았다.

    “지배인이 객실을 은밀하게 찾아왔단 게 다 무슨 소리겠어요? 사적으로 만남을 이어간다는 거지.”

    지윤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에 스스로 타격을 받은 듯 입술을 바들거렸다.

    세인이 옅게 한숨 쉬며 말했다.

    “제가 고객님의 객실을 찾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에요. 근무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앞에 다른 직원도 있었죠. 내 상황은 충분히 해명될 것 같은데요.”

    “글쎄. 정 지배인이 어떤 식으로 고객 유치를 하는지 들은 게 워낙 많아서 말이야.”

    말을 마친 지윤이 품평하듯 세인의 몸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으며 피식 웃었다.

    “얼굴 좀 반반한 거 말곤 난 지배인님 잘난 거 모르겠더라. 왜 다들 쩔쩔매는지…… 현준 오빠는 좀 알려나?”

    지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제삼자처럼 빠져 있던 현준이었다.

    지윤의 등장에 놀라긴 했는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던 현준이 지겹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슬아슬, 풀어질 듯 말 듯 한 가운을 여미지도 않은 채 담배를 빼 물고 있었다.

    이제야 세인도 현준이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걸 깨달았다.

    순간 이한의 알몸이 떠올라 세인은 곤혹스러웠다.

    이한의 몸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현준의 차림엔 아무런 감흥이 없단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지윤아, 그만하자.”

    현준이 입을 열자, 지윤이 펄쩍 뛰었다.

    “오빠, 오빠가 어떻게……!”

    “임지윤, 그만.”

    지윤의 말을 끊은 현준이 담배 연기를 진하게 내뱉었다.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계속할 거면 혼자 떠들어라. 난 여기서 빠진다.”

    “뭐? 저 여자랑 단둘이 있어 놓고 그게 할 소리야?”

    “내가 부른 거 아닌데, 뭐.”

    룸서비스를 핑계로 직원을 쥐 잡듯 잡은 게 누구였더라.

    세인을 지명해 놓곤 현준은 모르쇠로 나왔다.

    “그럼, 정 지배인이 부르지도 않은 남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온 건가요? 직무를 이용해서?”

    지윤의 말에 세인은 급히 오느라 풀린 머리칼을 손으로 넘기며 피식 웃었다.

    “강현준 씨, 약혼녀는 무서워요? 난 우습고?”

    세인이 묻자 돌아서려던 현준의 눈썹이 실룩였다.

    “뭐?”

    “오늘 휴일인데 굳이 불러내셨잖아요. 강현준 씨가.”

    “아, X발. 돌겠네.”

    현준이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시뻘게진 눈으로 두 여자를 번갈아 살피더니 휙 돌아섰다.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현준의 비겁한 등 뒤에 대고 세인이 차분히 말했다.

    “서이한 씨 지금 더블나인에 있어요. 이 방 나가실 거면 조심하시라고요.”

    평일 낮인 지금, 이한이 더블나인에 있을 줄은 몰랐을 거다.

    그러니 겁도 없이 또 추근대려던 거고.

    확실한 건, 이 일을 이한이 알면 현준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세인은 이제 이한의 진심을 믿어보기로 했다. 의심이 걷힌 자리엔 확신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한이 현준을 그냥 두진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현준의 커다란 등이 움찔거리더니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뭐. 내가 겁이라도 먹어야 해?”

    “벌써 많이 무서우신 것 같은데요.”

    “X발.”

    방으로 들어간 현준은 옷을 갖춰 입고 나온 뒤, 객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현준의 뒤꽁무니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세인은 아까부터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연결하는 지윤을 살폈다.

    손톱을 잘근거리던 지윤은 이윽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는지 화색을 띠었다. 지윤의 반들반들한 입술이 벌어졌다.

    “네. 이 변호사님, 오늘 시간 되시죠?”

    변호사 선임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으나 세인은 지윤이 통화를 마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상간녀, 고소, 손해배상 청구 따위의 자극적인 단어가 지윤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세인은 또다시 위가 욱신댔다.

    “통화는 끝난 건가요?”

    세인이 지윤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그녀 뒤로 물이 가득 찬 수영장이 보였다.

    “들었을 텐데? 정 지배인 고소할 거예요. 나 이 일, 쉽게 못 넘어가요.”

    “네. 마음대로 해요.”

    “뭐가 그렇게 당당해?”

    “죄지은 게 없으니 떳떳한 거예요.”

