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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7화 (37/95)

두 번째 신혼 37화

세인은 그의 흥분을 육안으로 확인할 때마다, 민망함과 더불어 기묘한 고양감에 휩싸였다.

이게 정말 나 때문인 걸까.

다른 여자라면…… 이한은 이렇게 반응해 줄까.

세인은 손을 거둬낸 뒤 고개를 들었다.

“나머지는 서이한 씨가 해요. 이제 씻고 자야죠.”

“정세인.”

“저는 일하러 가 봐야 해요. 우선은 그렇게 해요.”

우선은. 여기까지.

과부하가 걸린 머리를 조금 식힐 필요가 있었다.

“그럼 다음엔 더 허락해 주는 거야?”

“이한 씨 하는 거 봐서요.”

“하…….”

이한이 시큰하게 웃으면서도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 봐. 네가 날 헤프게 하잖아.”

등줄기가 간지러워지는 말이었으나, 그녀는 모른 체하고 떨어진 가방을 주워 들었다.

옷차림을 정돈하고 현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키스의 여운이 남은 입술은 화장이 전부 지워졌는데도 전보다 더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그녀의 뒤로 다가온 이한이 말했다.

“그 새끼 냄새 구려. 조심해.”

“누굴 말하는 거예요?”

“이무영 대표.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하, 사장님은 진짜 아니에요.”

“진짜 아니야?”

이한이 비딱하게 되묻자 세인이 거울로 비친 이한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서이한 씨가 나 몰래 주변 정리하고 다닌 거, 용서한다고 한 적 없어요.”

이한의 입술이 올라선 채로 굳었다.

“사람 주변 조사하고 마음대로 처리하는 거, 엄연히 범죄예요. 아무리 부부여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거예요.”

“구구절절 바른 말이긴 한데, 나한텐 아니야. 그게 내가 널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네. 그러셨겠죠.”

“그리고 정혜인.”

“언니가 왜요?”

혜인의 얘기에 다소 누그러졌던 세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현준의 입을 통해 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의 이름에 촉각이 곤두서는 중이었다.

‘정혜인 조심해라.’

‘너 지윤이랑 정혜인 친한 거 모르지?’

‘오늘 파티에 너 초대한 것도 정혜인이 부추긴 거야. 이 순진하고 가련한 어린 양아.’

혜인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세인도 사람인지라 괜한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현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세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혜인이 자신을 용서했듯이, 구명해 주었듯이 세인은 혜인을 용서해야 했다.

그게 도리고 올바른 가치였다.

“정혜인 적당히 챙기고 너부터 살펴. 누가 환자인지 모르겠던데.”

이한의 염려에 싱긋 웃은 세인이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잘 자요.”

이윽고 문이 닫혔다. 세인은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가삐 뛰는 심장에 한 손을 얹었다.

이한이 몇 년 전부터 자신의 주변을 살피고, 마음대로 사람들을 정리했다는 사실이 불쾌해야 마땅한데, 어째서 사랑을 확인받은 것처럼 설레는 걸까.

정말 바보일지도 몰랐다. 세인은 고개를 젓다가 달아오른 호흡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

일주일 뒤.

세인은 제 객실의 창고 방에서 마지막 짐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앉고 일어서며 뛰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다리가 회복되었기에 직접 짐을 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한이 시도 때도 없이 객실로 보내오는 건강식품에 질려 최대한 발을 아껴 쓴 결과였다.

“정말 가는구나.”

세인이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혜인은 아직 입원 중이었지만, 오늘 신혼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되었다.

혜인이 하루빨리 신혼집으로 들어가라며 세인의 등을 떠밀어준 덕이었다.

그게 참 미안하고 고마웠다.

혜인도 제문 그룹의 눈치를 보는 거겠지.

혜인의 희생이라면 희생으로 이뤄진 신혼집 행인데도 마음 한구석은 홀가분했다.

적어도 자다 말고 호텔로 불려 나가는 일은 많이 줄어들겠지.

오랜 객실 생활에 익숙해져서인지, 짐으로 가득했던 방 하나가 거의 비워지자 기분이 묘했다.

큼지막한 캐리어 몇 개를 빼고 나니 남은 건 귀중품과 화장품, 속옷 같은 자잘한 짐뿐이었다.

결국 혜인에겐 지윤의 일을 묻지 못했다.

사실을 알아낸들 서로에게 좋을 게 없으니 덮어두자,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언니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나 그걸 타인을 통해 확인받는 건 역시나 좀 아팠다.

문득 오전에 부총지배인 명지에게 더블나인의 주인이 바뀔지도 모르겠단 소리를 들은 것까지 생각나 싱숭생숭해졌다.

똑똑똑.

“사모님, 짐은 이제 이게 다입니까?”

이한이 보내온 심부름센터 직원이, 세인이 정리 중인 캐리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만 출발하셔도 되겠어요. 이건 제가 직접 가져갈게요.”

“네!”

우렁차게 대답한 그가 세인을 흘긋거리곤 머리를 긁었다. 직원은 계속 머뭇대며 문가에서 시간을 끌었다.

그에 세인이 상냥하게 물었다.

“무슨 할 말 있나요?”

“예? 아닙니다, 그냥 연예인 누구를 닮으신 것 같아서…….”

“음, 누구요?”

“그게.”

