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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8화 (38/95)
  • 두 번째 신혼 38화

    세인은 그동안 병원을 오가며 호텔 일까지 병행하느라 짐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어제 새벽부터 부랴부랴 이사 준비를 한 탓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걸 알고서 이한이 말했다.

    “정세인, 일이 벅차면 도움을 요청하거나 대가를 주고 용역을 사. 혼자 다 해낼 필요는 없어.”

    “자잘한 짐은 내가 하는 게 편해요.”

    “그럼 앞으론 날 불러. 다른 사람에게 하기 힘든 부탁이나 심부름 정돈 거뜬하니까.”

    이한이 누구의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 영 상상되질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구김 없는 슈트와 머리칼, 청결한 냄새.

    아무리 봐도 그는 허드렛일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업에 귀천이 있겠냐만은, 이한은 고고하고 오만하게 명령하는 편이 어울렸다.

    소파에 잠시 등을 기댄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세인이 눈을 떴을 땐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녀의 가슴 위에 이한의 재킷이 덮여 있었다. 세인은 멍한 눈을 깜빡이며 재킷에 코를 묻었다.

    좋은 냄새. 시원하고 깔끔한, 포근하고 그리운…… 안정감 있는 냄새랄까.

    “미쳤어.”

    그러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재킷을 휙 옆으로 치워 버렸다.

    세인은 혹시 이한이 봤을까 싶어서 주변을 얼른 두리번거렸다.

    방 안에 이한은 없었다.

    “갔나……?”

    자리에서 일어난 세인은 거실로 향했다. 짐이 모두 정리되어 현관 앞에 일렬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한은 테라스 밖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한낮의 수영장 수면이 햇살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그곳을 바라보며 통화하는 그의 모습이 기묘했다.

    낯선 듯 낯익었고,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이한은 세인의 마음속 어딘가에 내내 녹아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흘러들었다.

    미움도 정인 걸까. 상처만 남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오해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세인이 기억하고 있는 이한보다 더 다정하고 진지한 그를 마주할 때면 낯설고 설렜다.

    이런. 세인은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미니 주방으로 향했다.

    이사로 휴가를 낸 터라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간병인 이모님이 종일 혜인을 돌봐주기로 했기에 병원도 들를 필요 없었다.

    차 한잔하는 여유는 즐겨도 되겠지.

    세인은 얼음을 넣은 레몬차를 두 잔 만들어서 테라스 밖으로 나가 선베드에 앉았다.

    그녀가 앉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이한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잘 잤어?’

    그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한은 아직 통화 중이었기에, 세인은 방해하지 않으려 일부러 수영장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죠. 저쪽에 선수 뺏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명령조의 말투에선 가벼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난스럽고 가벼운 사람 같은데 내실엔 어둠이 비쳤다.

    이한의 그런 점이 무섭고 두려웠으며…….

    끌렸다.

    서이한은 대체 무엇일까.

    “네. 끊죠.”

    세인이 한숨을 폭 내쉬곤 테이블 위의 레몬차를 눈짓했다.

    “시원할 거예요.”

    짐 정리를 마무리해 준 감사의 표시였다.

    “빈속에 이런 걸 마셔?”

    “서이한 씨, 식사 안 했어요?”

    “너 말하는 거야. 요즘 식사는 제대로 해?”

    이한이 세인의 손에서 거둬간 잔을 제 입술에 대고 기울였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액체를 넘기는 목울대가 역동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인이 입을 열었다.

    “이젠 내 식사까지 감시하는 건가요?”

    “라운지에서 식사도 안 하고, 냉장고는 비었고 배수구는 말랐는데 룸서비스도 안 시켰으니 온종일 굶은 거지.”

    “아, 탐정이에요?”

    세인이 집착적인 면모를 발휘하는 이한에게 이죽거리듯 말하자, 그가 대꾸했다.

    “말 돌리지 마. 앞으론 식사 제대로 해.”

    잔을 내려놓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한의 붉은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반들거리는 걸 보자, 세인은 갑자기 갈증이 일어 입술을 핥았다.

    “나가서 식사부터 하는 게 낫겠네. 일어나.”

    “참 잘생겼어요.”

    “하.”

    이한이 탄식하듯 웃었다. 젖은 입술에 세인의 시선이 머물고 있었다. 그를 알아챈 이한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점점 잘 놀리네.”

    “그건 이한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난 귀여워하는 거지. 예뻐하는 거고.”

    돌연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이한이 태연하게 말했다.

    “너를 사랑하고.”

    “…….”

    불시에 들이닥친 풍랑에 세인은 웃는 것도 잊고서 굳어버렸다.

    사랑. 그런 말랑말랑한 단어는 세인의 세계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인지 이질감이 가득했다.

    “왜 그런 눈이야. 몰랐던 것처럼.”

    “……다시 말해 봐요.”

    “사랑?”

    두 번이나 듣고 나자 잘못 들은 게 아니란 확신이 섰다.

    그러나 덜컥 이한의 말을 믿기엔 그에게 받은 상처가 컸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거라 못 박기에는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이를 얼마나 사리물었는지 세인은 고막과 목 뒤가 아릿했다.

    “사랑이란 단어로 전부 함축할 순 없겠지만, 내가 이런 감정을 품은 건 정세인 하나야.”

    흔들리지 않으려 해도, 이미 그녀는 이한의 파동에 떠밀려 표류하고 있었다.