    “내가 모를 줄 알아? 서 전무랑 첫사랑, 그것도 다 거짓말이잖아! 정 지배인 혼자 짝사랑이었지? 그러다 차였고?”

    지윤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말을 이어갔다.

    “진작 버림받은 주제에. 서 전무가 정략으로 결혼해 주니까 아주 기세등등해? 두 사람 전부 연기인 거 모를 줄 알아?”

    버림받은 주제에, 라는 단어가 귀에 아프게 꽂혔다.

    지윤은 지금 결혼 전, 이한과의 연애 시절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이한에게 버림받았단 걸 지윤이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리 더블나인이 소문에 민감하다곤 해도 이한과의 연애 이야기까진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윤은 이 얘기를 누구에게 들은 걸까.

    현준이 했던 말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혜인과 지윤이 친분이 있으며, 혜인을 조심하라던 말.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찜찜함이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그래, 혜인에게 묻기 어렵다면 지윤에게 물으면 그만이었다.

    “혹시 우리 언니랑 자주 연락해요?”

    “뭐?”

    지윤이 비딱하게 되물었다.

    “방금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게 중요한가?”

    “누가 그러더라고요. 임지윤 씨와 우리 언니가 친하다고요.”

    세인이 천천히 미소 짓자 지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로 뒤가 수영장이란 걸 인지하지 못하고서 걸음을 옮기는 듯했다.

    “그래서 뭐. 내가 혜인 언니랑 친한 게 문제가 되니?”

    “언니요? 언제부터 그렇게 호칭이 살가웠어요?”

    “그건…….”

    지윤은 이상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윤의 반응을 미뤄 현준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게 분명했다.

    역시나 그랬던 걸까. 씁쓸함이 까맣게 차올랐다.

    “혜인 언니야 네가 잘 알겠지.”

    지윤은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게 능숙지 않았다. 온실 속 화초로 자란 티가 났다.

    그녀는 어리고 어설펐다. 세인과 다르게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지윤 같은 타입은 주변으로부터 영향받기 쉬웠다. 세인은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지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 언니한테는 못 따져요.”

    “……뭐?”

    “그러니 임지윤 씨에게 따져야겠죠.”

    “사진이 있어. 안 무섭니?”

    조금 전 찍은 그 사진을 말하는 듯했다.

    “정 지배인이랑 현준 오빠 계속 만났던 거 증언해 줄 사람도 많고! 내가 유리한 게임이야.”

    세인이 지윤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저 낙하산 타고 이 자리까지 왔어요.”

    “……뭐?”

    “쉽게 끌어내릴 수 있는 자리, 아니란 소리예요.”

    설령 세인의 의지라 한들, 쉽사리 그만둘 수 없는 처지였다.

    세인이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뒷걸음치던 지윤의 발끝이 수영장 가장자리에 걸렸다.

    팔을 휘젓던 그녀가 수영장으로 풍덩 빠졌다.

    “조심……!”

    세인은 미간을 좁히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암만 미워도 위험한 상황을 방관할 수 없었기에 세인은 요동치는 수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윤의 얼굴이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쫄딱 젖은 꼴로 콜록대더니 허우적거리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가, 가만 안 둬! 사람을 수영장으로 밀다니……! 사, 살인 미수야!”

    “하…….”

    세인이 기가 막혀 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구질구질하고 추접스러운 싸움이었다.

    혜인까지 얽혀 있으니 파헤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란 걸 알지만…….

    지윤이 찍은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극적인 소문은 세인을 넘어 이한까지 곤란하게 할 터였다.

    자신으로 인해 이한이 피해를 입는 건 원치 않았다.

    어차피 부딪쳐야 한다면 좀 더 영리하게,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편이 좋았다.

    물살을 가른 지윤이 수영장 밖으로 기어 나왔다. 쫄딱 젖은 지윤의 모습은 처참했다.

    볼품없이 제 몸에 달라붙은 옷을 내려다본 지윤이 소리부터 질렀다.

    “이, 이게 어떤 옷인데!”

    그에 침착한 목소리로 세인이 말했다.

    “최근 강현준이 만났던 사람들 이름, 궁금하지 않아요?”

    “……뭐?”

    “임지윤 씨도 강현준 잠자리 상대가 누구인지, 전부 알진 못하잖아요.”

    세인을 쏘아보는 지윤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헛소리 지어내지 마!”

    “제 버릇 개 못 준다는데. 지금도 다른 여자와 어울리러 가고 있을지도요.”

    “오빠는 다른 여자 없어! 없어…….”

    지윤이 영 자신 없는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