머리를 긁은 직원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때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장신의 남자와 시선을 맞닥뜨리곤 직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신처럼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이한이었다.

“정리 다 했습니까.”

“이, 이제 마지막입니다!”

“차량은 도착한 뒤 인도하고, 철수하면 됩니다. 노닥거리지 마시고.”

이한이 직원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뒤 꽁무니를 내뺐다.

두 남자를 지켜보고 있던 세인이 허리를 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무섭게 말해요?”

“그럴 리가.”

“이렇게.”

세인이 콧등을 찌푸리며 이한을 과장되게 흉내 냈다. 그가 픽, 웃음을 흩뜨렸다.

“정세인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직시할 필요가 있어.”

이한의 말에, 속옷을 담아둔 상자를 옮기던 세인이 팔을 삐끗했다.

“아름, 뭐……?

“무거워 보이는데 둬. 내가 옮길 테니.”

어느샌가 다가온 이한이 팔을 뻗었고, 갑작스레 뒤를 덮친 이한에 놀라 세인이 어깨를 확 뒤로 젖혔다.

그 바람에 상자와 뚜껑이 분리되며 내용물이 바닥에 흩어졌다.

상자 밖으로 쏟아진 건 대부분 레이스와 얇은 끈으로 이뤄진, 조금 파격적인 디자인의 속옷이었다.

중간중간 평범한 속옷도 보였으나 색감이 튀는 속옷들에 가려 존재감이 미미했다.

세인은 평소에 정장을, 퇴근 후엔 캐주얼복을 갖춰 입기 때문에 화려한 아이템을 욕심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누구도 보지 않을 속옷만은 다채롭게 구비하는 편이었다.

물론 업무 중에 착용하는 건 부끄러워서, 퇴근 후나 휴일에 입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한에게 보일 줄 알았더라면 진즉 숨겨뒀을 거다.

당연하게도 형형색색의 란제리에 이한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이한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세인이 서둘러 주저앉으며 속옷을 챙겼다.

“쭉 모르시면 돼요. 굳이 알 것 없잖아요.”

“네 취향이면 알아야지. 생각보다 화끈하네?”

이한은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세인은 두 팔을 벌려 속옷을 끌어 모으며 말했다.

“네. 엄청 화끈하니까 빨리 나가요.”

“지금도 이런 걸 입었어?”

덩달아 다리를 굽힌 이한이 손가락 끝에 보라색의 티 팬티를 대롱대롱 달고 물었다.

미쳤어. 세인이 그걸 낚아채려 손을 급히 뻗었다.

“이리 줘요.”

그러나 세인이 속옷을 수거하는 것보다 이한이 손을 뒤로 빼는 게 더 빨랐다.

그의 손끝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속옷이 상자 안으로 툭 던져지는 꼴을 세인은 아득하게 바라봐야 했다.

“이런 거로 뭘 가릴 순 있고?”

“가, 가끔 입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왜 이런 걸 설명해야 하죠?”

“평소엔 입지 마. 피차 신경 쓰일 건데.”

이한이 시선을 내려 어딘갈 보며 말했다. 그 바람에 귀가 뜨끈해졌으나 세인은 숨은 뜻을 모르는 체했다.

“소파에 앉아 있어. 피곤할 텐데 조금이라도 쉬어.”

“됐어요. 속옷 만지지 말라고요!”

“발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혹사야. 도착한 뒤엔 짐 정리하겠다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거잖아.”

세인이 입술을 꾹 닫았다.

장난스럽던 태도를 지운 그가 묵묵히 속옷을 집어 상자 안에 넣었다.

더 말리다간 괜히 민망한 꼴만 보일 것 같아서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화장대 의자에 걸쳐진 속옷을 집어 든 이한이 잔잔히 웃었다.

“익숙하네, 이 블랙.”

“…….”

이한의 손끝에 걸린 속옷은, 세인이 수영장에서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은 날 입고 있던 그 속옷이었다.

그의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서, 이한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아무렇지 않게 가운을 걸쳐 입은 바 있었다.

“……무슨, 모양까지 기억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그 모습을 얼마나 곱씹었다고.”

“변태.”

세인이 싱긋 웃자, 이한이 재질을 감별하듯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기억에 워낙 생생하게 남아서, 잊을 수가 있어야지.”

“미쳤어요? 얼른 내려놔요. 그리고 당장 잊어주세요.”

“잊어주세요.”

이한이 세인의 말을 따라 하며 옅게 웃었다. 예쁘게 팬 볼우물에 홀리려는 걸 세인을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지난 일주일간 이한은 이런 식으로 세인의 삶에 스며들었다.

이한이 바쁜 탓에 하루에 한두 시간 만나는 게 고작이었으나, 그가 끼친 여파는 세인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눈 뜨고 있는 시간이 이한의 생각으로 가득 차버린 게 세인으로선 억울하기만 했다.

조금 더 놀릴 줄 알았는데, 이한은 의외로 세심한 손길로 속옷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앉아, 진짜 쓰러지기 전에.”

이한이 소파를 눈짓하는 바람에 세인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사실 어제부터 잠을 설친지라 몹시 피곤했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 속옷 너무 자세히는 보지 말아요.”

“하나하나 눈에 새겨야지, 누구 취향인데.”

이한이 단조로이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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