    이한의 출렁이는 애정에 조금은 정신없이, 두려워하며 쓸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젠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향해 보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 더는, 피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반쯤은 억지로 받아버린 그의 마음이 세인의 텅 빈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으니.

    “조금만 날 믿어봐. 그럼 더 편해질 거고, 웃는 일이 많아질 거야. 장담해.”

    바람이 흘러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물고 흔들었다.

    마치 답을 재촉하는 아이처럼 살랑살랑 세인을 보챘다.

    눈을 살짝 감았다 뜬 세인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그녀는 한 발 조심스레 나아간 거다.

    “무슨 의미지.”

    “앞으로 잘해 보잔 뜻이에요.”

    “…….”

    “이제 같은 집에 살 거잖아요. 그러니 잘해 보자고요.”

    이한이 손을 마주 잡자, 세인은 싱긋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의 목울대가 한 번 더 요동했으나 못 본 척하며 세인은 수영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세인의 기분처럼 은빛 수면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그냥 이 평화가 조금만 더 유지되길, 세인은 그렇게 바랐다.

    “전화 오는데, 어떻게 할래.”

    이한이 테라스 문 쪽을 눈짓했다. 열린 문 사이로 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고요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인은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던 세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호텔에 일이 생겼다.

    전화를 끊은 세인이 입꼬리에 힘주어 표정을 관리했다. 이내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문에 기대선 이한이 그런 그녀를 보며 의문 섞인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이야.”

    “잠깐 가 봐야 할 데가 생겼어요.”

    “호텔? 휴일에도 사람을 불러내나.”

    “이 일이 그래요.”

    세인이 해탈한 사람처럼 말하자, 이한이 대꾸했다.

    “피곤하면 거절해. 연차잖아.”

    “나 백수 되라고 염원하는 거 아니면 곱게 보내줘요.”

    “밥부터 먹고 백수가 되든 말든 결정하는 건.”

    “다녀와서요.”

    세인이 나갈 채비를 했다. 그 뒤로 이한의 목소리가 거칠게 휘감겼다.

    “앞으론 개 같은 상황에서 참지 마.”

    문고리를 잡으려던 세인이 멈칫했다.

    “……무슨 소리예요?”

    “뭐든 해결해 줄 테니까,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들이 널 만지거나 상처 주면 참지 말고 들이받아.”

    이한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내가 네 편인데, 뭐가 어려워. 넌 내 이름 두르고 큰소리 내면 돼. 죽이든 정리하든, 더러운 건 내가 할 테니까.”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은 세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먼저 가 있어요. 우리, 집에.”

    ***

    고객이 룸서비스에 불만을 드러낸 사고였다. 하필 세인을 지명해 호출했기에 휴가를 반납하고 직접 뛰어가야 했다.

    세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직원이 화를 당하니, 그녀의 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객이 어젯밤 스위트룸에 체크인 했단 정보만 확인했다. 자세한 신상을 파악할 새 없이, 객실로 향했다.

    상세한 것까진 파악하진 못했으나 세인이 아는 얼굴일 가능성이 컸다.

    세인은 부디 상대하기 까다롭지 않은 고객이길 바라며 뛰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석고대죄 하는 편이 수습하기 수월했으니.

    언뜻 복도 거울에 비친 청바지에 크림색 블라우스 차림이 영 단정치 못하게 보였다.

    어디 먼지가 묻진 않았을까. 세인은 객실 앞에서 고개를 숙여 차림새를 점검했다.

    벨을 누를까 했으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앞에서 표정이 어둡게 죽은 직원이 세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지배인님.”

    “고객님은요.”

    “안에 계십니다. 도착하시면 지배인님 혼자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여기 있어요. 안에서 큰소리 나면 그때, 사람 더 불러놓고 들어와요.”

    쩔쩔매는 직원을 굳이 끌고 들어가 화를 키울 필욘 없었다.

    보통 세인의 손에서 해결되곤 하니 별일은 아닐 터다.

    “네. 지배인님.”

    세인은 열린 문에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부총지배인 정세인입니다.”

    말이 없었다. 알아서 들어오란 뜻이었다. 세인은 너른 거실을 가로지르며 눈으로 고객을 찾았다.

    “안에 계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테라스 밖의 수영장에서 실루엣이 비쳤다.

    스위트룸이라 세인의 객실보다 훨씬 크고 섬세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공간이었으나, 테라스 밖 수영장 구조는 비슷했다.

    비치가운을 입은 남자가 클레임을 건 고객인 듯했다. 세인이 테라스 밖으로 빠져나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가 뒤로 도는 순간, 세인은 눈을 크게 떴다.

    세인을 맞이한 남자는 다름 아닌 강현준이었다.

    “아.”

    현준이 피식 웃더니,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럴 땐 재깍 오네. 진즉 이럴 걸 그랬어.”

    일부러 부른 걸까.

    세인은 당혹스러웠으나, 애써 본분을 되새기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식사가 불편하셨다고요. 어떤 점이 불만족스러우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딱딱하게 왜 이래.”

    허리 숙인 세인의 앞으로 다가온 현준이 작은 어깨를 두드렸다.

    껄끄러운 접촉이었다. 세인이 자연스레 팔을 뿌리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현준이 조금 더 다가와 세인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었다.

    “무슨……!”

    세인이 버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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